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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변화

  • 오 년 뒤, 미국의 한 유명한 병원.
  • 흰 가운 차림의 온주주는 손에 소견서를 들고서 유창한 언어로 회의실 안의 여러 분야의 전문의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 귀까지 오는 똑단발을 잘라 더욱 또렷해진 이목구비는 연하게 한 화장 덕분에 더욱 생기 있고 화사하게 빛났다. 투명하리만치 맑은 새하얀 피부는 빛을 받아 반짝였고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는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닥터 낸시의 말씀대로라면 이 환자분은 수술을 하지 않고서도 한방의 침구술로 치료 가능하다는 말씀이신가요?”
  • “네, 맞습니다.”
  • 손에 들고 있는 소견서를 뒤적이던 온주주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서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 낸시는 현재 그녀의 이름이다.
  • 오 년 전 그날, 온주주는 산실에서 죽지 않았다. 수술을 담당했던 산부인과 의사는 온주주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서 하 씨 가문에 그 사실을 알리는 대신 그녀가 수술대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 온주주는 수술실에서 깨어나는 그 순간에 죽을지언정 다시는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고서 의연하게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었다.
  • 온주주는 자신의 재능과 온 씨 가문에서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한의술로 미국에서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정착하게 된 이곳에서 온주주는 단 몇 년 만에 미국 전역에 명성을 떨친 명의로 거듭났다.
  • 확신에 가득 차 있는 온주주의 목소리에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전문의들도 망설이기 시작했다.
  • 하지만 온주주는 더는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 들여다본 온주주는 단호하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닥터 낸시, 또 아이 데리러 가요?”
  • “네.”
  •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는 온주주를 발견한 동료 한 명이 친근하게 인사해 왔다. 온주주는 가던 길을 멈추고서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온주주는 아이를 데리러 가는 이 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했다.
  • 십여 분 뒤, 인근 어린이집.
  • “엄마, 왜 이제 와요. 지윤이 오래 기다렸단 말이에요.”
  • 분홍색 원피스 차림에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아이가 한산한 어린이집 대문 앞에서 도로가를 기웃거렸다.
  • 뒤뚱거리며 뛰어오는 아이의 모습에 온주주는 다급히 차에서 내렸다.
  • “미안해. 엄마가 많이 늦었지. 정말 미안해. 앞으로 다시는 늦지 않을게. 우리 예쁜 지윤이, 엄마를 용서해 주면 안 될까?”
  • “오빠가 곁에 있어서 괜찮아요. 아까도 오빠가 지윤이 먹으라고 맛있는 간식을 엄청 많이 챙겨줬어요.”
  • 작은 아이는 엄마를 탓하는 대신 엄마 품에 안겨 앳된 목소리로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 온주주는 마음으로 따뜻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 고작 몇 초 차이로 일찍 태어난 쌍둥이 오빠는 이제 제법 철이 들어 제 여동생을 곧잘 챙겼다.
  • 온주주는 그런 아이들이 대견스러워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 “그래. 그럼 우리 오빠한테 갈까?”
  • “네, 좋아요.”
  • 그렇게 찾아오게 된 사무실에서 온주주는 선생님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아들을 찾을 수 있었다. 잦은 일이라 놀랍지도 않았지만 이번엔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 건지 온주주는 순간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 “어머, 이번에 새로 온 아이 말이에요. 우리 지민이랑 완전 똑같이 생기지 않았어요?”
  • “어머, 그러네요. 이것 봐요!”
  • 그렇게 말하며 그 선생님은 온지민의 작은 얼굴 옆에 사진 한 장을 가져다 댔다.
  • 그러자 새초롬한 눈동자가 사진 위를 빠르게 훑어내렸다.
  • “어디가 닮았어요? 얘도 지민이처럼 얼굴이 동그래요?”
  • “그건 아닌데…”
  • “그럼 지민이만큼 귀여워요? 얘 눈도 지민이 눈처럼 이렇게 예뻐요?”
  • 온지민이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며 묻자 사무실 안의 선생님들 모두 자지러지게 웃었다.
  • 언뜻 보면 닮은 듯한 두 아이이지만 사진 속의 아이는 겨우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어딘가 음침하고 어두워 보였다. 항상 밝은 표정의 온지민과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였다. 어린아이다워 보이지 않는 그 아이보다는 그래도 지민이가 훨씬 귀엽다고 선생님들은 생각했다.
  • “지민아, 얼른 나오지 않고 뭐 하는 거야?”
  •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온주주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 “어? 엄마 오셨어요. 지민이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 엄마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본 아이는 얼굴에 등불을 밝힌 것처럼 환히 웃으며 책상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 이목구비는 많이 닮았을지언정, 매사에 냉담하고 인정머리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 사람과는 많이 달랐다. 작고 잘생긴 얼굴에 늘 웃음기를 띠고 있는 온지민은 마치 어둠을 물리치는 작은 태양처럼 따뜻한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