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응급의학과 전문의도 아닌 온주주한테 긴급 호출을 내릴 리 만무했다. 그러니 분명 의사로서의 본분과는 상관없는 일일 터.
여기까지 의식이 흘러가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주주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민아, 지윤아, 얼른 일어나. 오늘 엄마랑 여행 가자. 빨리 일어나. 아니면 비행기 놓칠지도 몰라.”
아이 방으로 단걸음에 뛰어들어간 온주주는 아직 단잠에 빠져 있는 두 아이를 다급한 손길로 흔들어 깨웠다.
“엄마…”
지윤의 앳된 목소리가 물기에 젖은 것처럼 축축 처졌다. 초롱초롱하던 눈망울은 좀처럼 떠지지 않는지 안간힘을 써댔다.
그에 비해 지민은 “여행”이라는 두 글자에 번쩍 눈을 떴다.
“여행? 엄마, 우리 여행 가요? 어디로 가요? 엄마 출근 안 해도 돼요?”
“휴가 받아서 일본에 다녀올까 해. 비행기 티켓도 이미 다 예약했는걸? 그러니 얼른 일어나.”
온주주는 아들의 질문에 인내심 있게 대답하면서 아직 잠에 취해 있는 딸아이를 이불 속에서 들어 안았다.
그러자 지민도 냉큼 침대에서 뛰어내려왔다.
그렇게 이십 분이 흐른 뒤, 온주주는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 아이들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지이잉… 지이잉…”
그 순간 울려대는 휴대전화에 황급히 꺼내 확인해 보니 다행히 친구 정연이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온주주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꾸역꾸역 참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세상에, 이게 지금 무슨 난리야? 낸시, 병원에 무슨 일 있었어? 네 진료실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해! 다들 널 찾던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누가 보면 빚쟁이들이 쳐들어온 줄 알겠어. 갑자기 휴가를 내겠다고 한 것도 혹시 이것과 관련이 있어? 설마 요즘 어디 높으신 분한테 원한 산 건 아니지?”
전화기 너머에서 터져 나오는 정연의 속사포 같은 말소리에 온주주의 안색이 새파랗게 굳었다.
“별일 아니야. 내 능력 밖의 일이라 환자 진료를 거부했더니 소견서를 돌려받을 목적으로 진료실을 찾은 것뿐이니까 걱정하지 마. 그쪽에서 알아서 찾으러 간 것 같으니까 너도 이만 돌아가.”
“정말? 정말 아무 일도 없어?”
정연은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온주주는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 한시라도 급한 상황에 그럴 여유도,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통화를 마친 온주주는 두 아이를 데리고 쏜살같이 공항으로 향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모든 걸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남자와는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건 둘째 치고 아이들의 안위를 생각해서라도 절대 정체를 들켜서는 안되었다.
그 남자한테 발각되는 순간 그녀에게서 아이들을 빼앗으려 할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지금의 온주주에게는 세계 굴지의 상업 제국에 맞서 싸울 여력이 없었다.
하여 온주주는 어젯밤 병원에서의 불쾌했던 재회 끝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비행기 티켓을 끊고서 정연에게 저 대신 병원에 가서 온주주의 프로필이 적힌 문서들과 사원증을 숨겨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한발 늦고 말았다.
하서준이 이렇게 빨리 병원까지 쳐들어 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를 악물고 미친 듯이 공항으로 달린 끝에 온주주와 아이들은 불과 삼십 분 만에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민아, 여기서 지윤이랑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엄마가 얼른 탑승권 받고 올게.”
“네.”
영특한 지민은 조급해하는 온주주의 기분을 기민하게 눈치채고서 재빨리 대답했다.
하지만 탑승권 자동 발급기에 항공편과 여권 정보를 거듭 입력했는데도 인식할 수 없다는 엑스박스만 뜰 뿐이었다.
온주주는 튀어나오려는 욕지거리를 애써 삼키며 여권을 들고서 안내 테스크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탑승권 발급 부탁드립니다.”
“고객님 성함이 낸시 님이시죠? 죄송하지만 고객님은 현재 출국이 제한된 상태이셔서 탑승권 발급이 불가합니다.”
온주주의 여권을 건네받고서 확인하던 승무원의 뜻밖의 얘기에 온주주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저기, 죄송하지만, 제가 왜 출국 제한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저희도 구체적인 사유를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상부로부터 클레어 병원에서 근무하시는 닥터 낸시의 출국금지 통보를 전달받은 거로 알고 있는데 의문되시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법무부나 낸시 님이 근무하시는 병원 측에 문의해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
제기랄!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분노에 온주주는 끝내 애써 삼키고 있던 욕지거리를 입 밖에 내뱉었다.
근무지와 직함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 정황이 뜻하는 바는 아주 간단명료했다.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 자식!
하서준의 막강한 세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출국 제한이라니! 심지어 목적지까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끔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