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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악마 같은 놈

  • “아직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나 봐? 그래, 한 번 해보자 이거지?”
  • 입꼬리를 삐딱하게 세우고서 음산하게 읊조리던 하서준이 제 뒤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호통쳤다.
  • “데려가!”
  • 온주주의 얼굴이 사색이 되다 못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 “뭘 데려가? 데려가긴 어딜 데려가? 난 지금 미국 시민권자야. 지금 이거 엄연히 납치야. 범법행위라고!”
  • 그 얘기에 하서준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 “법? 여기서는 내 말이 곧 법이야! 데려가!”
  • “하서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미쳤어? 언제는 내가 사라지기를 원하더니 날 데려가서 뭐 하려고? 왜, 한 여자로는 만족이 안 돼? 첩이 필요해서 그러는 거야? 하서준, 이 미친놈아, 당장 이거 풀지 못해!”
  • 경호원들에 의해 일 층으로 끌려간 온주주였지만 삼 층 사무실에까지 입에 담기도 험한 욕설들이 들려왔다.
  • 하서준의 이마 위로 핏줄이 불끈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힐긋 바라본 비서 임주영은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괜히 저한테 불똥이라도 튈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전 사모님의 용맹한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서준에게 욕을 퍼붓다니, HS 그룹에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사형감이었다.
  • 온주주가 끌려가는 것으로 소동은 일단락된 듯싶었다. 오전 내내 소란스러웠던 병원도 빠르게 평온을 되찾았다.
  • ——
  • 한편, 도심에 위치한 한 고급 아파트.
  • 정연은 온주주의 부탁대로 아이들을 집에 보내는 대신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데려왔다.
  • “이모 잠깐 가게 문을 열러 나가 봐야 할 것 같아. 티브이 보면서 기다리고 있어. 이모가 맛있는 거 사가지고 올게.”
  • “네, 이모.”
  • 맛있는 걸 사 온다는 소리에 지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대답했다.
  •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대답하던 지민은 정연이 집을 나서자마자 바로 전화기 옆으로 다가갔다.
  • 인형을 품에 꼭 안고 있던 지윤이 그 모습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 “오빠, 뭐해?”
  • 지민이 수화기를 들며 대답했다.
  • “엄마한테 전화하려고. 엄마가 정말 병원에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 “왜?”
  • 엄마는 분명 아까 공항에서 병원으로 출근하러 간다고 했는데 왜 다시 확인하려는 건지, 지윤의 작은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 한참을 기다려도 지민이 대답해 주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금세 흥미를 잃은 지윤은 인형을 안고서 티브이 보러 소파로 향했다.
  • 통화연결음이 십여 초 간 울린 뒤에야 병원 측에서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여보세요? 닥터 낸시 오늘 출근했어요?”
  • “닥터 낸시요? 잠시만요. 오늘 출근하지 않으셨네요. 이미 예약되신 분이시라면 다른 시간으로 바꿔드릴까요?”
  •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온 간호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지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 그럼 엄마는 병원이 아닌 어디로 가셨을까.
  • 의구심이 들었지만 지민은 더 이상 추궁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통화를 마치고서 의자에서 훌쩍 뛰어내린 지민은 빠른 걸음으로 정연 이모의 서재로 들어갔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위의 컴퓨터 화면에 클레어 병원의 CCTV 영상이 고스란히 담겼다.
  • 지민은 몇 번의 조작으로 로비와 엘리베이터, 그리고 삼층 원장 사무실 앞에서 엄마의 모습을 찾아냈다.
  • 컴퓨터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던 지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온전한 모습으로 원장 사무실에 들어갔던 엄마가 검은 옷을 입은 아저씨들에게 끌려 나왔던 것이다.
  • 그 참혹한 모습에 지민의 좁은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 같은 시각, 힐튼 호텔.
  • 온주주는 끌려온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속박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 하지만 검은 장정들 앞에서 그녀의 발악은 새 발의 피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온주주는 결국 경호원들에 의해 맨 위층에 있는 악마 같은 놈의 면전에 끌려갔다.
  • “하서준, 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 병을 치료하지 않을 거니까 포기해!”
  • 지금 온주주에게는 힐튼 호텔 맨 위층 로열 스위트룸의 호화로운 내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시큰거리는 손목을 문지르며 온주주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 정작 당사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거실 안쪽에서부터 들려온 기척 소리에 온주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 “이제 왔어? 삼십팔 분이나 늦었으니까 오늘 어린이집에 안 갈 거야!”
  • 소파 뒤쪽에서 걸어 나온 아이는 무뚝뚝한 표정 하며 냉랭한 분위기가 하서준과 아주 판박이었다.
  • 게다가 언행마저 찍어낸 듯 똑같았다.
  • 목뒤가 쭈뼛 설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온주주는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그런 온주주의 모습을 무감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하서준이 아이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부드러운 어조로 달랬다.
  • “오늘 아침에 일이 좀 생겨서 늦었어. 나중에 보상해 줄게. 됐지?”
  • 그러자 하혁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 “아빠는 계약할 때에도 이렇게 이랬다저랬다 해?”
  • “…”
  • “…”
  • 아이의 되바라진 반격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이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이번엔 온주주에게로 향했다.
  • “저 아줌마는 누구야?”
  • “!!”
  •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댔다. 주변의 모든 흐름이 멈추고 아이의 모습만 오버랩되어 온주주의 눈에 담겼다. 소용돌이치며 밀려오는 감정에 온주주는 손끝이 후들후들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