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없는 상황에 고여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결국 분을 삭이지 못하겠다는 듯 날카로운 음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뭐? 야! 너 말 다 했어?”
온주주는 악다구니를 쓰는 고여름에는 눈길 한 번 주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쓰레기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었다.
“저게 지금 무슨 태도죠? 잘리고 싶어 환장했나?”
“미세스 하, 노여움 푸세요. 뭔가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지금 당장 닥터 낸시에게 제대로 설명하겠습니다. 내일이면 반드시 미스터 하의 치료를 담당하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마음이 조급해진 원장은 진땀을 빼며 고여름을 타이르더니 멀어져 가는 온주주를 뒤쫓기 위해 헐레벌떡 사무실에서 뛰쳐나갔다.
미세스 하…
게다가 고여름이 아닌 하서준이 치료를 받는다라…
하.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귀신은 뭐 하나. 저 연놈들을 잡아가지 않고.
온주주는 내딛는 걸음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단호한 발걸음과는 달리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바들바들 떨리고 있음을 온주주 본인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굳게 움켜쥔 주먹은 마디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온주주는 한달음에 제 차에 올라 문을 굳게 닫았다.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온주주는 운전대에 머리를 파묻고서 발갛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꾹 눌렀다.
오 년, 자그마치 오 년이었다.
진작에 잊은 줄 알았지만 마음 깊이 새겨진 상처는 여전히 아프고 힘든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고여름을 마주치는 순간 온주주는 가슴 깊은 곳에서 들끓는 살의를 느꼈다.
감히 무슨 자격으로 제게 구원을 바라는가. 지나가는 개 한 마리를 구할지언정 하서준에게 베풀 친절 따위는 없었다.
차 안에서 한참 동안 마음을 추스른 뒤에야 온주주는 비로소 시동을 걸었다.
온주주가 집에 도착하였을 때 아이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여동생에게 밥도 먹이고 목욕도 시키며 오빠 노릇을 톡톡히 해낸 지민은 지금 아이 방에서 여동생을 꼭 끌어안고서 단잠에 빠져 있었다.
“엄마, 돌아오셨어요?”
온주주는 고개를 숙여 잠꼬대를 하는 아들의 작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응, 엄마 왔어. 우리 지민이 오늘도 참 잘했어. 고마워. 잘 자.”
아이는 잠시 몸을 뒤척이는가 싶더니 이내 새근새근 규칙적인 호흡소리가 들려왔다.
온주주의 입가에 유려한 호선이 그려졌다. 온주주는 두 아이의 이불을 꼭 여며주고서 자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본 뒤에야 온주주는 비로소 조용히 아이들 방에서 빠져나와 서재로 걸어들어갔다.
“정연아, 자?”
“아니, 왜?”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내일 아침 병원에 가면은…”
온주주는 친구랑 통화하는 와중에 재빨리 인터넷에 접속해 일본행 항공편 세 장을 티켓팅했다.
——
한편, 도심에 위치한 힐튼 호텔의 맨 위층.
소파에 긴 다리를 포개고서 앉은 하서준은 서늘한 눈초리로 밖에서 돌아오자마자 울고 있는 여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름 한 점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하얀 셔츠에 검은색 바탕의 격자무늬 넥타이를 맨 하서준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댔다.
“고여름 씨, 그러니까 클레어 병원에서 치료를 거절했다는 말씀이신가요? 게다가 소문과는 달리 그렇게 좋은 병원도 아니라고요?”
대표 비서 주영도 함께 들어오다 울고만 있는 여인을 힐긋 바라보고서 물었다.
하지만 클레어 병원 원장과는 달리 사모님이 아닌 고여름 씨라는 호칭을 썼다.
“아, 그렇다니까! 태도가 얼마나 악랄했는데. 별 볼일 없는 말단 주제에 확인차 몇 가지 물었더니 다짜고짜 욕을 퍼붓기 시작하고는 서준의 병을 절대 진료하지 않겠다고 딱 잘라 말하는데. 하 나, 참 기가 막혀서!”
임주영의 물음에 고여름은 이때다 싶어 일부러 실제 상황보다 부풀려 말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하서준의 서릿발같은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그 의사가 누구야?”
“낸시! 원장이 낸시라고 부르는 걸 들었어. 클레어에서 유일하게 한의학을 전공한 의사라던데.”
고여름은 음험한 눈을 번뜩이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온주주를 이 남자 앞에 끌고 와 저를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고 싶었다.
낸시라는 이름을 들은 하서준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하서준은 지난 몇 해 동안 중증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약물의 힘을 빌리지만 심각한 부작용 때문에 줄곧 곤혹이었다. 성격이 포악해지는 것은 애교에 불과했다. 끔찍한 두통에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플 때면 눈앞에 있는 누구라도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는데 감히 치료를 거부해?
벌겋게 핏발 선 눈동자에 서슬 퍼런 살기가 감돌았다.
“임주영, 그 낸시라는 의사에 대해 알아봐.”
“네, 대표님!”
“그리고 지금 당장 페레로를 불러.”
“…”
페레로는 다름 아닌 클레어 병원의 원장의 이름이다.
하서준의 눈치를 힐긋 살피던 임주영은 하서준의 서슬 퍼런 기세에 흠칫하고는 황급히 명령을 수행하러 나갔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고여름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감히 겁도 없이 그녀 앞에서 건방을 떨었겠다.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주지.
…
엄습하는 불안감에 온주주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새 뒤척이던 그녀는 어둠 속에서 깜박이는 휴대전화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다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깨어난 온주주는 부재중이 한가득 쌓여 있는 휴대전화를 발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