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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작은 실루엣

  • 온주주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 여자를 데리고 와서 아버지께 그녀를 사랑한다, 결혼하겠다고 맹세했지만 이제 와서 온주주를 데리고 간다니 그와 그녀가 파국이 될까 걱정이 되지도 않은가?
  •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고작 너 따위가? 내가 똑똑히 말해주는데 너 자신을 너무 높게 보는 경향이 있어. 지금 나한텐 네가 죽었든 살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 만약 네가 오늘 나오지 않았어도 이후에 네 시체를 들고 돌아갔어도 똑같다는 말이야.”
  • 악마의 눈빛이 섬뜩였다. 그가 말 한 마디 한 마디 끊어 끊어 말할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 온주주의 주먹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를 동안 그녀는 도대체 뭘 바라고 있었던 걸까?
  • 저 자식이 인간답게 변해 정상적인 말을 주고받길 바랐던 걸까?
  • 온주주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배 안으로 들어갔고 배도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 알고 보니 이 배가 돌아가는 교통수단이었나 보다.
  • 온주주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는 벗어날 구멍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그래서 방에 갇힌 뒤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 “도련님, 이러시면 안 돼요.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
  • “조용히 해! 저리로 썩 꺼지라고!”
  • 온주주는 배고픔과 밖에서 들리는 소음에 눈을 떴다.
  • 그리고 앳된 목소리도 이따금 들려오는 것 같았다.
  • 앳된 목소리?
  • 하혁인가?
  • 하서준이 이 배에 있으니 하혁도 함께 있는 게 이상한 점은 아니었다.
  •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녀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온몸의 피가 다시 들끓는 기분이 들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창가로 달려갔다.
  • 창가로부터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 검은색 슈트 차림의 남자는 경호원일 것이고 카키색 두꺼운 외투를 입은 자그마한 몸짓이 바로 하혁이겠지. 검정 털모자를 쓴 아이는 멀리서 봐도 잘생긴 것 같았다!
  • 저렇게 잘생긴 도련님이면 당연히 하혁이 맞아!
  • 온주주는 작은 실루엣을 바라보며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 “혁아? 혁아!”
  • “누구야?”
  • 펜스 바로 앞에서 드론 조종에 집중하던 하혁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역시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나 방해를 받은 탓에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 온주주가 이를 보고 창가에서 손을 흔들었다.
  • “여기야, 여기. 혁아, 엄…… 이모야.”
  • 그녀는 하마터면 자신이 엄마라고 말할 뻔 했다.
  • 하혁이 그녀를 찾았다. 그러나 온주주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버지를 똑 닮은 눈에서 똑같이 냉랭한 기운이 드러났다.
  • “누구?”
  • “저기…… 도련님. 이젠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아니면 대표님이 또 도련님을 꾸짖을 거에요.”
  • 그 중요한 타이밍에 경호원이 둘 사이를 막아섰다.
  • 온주주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 “혁아, 나야. 우리 호텔에서 본 적 있잖아. 기억 안 나?”
  • 그녀는 창문에 매달려 그에게 온 힘을 다해 설명했다.
  • 그리고 아이는 드디어 그녀를 기억해냈다.
  • “어! 너였어!”
  • “맞아, 맞아. 나야. 혁아, 여기로 와서 이모 얼굴 한 번만 보여주면 안 될까? 한 번만.”
  • 온주주는 기쁨에 겨우 말했다.
  • “도련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
  • “비켜.”
  • 하혁의 차가운 눈빛이 경호원에게 닿았고 이어 그는 뚜벅뚜벅 다가갔다.
  • 온주주는 너무 기뻤다. 드디어 아이에게 닿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저번에 호텔에서는 말도 제대로 걸지 못했었다.
  • “혁아……”
  • “왜 여기 갇혀있어? 아빠 병 봐주러 온 거 아니야?”
  • 하혁이 걸어와 꽤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온지민과 똑닮은 얼굴이었지만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그는 무관심한 태도로 온주주를 대했다.
  • 온주주는 가슴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 모두 그녀의 잘못 같았다. 아이를 어릴 때부터 그 사람의 밑에서 자라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지만 않았어도 동생들처럼 밝고 잘 웃으며 지낼 수 있었을 텐데……
  • 온주주는 창가로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를 어루만지려 했다.
  • “맞아, 난…… 아버지 병을 봐주러 왔어.”
  • “병을 봐주는데 왜 가두는 거야? 아빠가 너한테 뭘 한 거지?”
  • 하혁 역시 온지민처럼 눈치가 빨랐다. 문에 걸린 자물쇠만 보고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판단했다.
  • 온주주는 그 말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 “괜찮아, 하혁아. 엄…… 이모 걱정은 안 해도 돼. 아버지가 나한테 무슨 짓 안 할 거야. 이젠 시간이 너무 늦기도 했고 바람도 세니까 빨리 돌아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