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3화 재회

  •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 지민아, 엄마 눈 보고 똑바로 얘기해. 지난번에도 선생님한테 어린이집의 컴퓨터를 망가뜨리는 방법을 가르쳤잖아. 어린이집 나오기 싫다고. 이번에도 또 나쁜 일을 한 거 아니야?”
  • “윽…”
  • 엄마는 왜 항상 이렇게 총명하고 잘생기고 멋있는 아들이 나쁜 짓만 하고 다닌다고 생각할까 온지민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 바보 같은 선생님들이 지민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것인데.
  •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삐죽거린 온지민은 이내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서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도. 선생님들에게 게임 하나 가르쳤어요. 엄마, 지민이 배고파요. 우리 빨리 집에 가요.”
  • “…”
  •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분명 수상한 냄새가 났지만 온주주는 결국 더 이상 추궁하는 대신 아무 말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 온주주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마지막으로 나온 음식을 테이블에 올려놓는 순간,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병원 측에서 의논한 결과, 그 환자분을 닥터 낸시가 담당하기로 결정을 내렸어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지금 당장 병원에 와주실 수 있을까요?”
  • “지금요?”
  • “네, 병원 측의 결정을 듣고서 환자 가족분께서 담당의를 만나보고 싶다며 지금 병원에 오셨어요.”
  • 전화기 너머에서 간호사의 체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딜 가든 저들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기를 원하는 막무가내 부자들 때문에 간호사는 오늘도 골머리를 앓았다. 그런 환자를 받게 되는 날이면 병원 측에서도 비상이 걸리기 일쑤였다. 바로 오늘처럼. 소식을 전해 듣고서 집에서 부랴부랴 병원으로 돌아온 원장만 보아도 예삿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 거듭된 부탁에 온주주는 결국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지민아, 엄마 다시 병원에 가봐와야 할 것 같은데 지윤이랑 둘이서 저녁 챙겨 먹을 수 있지?”
  • “네.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내가 지윤이를 잘 돌볼게요.”
  • 그렇게 말하며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은 온지민은 온주주에게 어서 가보라고 손을 흔들었다.
  • 온주주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 온주주가 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초승달처럼 휘어졌던 온지민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려온 온지민은 재빨리 온주주의 서재로 쏙 하고 들어갔다.
  • “오빠, 뭐해? 엄마가 밥 먹으라 했잖아.”
  • “쉿, 조용히 해. 난 지금부터 원장 선생님의 컴퓨터에 들어가 봐야겠어. 오늘 나랑 꼭 닮은 아이가 새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애가 대체 누구인지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 그렇게 말하며 온주주의 테이블 위로 폴짝 뛰어올라간 온지민은 단 몇 분 만에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의 컴퓨터를 해킹하는 데 성공했다.
  •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 전학 온다는 아이의 자료를 수월하게 찾아낼 수 있었다.
  • “우와, 이거 오빠야?”
  • 화면 위로 사진이 튀어나오는 순간, 곁에 있던 온지윤이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 그 얘기에 온지민이 눈살을 확 찌푸리며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 “아니야. 얘 이름은 하혁이야. 여기 쓰여있잖아.”
  • 그렇게 말하며 온지민이 작은 손가락을 내밀어 아이의 이름이 써져 있는 부분을 콕 집어 가리키자 온지윤의 눈망울이 화등잔만 해졌다.
  • “하혁? 그럼 오빠가 아니잖아. 근데 왜 오빠랑 이렇게 닮았어? 얘도 엄마 아이야?”
  • “…”
  • 아이의 작은 머릿속으로 문득 웬 작은 상자에서 아무도 입지 않은 갓난아이의 배내옷을 꺼내보며 몰래 눈물을 흘리던 온주주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온지민은 고민 끝에 자신과 꼭 닮은 이 아이를 직접 만나보기로 결심했다.
  • “힐튼 호텔…”
  • 아이는 파일에 적힌 주소를 빠르게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 삼십 분 뒤, 클레어 병원.
  • “오셨어요?”
  • “네, 가족분은 어디 계세요?”
  • “원장실에 계세요. 가족분 성격이 보통 아니시니까 조심하세요.”
  • 불만 섞인 간호사의 어조에 온주주는 옅게 미소 지었다. 가운으로 갈아입고 마스크까지 착용한 온주주는 깊게 심호흡하고서 원장실로 향했다.
  • “원장님, 낸시입니다.”
  • “어, 낸시, 어서 오게. 가족분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셨다네. 어서 들어와 인사하게나.”
  • 늦은 시간임에도 불이 환히 켜진 원장실에는 나이 지긋한 원장이 머리에 식은땀까지 흘리며 맞은편에 앉은 환자의 가족과 열심히 소통하고 있었다.
  • 하지만 썩 대화가 통하는 상대는 아닌 듯싶은지 원장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 눈치를 살피며 노심초사하던 원장은 불현듯 들려온 온주주의 목소리에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은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친히 문을 열어주었다.
  • “…”
  • 직접 마중하러 나온 원장의 모습에 온주주는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이내 원장의 뒤에 있는 여자에게로 옮겨졌다. 여자의 정체를 확인한 온주주의 눈가가 작게 경련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온주주는 아연실색했다.
  • “이 분이 바로 원장님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그 한국 의사분이세요?”
  • 문이 열리는 소리에 여자도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 늘씬한 키에 여성미 넘치는 갈색의 웨이브 헤어, 세련된 메이크업을 한 여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고급 브랜드의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휘감고 있었다.
  • 온몸으로 안하무인의 거만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고여름이었다.
  • 다른 누구도 아닌 고여름과의 재회라니, 지긋지긋한 악연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러니까 그녀가 치료해야 될 환자가 고여름이란 말인가.
  • 마스크 밖으로 드러난 눈동자가 서릿발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 하서준과는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온 씨 가문과 하 씨 가문은 대대로 친분이 두터웠다. 그러다 온주주가 태어나던 해에 두 가문에서는 당시 다섯 살이었던 하서준과 그녀의 혼사를 멋대로 정해버렸다.
  • 온주주도 처음에는 두 가문 어른들끼리 농담으로 한 얘기겠거니 생각하며 개의하지 않았다.
  • 설령 그 상대가 그녀가 어렸을 적부터 짝사랑하던 남자일지라도.
  • 그러다 온 씨 가문에 변고가 생기고 하루아침에 집안이 풍비박산하게 되었지만 하 씨 어르신은 온주주를 내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에게 하 씨 가문으로 시집올 것을 설득하며 더욱 적극적으로 두 사람의 혼사를 밀어붙였다.
  • 하 씨 어르신의 거듭된 회유에 온주주의 마음도 비로소 기울어졌다.
  • 하지만 화약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결심으로 하 씨 가문에 시집온 온주주에게 그러한 시련이 닥쳐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 “원장님, 죄송하지만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 “그게 무슨 뜻인가?”
  • “아무래도 제 능력 밖의 일인 것 같으니 다른 선생님한테 부탁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 온주주는 서늘한 어조로 그 한마디만 내뱉고서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