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4화 발각

  • “…”
  • 온주주의 단호한 모습에 원장은 말문이 턱 막혔다.
  • 어이없는 상황에 고여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결국 분을 삭이지 못하겠다는 듯 날카로운 음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뭐? 야! 너 말 다 했어?”
  • 온주주는 악다구니를 쓰는 고여름에는 눈길 한 번 주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 쓰레기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었다.
  • “저게 지금 무슨 태도죠? 잘리고 싶어 환장했나?”
  • “미세스 하, 노여움 푸세요. 뭔가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지금 당장 닥터 낸시에게 제대로 설명하겠습니다. 내일이면 반드시 미스터 하의 치료를 담당하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마음이 조급해진 원장은 진땀을 빼며 고여름을 타이르더니 멀어져 가는 온주주를 뒤쫓기 위해 헐레벌떡 사무실에서 뛰쳐나갔다.
  • 미세스 하…
  • 게다가 고여름이 아닌 하서준이 치료를 받는다라…
  • 하.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귀신은 뭐 하나. 저 연놈들을 잡아가지 않고.
  • 온주주는 내딛는 걸음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 하지만 단호한 발걸음과는 달리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바들바들 떨리고 있음을 온주주 본인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굳게 움켜쥔 주먹은 마디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 온주주는 한달음에 제 차에 올라 문을 굳게 닫았다.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온주주는 운전대에 머리를 파묻고서 발갛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꾹 눌렀다.
  • 오 년, 자그마치 오 년이었다.
  • 진작에 잊은 줄 알았지만 마음 깊이 새겨진 상처는 여전히 아프고 힘든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 고여름을 마주치는 순간 온주주는 가슴 깊은 곳에서 들끓는 살의를 느꼈다.
  • 감히 무슨 자격으로 제게 구원을 바라는가. 지나가는 개 한 마리를 구할지언정 하서준에게 베풀 친절 따위는 없었다.
  • 차 안에서 한참 동안 마음을 추스른 뒤에야 온주주는 비로소 시동을 걸었다.
  • 온주주가 집에 도착하였을 때 아이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 여동생에게 밥도 먹이고 목욕도 시키며 오빠 노릇을 톡톡히 해낸 지민은 지금 아이 방에서 여동생을 꼭 끌어안고서 단잠에 빠져 있었다.
  • “엄마, 돌아오셨어요?”
  • 온주주는 고개를 숙여 잠꼬대를 하는 아들의 작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 “응, 엄마 왔어. 우리 지민이 오늘도 참 잘했어. 고마워. 잘 자.”
  • 아이는 잠시 몸을 뒤척이는가 싶더니 이내 새근새근 규칙적인 호흡소리가 들려왔다.
  • 온주주의 입가에 유려한 호선이 그려졌다. 온주주는 두 아이의 이불을 꼭 여며주고서 자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본 뒤에야 온주주는 비로소 조용히 아이들 방에서 빠져나와 서재로 걸어들어갔다.
  • “정연아, 자?”
  • “아니, 왜?”
  •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내일 아침 병원에 가면은…”
  • 온주주는 친구랑 통화하는 와중에 재빨리 인터넷에 접속해 일본행 항공편 세 장을 티켓팅했다.
  • ——
  • 한편, 도심에 위치한 힐튼 호텔의 맨 위층.
  • 소파에 긴 다리를 포개고서 앉은 하서준은 서늘한 눈초리로 밖에서 돌아오자마자 울고 있는 여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 주름 한 점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하얀 셔츠에 검은색 바탕의 격자무늬 넥타이를 맨 하서준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댔다.
  • “고여름 씨, 그러니까 클레어 병원에서 치료를 거절했다는 말씀이신가요? 게다가 소문과는 달리 그렇게 좋은 병원도 아니라고요?”
  • 대표 비서 주영도 함께 들어오다 울고만 있는 여인을 힐긋 바라보고서 물었다.
  • 하지만 클레어 병원 원장과는 달리 사모님이 아닌 고여름 씨라는 호칭을 썼다.
  • “아, 그렇다니까! 태도가 얼마나 악랄했는데. 별 볼일 없는 말단 주제에 확인차 몇 가지 물었더니 다짜고짜 욕을 퍼붓기 시작하고는 서준의 병을 절대 진료하지 않겠다고 딱 잘라 말하는데. 하 나, 참 기가 막혀서!”
  • 임주영의 물음에 고여름은 이때다 싶어 일부러 실제 상황보다 부풀려 말했다.
  •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하서준의 서릿발같은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 “그 의사가 누구야?”
  • “낸시! 원장이 낸시라고 부르는 걸 들었어. 클레어에서 유일하게 한의학을 전공한 의사라던데.”
  • 고여름은 음험한 눈을 번뜩이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온주주를 이 남자 앞에 끌고 와 저를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고 싶었다.
  • 낸시라는 이름을 들은 하서준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 하서준은 지난 몇 해 동안 중증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약물의 힘을 빌리지만 심각한 부작용 때문에 줄곧 곤혹이었다. 성격이 포악해지는 것은 애교에 불과했다. 끔찍한 두통에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플 때면 눈앞에 있는 누구라도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는데 감히 치료를 거부해?
  • 벌겋게 핏발 선 눈동자에 서슬 퍼런 살기가 감돌았다.
  • “임주영, 그 낸시라는 의사에 대해 알아봐.”
  • “네, 대표님!”
  • “그리고 지금 당장 페레로를 불러.”
  • “…”
  • 페레로는 다름 아닌 클레어 병원의 원장의 이름이다.
  • 하서준의 눈치를 힐긋 살피던 임주영은 하서준의 서슬 퍼런 기세에 흠칫하고는 황급히 명령을 수행하러 나갔다.
  •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고여름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 감히 겁도 없이 그녀 앞에서 건방을 떨었겠다.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주지.
  • 엄습하는 불안감에 온주주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밤새 뒤척이던 그녀는 어둠 속에서 깜박이는 휴대전화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 그러다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깨어난 온주주는 부재중이 한가득 쌓여 있는 휴대전화를 발견하였다.
  • 몽롱하던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