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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네가 감히

  • 온주주는 오 년 만에 처음 만난 아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감격하여 한동안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 자신이 엄마라고 얘기하려 입술을 달싹이던 찰나, 아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하서준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 신경 쓰지 마. 그건 그렇고 어린이집이 싫다면 주영 삼촌이랑 맛있는 거 먹고 놀다 와.”
  • 마침 배가 고팠던 하혁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온주주는 눈을 뻔히 뜨고서도 하서준의 비서가 아이를 데려가는 걸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뭐? 아무 상관 없는 사람? 말 다 했어? 내가 저 아이 엄마잖아!”
  • “아, 그래? 내가 알고 있는 아이 엄마는 이미 죽었고 내가 직접 묻어주었는데.”
  • 아들이 집에서 나가자마자 하서준은 와인셀러로 다가갔다. 와인 한 병을 꺼내 와인 잔에 따른 하서준이 거실 소파에 앉아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 투명인간 취급에 온주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하서준의 얘기에 마땅한 반박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 죽은 줄 알았던 엄마가 살아돌아왔다면 아들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았는데 저를 버렸다고 원망하면 뭐라 설명해야 할까.
  • 새하얗게 질리다 못해 파리해진 안색으로 온주주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그 모습에 하서준이 입가에 조롱이 가득 담긴 비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 “이제 알겠어? 그러고도 엄마라는 소리가 나와?”
  • 온주주는 손톱자국이 깊게 패일 정도로 주먹을 세게 움켜쥐고서 부들부들 떨었다.
  • “하서준, 대체 무슨 생각이야? 아들과 만나게 하지도 않을 거면서 왜 여기까지 끌고 온 거야? 불면증 때문에 그래? 내가 말했지,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 불면증은 절대 고쳐주지 않을 거야!”
  • 잇새로 짓씹듯 내뱉어진 서늘한 음성에 하서준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 “그럴 리가. 네 어설픈 실력을 믿을 만큼 난 어리석지 않아.”
  • “…”
  • 그 얘기에 가슴에 커다란 불덩이 하나가 타올랐다가 꺼졌다. 온주주는 뒤틀렸던 속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 “그럼 대체 왜 날 여기까지 끌고 온 거야?”
  • “왜 끌고 왔냐고? 정말 몰라서 물어? 훌쩍 떠나면 그만인 너와는 달리 네 죽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아? 널 아꼈던 그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관심도 없어?”
  • 그렇게 말하며 내리깐 시선에는 멸시가 깃들었다. 언제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어 하는 악귀처럼 섬뜩한 빛을 내며 번뜩이는 눈동자에 온주주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통제력을 잃은 다리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 오갈 데 없는 온주주를 유일하게 사랑하고 아꼈던 하 씨 어르신과 외숙모네 가족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 하 씨 어르신은 그 아들과는 별개로 온주주를 진심으로 아꼈다.
  • 온 씨 가문이 파산되고서 아버지는 감옥에 들어가셨고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결국 유명을 달리하셨다. 풍비박산된 온 씨 가문을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 붙잡고 계셨던 건 다름 아닌 온주주의 외숙모 유빈이었다. 온주주를 위해 무던히도 애쓰셨던 분이셨다.
  • 그런 은인에게 온주주는 그 은공에 보답하기는커녕 배은망덕하게도 죽은 척하고 멀리 떠나버렸다.
  • 온주주는 회한에 사무쳐 눈을 질끈 감았다.
  • “그게 다 너 때문이잖아!!”
  • “나 때문이라고? 하! 웃기지 마. 애초에 네가 그 말도 안 되는 결혼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 씨 가문에 시집온 것도 내 술에 약을 탄 것도 약에 취한 나와 잠자리를 가진 것도 온전히 너 혼자 내린 선택이야. 누구도 널 부추기지 않았어!!”
  • 가슴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
  • 죽음을 겪고 나면 제아무리 하서준일지라도 조금은 그녀를 측은하게 여길 줄 알았다. 하지만 오 년이나 흐른 지금, 하서준은 또 한 번 날카로운 비수로 온주주의 흉터를 후벼팠다.
  • 온몸을 휩쓴 뼈저린 고통에 온주주는 숨을 내쉴 수도 뱉을 수도 없었다.
  • “그래, 네 말이 맞아! 아무도 날 부추기지 않았어. 내가 바보 천치라서 짐승만도 못한 네놈한테 시집간 거야. 그 결혼에 나는 내 모든 걸 걸었어. 됐어? 이제 만족해?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
  • 온주주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하서준에게 물건을 집어던졌다. 가슴에서 물이 차올라 눈에 고였다.
  • 이성을 잃은 온주주의 모습에 하서준은 적잖이 당황했다.
  • 날아오는 물건을 피해 하서준이 기민하게 몸을 움직였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물건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 “온주주, 미쳤어? 미친 척해도 소용없어. 난 끌고서라도 널 그분들 앞에 데려갈 테니까.”
  • 하서준은 음산한 어조로 그 한 마디만 내뱉고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 덩달아 뒤쫓아가려던 온주주는 미처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병원에서 그녀를 끌고 왔던 검은 장정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그녀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던 것이다.
  • “…”
  • “하서준, 이 미친놈아! 거기 서지 못해! 날 내보내란 말이야! 야! 하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