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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분노한 하서준

  • “원장님, 절 부르셨다고요?”
  • 내뱉는 음성이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온주주는 하서준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서 전방을 응시했다. 마치 낯선 타인을 바라보듯 냉담하고 감흥 없는 눈동자였다.
  • 하시준의 눈가가 작게 경련했다.
  • 하서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흰 가운 차림에 의료용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나타난 여인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에 피부가 따끔거릴 지경이었지만 온주주는 애써 덤덤하게 그 시선을 받아냈다.
  • “어서 오게, 낸시. 이 분은 하 대표님이시라네. 어젯밤에 찾아왔던 그 환자분이신데 지금 이렇게 오신 김에 한 번 진찰해 볼 수 있겠나?”
  • “원장님,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제 능력 밖의 일입니다. 한의 대신 양의사를 찾아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별다른 일 없으시다면 전 이만.”
  • 그렇게 말하고서 단호하게 몸을 돌린 순간, 성큼성큼 다가온 하서준이 온주주의 손목을 잡고서 퍽 하고 벽에 밀어붙였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 예상치 못한 통각에 온주주는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페레로와 임주영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 “온주주, 지금 장난해? 어디 한 번 제대로 놀아 봐?”
  • 치밀어 오른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하서준이 사납게 구겨진 얼굴로 이를 뿌드득 갈았다. 붉게 충혈된 눈이 온주주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미쳐 날뛰는 짐승처럼 온주주의 얼굴을 덮은 마스크를 우악스럽게 찢어버린 하서준이 손목을 비틀어 온주주의 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 오 년 전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 하서준의 앞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 오 년 전만 해도 앳되고 순수한 느낌을 주던 얼굴이었다. 비록 이목구비는 그대로였지만 맑고 새하얀 얼굴에는 과거의 어리숙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고 서늘하고 냉담한 눈동자가 하서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 하서준에게 목을 졸리고 있는 와중에도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추호도 없었다.
  • 오히려 시큰둥하고 무덤덤한 눈빛에 하서준은 잠시 멈칫했다.
  • “죽여… 죽이라고… 어차피… 한 번 죽었던 몸, 두 번이라고 못 죽겠어? 하서준, 지금 날 죽이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널 내 손으로 죽일 거야!!”
  • 살기를 띤 칼날 같은 음성에 하서준은 손목에 힘을 주었다. 온주주의 목을 움켜쥔 손등에 핏줄이 튀어나왔다.
  • “대표님, 고정하세요! 사모님 그러다 정말 잘못되시겠어요!!”
  • 퍼뜩 정신을 차린 비서 임주영이 황급히 다가와 하서준의 팔을 잡고서 힘껏 꺾었다.
  • 덕분에 간신히 탈출한 온주주의 몸이 그대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주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온주주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 온주주가 몸과 마음을 갈무리하는 사이, 팽팽히 당겨졌던 사무실 분위기는 방금 전의 소동 때문인지 신기하게도 많이 느슨해졌다.
  • “그래, 좋아. 그럼 기회를 줄게. 어디 한 번 솔직하게 얘기해 봐. 오 년 전,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살았어? 아이들은? 아이들도 네가 데려간 거야? 사실대로 얘기하기 전까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하지 마!”
  • 반면 하서준의 살기는 여전히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하서준이 서슬 퍼런 시선으로 온주주를 내려다보았다. 오 년 전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온주주가 죽었다는 소식에 하서준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자책했었다. 그 뒤로도 죽음을 딛고서 살아남은 아이에게 잘해주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심지어 다른 여자와의 혼사 얘기는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 그랬는데 감히! 이런 수모는 처음이었다.
  • 바보 같았던 과거의 제 모습에 하서준은 눈앞의 이 여자를 씹어먹어도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 하지만 온주주는 하서준의 서늘한 으름장에 코웃음을 쳤다.
  • “내가 왜 살아있는지 궁금해? 왜? 내가 살아서 우리 하 대표님의 심기를 건드렸나 봐? 그건 미안하게 됐어.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너랑 결혼한 것도 아이 셋을 낳아준 것도 내가 잘못한 게 뭐야? 네 사랑만 잘 났고 구사일생으로 네게 아이를 낳아준 나는 살 권리도 없는 거야?”
  • “너-”
  • 온주주의 반박에 하서준은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그 모습에 온주주의 입가에 걸린 조소가 더욱 깊어졌다.
  • “그리고 오 년 전에 내가 죽은 덕분에 네 세기의 사랑도 이룰 수 있었던 거 아냐?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여자라면 내가 죽어버려서 새 장가도 들고 좋은 일 아닌가?”
  • “…”
  • 하서준은 문득 눈앞의 온주주가 낯설게 느껴졌다.
  • 원래도 이렇게 가시 돋친 말을 잘했던가. 이제 온주주의 모습 어디에서도 과거의 어리숙하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 과거의 온주주는 눈치를 살피기 바빴고 그의 앞에만 서면 감히 고개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매사 언행이 조심스러웠던 여자였다.
  • 하서준의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