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가운 차림의 온주주는 손에 소견서를 들고서 유창한 언어로 회의실 안의 여러 분야의 전문의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귀까지 오는 똑단발을 잘라 더욱 또렷해진 이목구비는 연하게 한 화장 덕분에 더욱 생기 있고 화사하게 빛났다. 투명하리만치 맑은 새하얀 피부는 빛을 받아 반짝였고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는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닥터 낸시의 말씀대로라면 이 환자분은 수술을 하지 않고서도 한방의 침구술로 치료 가능하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손에 들고 있는 소견서를 뒤적이던 온주주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서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낸시는 현재 그녀의 이름이다.
오 년 전 그날, 온주주는 산실에서 죽지 않았다. 수술을 담당했던 산부인과 의사는 온주주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서 하 씨 가문에 그 사실을 알리는 대신 그녀가 수술대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온주주는 수술실에서 깨어나는 그 순간에 죽을지언정 다시는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고서 의연하게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었다.
온주주는 자신의 재능과 온 씨 가문에서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한의술로 미국에서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정착하게 된 이곳에서 온주주는 단 몇 년 만에 미국 전역에 명성을 떨친 명의로 거듭났다.
확신에 가득 차 있는 온주주의 목소리에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전문의들도 망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온주주는 더는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 들여다본 온주주는 단호하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닥터 낸시, 또 아이 데리러 가요?”
“네.”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는 온주주를 발견한 동료 한 명이 친근하게 인사해 왔다. 온주주는 가던 길을 멈추고서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주주는 아이를 데리러 가는 이 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했다.
십여 분 뒤, 인근 어린이집.
“엄마, 왜 이제 와요. 지윤이 오래 기다렸단 말이에요.”
분홍색 원피스 차림에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아이가 한산한 어린이집 대문 앞에서 도로가를 기웃거렸다.
뒤뚱거리며 뛰어오는 아이의 모습에 온주주는 다급히 차에서 내렸다.
“미안해. 엄마가 많이 늦었지. 정말 미안해. 앞으로 다시는 늦지 않을게. 우리 예쁜 지윤이, 엄마를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오빠가 곁에 있어서 괜찮아요. 아까도 오빠가 지윤이 먹으라고 맛있는 간식을 엄청 많이 챙겨줬어요.”
작은 아이는 엄마를 탓하는 대신 엄마 품에 안겨 앳된 목소리로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온주주는 마음으로 따뜻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고작 몇 초 차이로 일찍 태어난 쌍둥이 오빠는 이제 제법 철이 들어 제 여동생을 곧잘 챙겼다.
온주주는 그런 아이들이 대견스러워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럼 우리 오빠한테 갈까?”
“네, 좋아요.”
그렇게 찾아오게 된 사무실에서 온주주는 선생님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아들을 찾을 수 있었다. 잦은 일이라 놀랍지도 않았지만 이번엔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 건지 온주주는 순간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어머, 이번에 새로 온 아이 말이에요. 우리 지민이랑 완전 똑같이 생기지 않았어요?”
“어머, 그러네요. 이것 봐요!”
그렇게 말하며 그 선생님은 온지민의 작은 얼굴 옆에 사진 한 장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새초롬한 눈동자가 사진 위를 빠르게 훑어내렸다.
“어디가 닮았어요? 얘도 지민이처럼 얼굴이 동그래요?”
“그건 아닌데…”
“그럼 지민이만큼 귀여워요? 얘 눈도 지민이 눈처럼 이렇게 예뻐요?”
온지민이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며 묻자 사무실 안의 선생님들 모두 자지러지게 웃었다.
언뜻 보면 닮은 듯한 두 아이이지만 사진 속의 아이는 겨우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어딘가 음침하고 어두워 보였다. 항상 밝은 표정의 온지민과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였다. 어린아이다워 보이지 않는 그 아이보다는 그래도 지민이가 훨씬 귀엽다고 선생님들은 생각했다.
“지민아, 얼른 나오지 않고 뭐 하는 거야?”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온주주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 엄마 오셨어요. 지민이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엄마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본 아이는 얼굴에 등불을 밝힌 것처럼 환히 웃으며 책상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이목구비는 많이 닮았을지언정, 매사에 냉담하고 인정머리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 사람과는 많이 달랐다. 작고 잘생긴 얼굴에 늘 웃음기를 띠고 있는 온지민은 마치 어둠을 물리치는 작은 태양처럼 따뜻한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