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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평화로운 나날

  •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몸은 거의 다 나은 상태였다. 서진 도련님은 아침 일찍 문을 나선 것 같았고 안 봐도 그 같은 사람은 평소에도 바쁘게 보낼 게 뻔했다.
  • 진 기사는 나를 데리고 옷 사러 고급 매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옷들의 가격표를 보는 순간 나는 어마어마한 가격 때문에 혀를 찼고 감히 살 엄두를 내지 못했다.
  • 오후 내내 생활 필수품과 간단하고 심플한 옷 두벌 정도 사고 난 뒤 진 기사는 내 손에 들려 있는 쇼핑백을 보더니 좋은 마음으로 일깨워주었다.
  • “상아 아가씨, 저희 도련님을 위해 돈을 아끼실 필요 없어요.”
  • “도련님은 대단한 부자신가요? 뭐 하는 사람인데요?”
  • 나는 이때를 틈 타 그 남자의 배경을 알아보려 했다. 실수로 그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는 걸 피하기 위해서였다.
  • 진 기사님도 굳이 이런 주제를 피하는 것 같지는않았다. 서진 도련님 곁에 오래 있었다는 게 보일 정도로 말투에 공손함이 묻어났고 그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 “서진 도련님은 박운그룹 도련님이신데 사실 돈 같은 건 그분한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상아 아가씨도 사고 싶은 건 마음껏 사세요. 만약 상아 아가씨가 도련님을 위해 돈을 아끼는 걸 도련님이 알면 아마 안 좋아하실 거예요.”
  • 젊은 나이의 서진 도련님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랬기에 호식의 이름을 들어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거였다. 아마 그한테 호식도 나도 그저 바닥에 기어 다니는 개미 같은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 부자들의 생각을 나 같은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겠지. 게다가 내 행동을 보고 진 기사가 속으로 얼마나 웃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 사람의 돈을 마구 쓸 수는 없었다. 서진 도련님은 나를 잠시 동안 거두어 주는 거였고 이번 은혜를 언젠가는 갚아야 했기에 서로 얽히는 일이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 진 기사는 나를 도련님의 저택으로 데려다주고는 바로 떠났다. 이 넓은 집에 평소 진 기사와 시간 때만 되면 오는 가정부 아주머니 외엔 아무도 오지 않는듯했다. 내가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부자의 생활과는 많이 달랐다. 서진 도련님의 생활은 심플하고 고독했으며 친구도 적은듯했다.
  • 서진 도련님은 매일 바삐 보내는 듯했고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는 게 일상이었다. 게다가 같은 지붕 아래에 있다지만 며칠 동안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 진 기사님이 나한테 열쇠와 카드를 남겨두고 간 덕에 나는 심심할 때면 밖에서 산책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멀리 가지는 못했다. 이 작은 도시에서 언제 호식을 마주칠지 모르는데 그렇게 모험할 필요는 없었고 난 언제나 그렇듯 동네에서만 돌아다녔다.
  • 솔직히 말하면 이토록 ‘한가’한 나날은 나한테 사치와도 같았다. 예전에 ‘에이스’에 있을 때에는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했었는데 이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다니. 아마도 먼 훗날 이러한 공백기가 무척 그리울 것이다.
  • 나는 저녁에 또 일찍 잠들었다. 하지만 잠결에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 눈을 떠보니 서진 도련님은 언제 돌아왔는지 또 소파 위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가 깨어날 줄은 생각지도 못한 듯 그는 눈동자에 드리운 고독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 그러더니 내가 깬 것을 발견하고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 “깼어?”
  • “서진 도련님... 왜 여기 계세요?”
  • 나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테이블 위의 시계를 힐끗 봤다. 새벽 3시... 지금까지 일하다가 들어온 건가?
  •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이 집에 있는 모든 물건이 다 내 거고 너도 내 건데 왜? 여기 오면 안 돼?”
  • 그 한마디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 집안의 모든 것은 이 남자의 것이니까.
  • “술 한잔 같이 해.”
  • 남자는 깨끗한 와인잔 하나를 꺼내더니 와인을 따라 테이블 한쪽에 놓았다.
  • 나는 아무렇게나 겉옷을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진 도련님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기에 술을 무척 싫어한대도 마실 수밖에 없었다.
  • 나는 와인잔을 들고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충실한 청중이 될 마음의 준비를 했다.
  • 서진 도련님이 기분이 좋지 않아 함께 술을 마시자고 했으니 뭔가 속마음이라도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했다.
  • 그런데 이때 그가 물었다.
  • “다시 출근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