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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남자와의 대면

  • 얼마나 잠들었을까. 눈을 떴을 때 하늘은 어두침침한 게 당장이라도 폭우를 퍼부을 것만 같았다.
  • “정신 들어?”
  • 방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익숙한 게 나를 구해줬던 서진 도련님이라는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 그날 너무 다급하게 차에 뛰어오른데다 어둡기도 해서 차 안의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도 못했었다.
  • 그런데 이제는 환한 불빛이 켜진 방 안에 있으니 나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고 그 남자가 방 안의 소파 위에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 남자는 잘 생긴 얼굴에 비범한 아우라를 뽐내고 있었다. 평범한 집안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와인이 반쯤 담겨 있는 와인잔이 보였고 남자는 두 다리를 꼰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남자의 눈빛에서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흘러넘쳐 나는 그의 눈을 제대로 직시할 수조차 없었다.
  •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고 몸에 걸쳐있던 옷이 어느새 이미 바뀌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딱 봐도 내 사이즈가 아닌 잠옷 원피스. 설마 내가... 나는 고개를 홱 들어 남자를 바라보고는 따져 물으려고 입을 열었지만 소리를 낼 때마다 목구멍은 칼로 베는 듯 아파났다.
  • “저, 저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 서진 도련님은 입꼬리를 미세하게 움직이더니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 “네 생각에는?”
  • 남자의 목소리에 담긴 조소에 나는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는 걸 알아차렸고 얼굴이 갑자기 확 달아올랐다. 하지만 다행히도 가까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모습을 들키지는 않았다. 눈앞의 남자는 한눈에 봐도 호식과 같은 건 비교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서 비범한 포스를 가졌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의 위기를 이용할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 “서진 도련님... 죄송해요. 제가 오해했네요.”
  • 나는 실례를 범했다는 걸 인식하고 얼른 사과를 했고 진심을 다해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이 사람 덕분에 그곳에서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 “뭐 오해라니 더 따지기도 뭐 하고. 다 나았으면 그만 가지. 여긴 수용소가 아니거든.”
  • 그는 와인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와인은 남자의 목을 따라 흘러내렸고 난 저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고 단추 하나를 풀어 헤쳐 쇄골이 드러나 있었는데 나는 남자가 이토록 섹시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눈앞의 젊은 남자는 특히 멋있었다.
  • 나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고 있었고 상대방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 “저... 저 갈 곳 없어요...”
  • 도망치면서 나는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다. 주민등록증은 고사하고 돈과 옷들 모두 없었기에 여기를 벗어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호식의 사람들한테 붙잡혀 갈게 뻔했다.
  • 서진 도련님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 “이름이 뭐야?”
  • “우상아요. 본명이에요.”
  • 업소의 사람들 대부분 가명을 따로 쓰지만 내가 그 바닥에 발을 붙일 때 너무나도 어려 숨겨야 하는 것도 몰랐었다. 그 문제를 인식하고 난 뒤 이름을 바꾸려 했지만 모두들 이름이 입에 붙었다고 하는 바람에 내버려 두었었다.
  • 상대방은 내가 이렇게 말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평가를 하듯 훑어보는 눈빛이 매우 불쾌했지만 나는 화를 낼 수 없었다.
  • “몇 살인데?”
  • “열아홉 살이요...”
  • 남자는 와인잔을 내려놓다가 의외라는 듯 멈칫하더니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어릴 것 같았어. 에이스에서 접대는 해봤어?”
  • 왠지 모르게 남자가 물어볼 때 표정을 보니 나를 무시하거나 하려는 게 아닌 오직 내 상황이 궁금해서 묻는 것 같아 보였다.
  • 나는 고개를 저어 부정했지만 이유까지 설명하기는 귀찮았다. 아마 대부분 사람들 눈에 우리처럼 술 파는 애들이 접대를 해본 적 없다면 믿지 않을 거고 나도 남자가 믿어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 하늘은 오랫동안 흐리더니 끝내 주룩주룩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창밖에서 수많은 빗방울들이 유리창을 두드려대는 게 마치 희귀한 악기로 알지 못할 음악을 연주하는듯했다.
  • 이때 남자는 나를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 “우리 집엔 여자 같은 거 거두지 않아. 여기 남아있고 싶다면 그럴듯한 이유로 날 설득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