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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줄래요, 전남편 씨

꺼져줄래요, 전남편 씨

오소영

Last update: 2024-04-23

제1화 대단한 사랑 납시었네!

  • 별다를 게 없는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만삭이 된 배를 안고서 아이 방에서 새롭게 장만한 아이 옷들을 소중히 개며 곧 있을 만남을 그려보는 그런 평범한 날. 호들갑스러운 고용인들의 목소리가 평온한 일상을 깨기 전까지는.
  • “대표님께서 돌아오신다고?”
  • 나비의 날갯짓처럼 사뿐사뿐 움직이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온주주는 조용히 고용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 발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움직이던 고용인들이 오늘따라 부산스레 움직이는 거 하며 평소보다 들떠있는 분위기는 저가 잘못 들은 게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온주주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배내옷을 정리하던 손끝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몽롱한 의식 속에서 애정이라고는 꼬물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첫날밤을 보내고서 집을 나간 그녀의 남편, 하서준은 여태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 그나마 곧 태어날 아이에 대한 애정만큼은 있는 것 같아 온주주는 안도되었다.
  • “아가야, 아빠도 너희들을 만나고 싶은가 봐. 너희도 기쁘지? 엄마도 기뻐.”
  • 온주주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우뚝 솟은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이팝꽃 같이 맑게 피어난 얼굴은 기뻐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 그리고 이틀 뒤, 지난 열 달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하 씨 가문의 큰 도련님이 돌아왔다.
  • 온주주는 고대하던 초인종 소리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서 종종걸음으로 뛰어내려갔다.
  • 하지만 설렌 발걸음이 계단 입구에서 우뚝 멈추었다. 꿈에도 그리던 남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온주주의 안색이 새파랗게 굳어졌다.
  • “하서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네 처 출산을 옆에서 도우러 오라 한 거지, 저 여자를 이 집에 들이라 한 줄 알아?”
  • “무슨 짓인지는 아버지가 더 잘 아시잖습니까. 처음부터 반대했던 결혼이었습니다. 제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오직 지금 제 옆에 있는 고여름뿐입니다!”
  • 잘 조각된 조형물 같은 얼굴이 한겨울 빙하처럼 서늘한 빛을 냈다. 제 아버지를 노려보는 검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하 씨 어르신의 노성이 집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고얀 놈! 네 아이가 곧 태어날 마당에 그런 소리가 나와?!”
  • “제가 못할 말을 했습니까? 신혼 첫날밤에 제 술에 약을 타지 않았더라면 생기지도 않았을 아이입니다. 애초에 태어날 자격도 없는 아이라고요!”
  • “…”
  • 그 한 마디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 쿵 하는 심장의 울림이 귓가에 닿았다. 온주주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이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온주주 주위에만 모든 흐름이 멈춘 듯했다.
  • 태어날 자격이 없는 아이…
  • 그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가슴을 난도질했다.
  • 온주주의 몸이 쓰러질 듯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 “꺄악! 사모님! 사모님 하혈해요!!”
  • “뭐?”
  •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 일층 거실에서 대치 중이던 부자도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고서 위쪽을 바라보았다.
  • 온주주의 공허한 눈빛과 텅 비어버린 듯한 얼굴에서 부풀어 오른 복부를 향하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새하얀 다리를 타고 뚝뚝 흘러내리던 굵은 핏방울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 하서준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 “하서준, 참… 대단한 사랑을 하는구나. 네 자식의 시신을 짓밟고 얻은 행복이 과연 오래갈까? 남은 인생… 편히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
  • 서슬 퍼런 시선으로 하서준을 노려보며 잇새로 짓씹듯 내뱉는 온주주의 모습에 하서준의 눈가가 옅게 경련했다.
  • 온주주가 그와 결혼하고서 처음 입 밖에 낸 말이었다.
  • 하서준이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열기도 전, 그 한마디를 간신히 내뱉고서 의식을 잃은 온주주는 바닥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녀를 닮아 창백한 원피스가 붉게 물들었다.
  • “빨리 구급차 불러! 빨리!!”
  • “…”
  • 몇 분 뒤, 일사불란한 구급 대원들에 의해 온주주는 쏜살같이 병원으로 옮겨졌다.
  • “서준아, 너무 걱정하지 마. 너 때문이 아니야. 지금이 무슨 시대인데 정략결혼이 말이 돼? 그것도 그렇게 비열한 방법으로. 그 여자 저주하는 거 봤어? 서준…”
  • 모두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조용해진 거실에서 고여름이 하서준의 주의를 끌려 목소리를 냈다.
  • 하지만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평소 고여름에게 화 한 번 낸 적 없었던 하서준의 매서운 눈초리가 날아와 꽂혔다.
  • “닥쳐! 네가 뭔데 감히 하 씨 가문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야?!”
  • 서릿발같은 음성이 고여름의 말머리를 잘랐다. 서슬 퍼런 기세에 화들짝 놀란 고여름은 냉큼 입을 닫았다.
  • 온주주, 이 천한 년! 하 씨 가문에는 다시 발을 들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니, 차라리 산실에서 죽어. 아이와 같이 죽어버려…
  • 한 시간 뒤, 병원.
  • “죄송합니다, 하 씨 어르신.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산모분 출혈이 너무 심해 결국 운명하셨습니다. 뱃속에 있는 세쌍둥이 중 하나는 의식이 돌아왔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정말 죄송합니다.”
  • 마침내 수술실에서 나온 산부인과 의사가 수술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하 씨 가문의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묵직한 목소리로 비통한 소식을 전했다.
  • 출산하다 억울하게 죽은 며느리 생각만 해도 원통한데 금쪽같은 손주도 둘씩이나 잃었다.
  • 미어진 가슴을 움켜쥐고서 울분을 토하던 하 씨 어르신은 결국 극심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 “어르신! 어르신!!”
  • “…”
  • 그 시각, 고여름을 데리고 하 씨 가문을 나온 하서준은 개인 소유의 펜트하우스로 향하는 중이었다.
  • 비서에게서 다급하게 걸려온 전화 한 통에 핸들 위에서 유려하게 움직이던 하서준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 “죽었다고?”
  • “네. 원래도 몸이 안 좋으셨다고 합니다. 거기다 출혈도 심하셔서 병원 측에서도 손쓸 새가 없었답니다. 다행히 세 아이 중 하나는 살려냈는데 아들이랍니다. 어르신께서 데려가셨습니다.”
  • 비서는 그 사실과 함께 흰색 천으로 덮인 병상의 사진을 찍어 보냈다. 천 위로 솟은 형태가 영락없는 어른 하나와 갓난 아이 둘의 모습이었다.
  • 사진을 빠르게 훑어보던 하서진의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 “끼익-”
  • 유려하게 달리던 차가 굉음을 내며 도로 한가운데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