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잠들었을까. 눈을 떴을 때 하늘은 어두침침한 게 당장이라도 폭우를 퍼부을 것만 같았다.
“정신 들어?”
방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익숙한 게 나를 구해줬던 서진 도련님이라는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그날 너무 다급하게 차에 뛰어오른데다 어둡기도 해서 차 안의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환한 불빛이 켜진 방 안에 있으니 나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고 그 남자가 방 안의 소파 위에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 남자는 잘 생긴 얼굴에 비범한 아우라를 뽐내고 있었다. 평범한 집안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와인이 반쯤 담겨 있는 와인잔이 보였고 남자는 두 다리를 꼰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에서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흘러넘쳐 나는 그의 눈을 제대로 직시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고 몸에 걸쳐있던 옷이 어느새 이미 바뀌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딱 봐도 내 사이즈가 아닌 잠옷 원피스. 설마 내가... 나는 고개를 홱 들어 남자를 바라보고는 따져 물으려고 입을 열었지만 소리를 낼 때마다 목구멍은 칼로 베는 듯 아파났다.
“저, 저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서진 도련님은 입꼬리를 미세하게 움직이더니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생각에는?”
남자의 목소리에 담긴 조소에 나는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는 걸 알아차렸고 얼굴이 갑자기 확 달아올랐다. 하지만 다행히도 가까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모습을 들키지는 않았다. 눈앞의 남자는 한눈에 봐도 호식과 같은 건 비교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서 비범한 포스를 가졌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의 위기를 이용할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서진 도련님... 죄송해요. 제가 오해했네요.”
나는 실례를 범했다는 걸 인식하고 얼른 사과를 했고 진심을 다해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이 사람 덕분에 그곳에서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뭐 오해라니 더 따지기도 뭐 하고. 다 나았으면 그만 가지. 여긴 수용소가 아니거든.”
그는 와인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와인은 남자의 목을 따라 흘러내렸고 난 저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고 단추 하나를 풀어 헤쳐 쇄골이 드러나 있었는데 나는 남자가 이토록 섹시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눈앞의 젊은 남자는 특히 멋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고 있었고 상대방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저... 저 갈 곳 없어요...”
도망치면서 나는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다. 주민등록증은 고사하고 돈과 옷들 모두 없었기에 여기를 벗어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호식의 사람들한테 붙잡혀 갈게 뻔했다.
서진 도련님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름이 뭐야?”
“우상아요. 본명이에요.”
업소의 사람들 대부분 가명을 따로 쓰지만 내가 그 바닥에 발을 붙일 때 너무나도 어려 숨겨야 하는 것도 몰랐었다. 그 문제를 인식하고 난 뒤 이름을 바꾸려 했지만 모두들 이름이 입에 붙었다고 하는 바람에 내버려 두었었다.
상대방은 내가 이렇게 말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평가를 하듯 훑어보는 눈빛이 매우 불쾌했지만 나는 화를 낼 수 없었다.
“몇 살인데?”
“열아홉 살이요...”
남자는 와인잔을 내려놓다가 의외라는 듯 멈칫하더니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릴 것 같았어. 에이스에서 접대는 해봤어?”
왠지 모르게 남자가 물어볼 때 표정을 보니 나를 무시하거나 하려는 게 아닌 오직 내 상황이 궁금해서 묻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어 부정했지만 이유까지 설명하기는 귀찮았다. 아마 대부분 사람들 눈에 우리처럼 술 파는 애들이 접대를 해본 적 없다면 믿지 않을 거고 나도 남자가 믿어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하늘은 오랫동안 흐리더니 끝내 주룩주룩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창밖에서 수많은 빗방울들이 유리창을 두드려대는 게 마치 희귀한 악기로 알지 못할 음악을 연주하는듯했다.
이때 남자는 나를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집엔 여자 같은 거 거두지 않아. 여기 남아있고 싶다면 그럴듯한 이유로 날 설득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