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6화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온 전 부인

  • 여동생과 함께 캐리어를 지키고 있던 지민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지윤을 끌고서 다가왔다.
  • “엄마, 무슨 일이에요?”
  • “뭐… 뭐?”
  •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온주주는 불현듯 들려온 앳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한 쌍의 아들딸을 바라보았다.
  • 아직 그녀한테는 지켜야 할 두 아이가 있었다.
  • 온주주 본인은 정체가 들켜도 상관없지만 이 두 아이만큼은 절대 그 쓰레기 같은 놈한테 들켜서는 안 된다. 아니면 정말 모든 게 끝장이다.
  • 깊게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온주주는 지민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작은 팔을 잡고서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 “지민아, 엄마가 정말 미안한데 지금 병원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아마… 우리 여행을 못 갈 것 같아. 엄마가 지금 정연 이모한테 연락할 테니까 지윤이랑 같이 정연 이모한테 가 있을 수 있어?”
  • “…”
  • 온지민은 손바닥 뒤집 듯 갑자기 바뀐 온주주의 태도에 의아했지만 엄마의 얼굴에 깃든 불안함과 죄책감을 기민하게 알아채고서 순순히 대답했다.
  • “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지윤이랑 정연 이모한테 가 있을게요.”
  • “고마워. 엄마는 우리 지민이가 너무 자랑스러워. 그럼 지윤이를 잘 부탁해. 정연 이모 오실 때까지 카페에 가서 기다리자.”
  • 어른스러운 아들을 부드럽게 바라보던 온주주는 문득 가슴이 미어져 손을 뻗어 아들을 품에 안았다.
  •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지윤이 입을 삐죽거렸다.
  • “엄마, 엄마, 왜 오빠만 안아요? 지윤이도 있어요.”
  • “그래, 우리 지윤이도 있지. 일로 와. 엄마가 안아줄게.”
  • 온주주는 눈시울을 훔치며 작은 손에 인형을 안고 있는 딸아이까지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아이들을 데리고 약속한 카페로 향했다.
  • 그로부터 십 분 뒤, 온주주는 또다시 병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 “닥터 낸시, 출근하셨어요? 원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 “네, 지금 가는 길입니다.”
  • 공항 대기실에서 빠져나온 온주주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 한 마디만 내뱉고서 통화를 끝내고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 사실 온주주는 하서준과의 만남이 두렵지 않았다. 애초에 꿀릴 것도 잘못도 없는 그녀였으니. 그럼에도 이렇게 하서준과의 만남을 기피하는 이유는 온주주 본인이 하서준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 그리고 무엇보다 두 아이의 존재가 드러난다면 그녀에게서 아이들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 하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까지 피했는데도 결국 그 남자의 손바닥 안이었다.
  • 온주주는 이왕 이렇게 된 바에 한 번 만나보기로 결심했다.
  •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서 온주주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냉담한 표정에는 방금 전까지 동요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 한편, 원장 사무실.
  • 기다리는 동안 하서준은 닥터 낸시의 사원증을 손에 들고서 만지작거렸다.
  • 낸시라…
  • 확실히 “주주”라는 이름보다는 이쪽이 더 어울리기는 했다.
  • 보아하니, 감히 그의 눈앞에서 죽은 척 자취를 감추었던 여인은 지난 오 년 동안 담력뿐 아니라 안목도 훨씬 키운 듯했다.
  • 사원증의 사진을 노려보는 시선이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두고 있는 짐승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 “임… 임 비서님, 하 대표님… 괜찮으세요? 닥터 낸시… 지금 오는 중이랍니다”
  • 사무실 구석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페레로는 갈수록 어두워지는 하서준의 안색을 힐긋 살피고서 조심스레 물었다.
  • “…”
  • 아무리 최측근에서 하서준을 보좌하고 있는 임주영이라 해도 영문을 모르겠는 건 매한가지였다.
  • 임주영은 전 사모님과 아이들이 돌아가시고 나서 대표님이 직접 안장하는 것으로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지난 오 년 동안 더 이상 고여름 씨와의 혼사를 거론한 적도 없었다.
  • 임주영은 문득 저가 모시고 있는 대표님의 진심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 사모님을 다시 부른 것일까. 설마 직접…?
  • 그 순간, 온몸을 엄습해 오는 한기에 임주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그렇게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서 하서준의 눈치만 살피고 있기를 사십여 분. 마침내 사무실 밖에서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 “원장님, 낸시입니다.”
  • “!!!”
  • 찰나의 순간에 싸늘한 정적만 감돌던 분위기가 생기를 되찾은 듯했다. 페레로는 단걸음에 문 어귀까지 뛰어갔다. 전에 없이 날렵한 몸짓에 임주영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 검은 흔들의자에 앉아 사원증을 만지작거리던 하서준의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얗게 질려버린 억센 손아귀에 무참히 일그러졌던 사원증이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두 동강이 났다.
  • 결국 와버렸다.
  • 감흥 없는 눈동자가 열린 문틈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온주주는 마치 주인처럼 사무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 차갑고 강렬한 이목구비에 짙은 눈썹은 성숙한 남자 특유의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처럼 깊었던 눈동자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온몸에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타고난 오만함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 오 년이 지난 지금도 하서준은 여전히 좌중을 압도하는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온주주는 움츠러들기는커녕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