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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새로운 임시 거처

  • 나는 입술을 깨문 채로 이불 끝을 잡고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 “제가 청소며 빨래를 도맡아 할게요. 그리고 요리도 조금 할 줄 알아요. 음... 그리고 뭐 더럽거나 힘든 일 있으면 맡겨주세요.”
  • 남자는 그 말에 눈썹을 치켜뜨면서 나지막하게 웃었다.
  • “내가 고용한 가정부가 너보다 못할까 봐?”
  • “가정부는 월급 받으며 일하지만 절 거두어 주시면 일전 한 푼 받지 않을게요. 그리고 전 뭐든 할 수 있어요.”
  • 나는 반드시 이곳에서 몸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리 길어도 두 달이면 이 일이 잠잠해질 거라 예측하며 그때 떠나서 다른 일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 “뭐든 할 수 있다고?”
  • 남자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내 말을 곱씹더니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걸어왔고 곧바로 이불을 홱 들추었다. 나는 너무 놀라 뒤쪽으로 슬금슬금 몸을 뺐지만 남자는 내 위로 덮쳐오더니 내 몸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 남자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내 코끝을 건드렸고 난 남자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 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의 입술은 내 입술을 덮쳤다.
  • 가슴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손을 뻗어 상대방을 밀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게 먹힐 리가 없었다. 상대방의 힘은 너무나도 셌고 내가 바둥거릴수록 남자는 더욱 거칠게 내 숨결을 빼앗았다.
  • 남자는 따뜻한 손으로 나를 어루만졌고 열이 아직도 내리지 않은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거친 입맞춤 때문에 나는 점점 숨쉬기조차 힘들어졌고 남자의 강한 공격에 더 이상 움직일 힘을 잃고 반항도 멈춘 채로 가만히 있었다.
  • 하지만 남자는 곧바로 동작을 멈췄다. 얇은 입술은 불빛 아래에서 촉촉하고도 붉은빛을 냈고 너무나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는 옷깃을 정리하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뭐든 할 수 있다며? 이것밖에 안돼?”
  • 말을 마친 그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티슈를 뽑더니 더러운 듯 입을 닦았다.
  • 순간 밀려오는 억울함에 내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뚝뚝 떨어졌으나 다행히 소리 내어 흐느끼지는 않았다.
  • 서진 도련님은 이마를 부여잡더니 티슈 몇 장을 뽑아 나한테 건네주고는 다시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여전히 우아하고 기품 있는 동작을 보니 방금 전의 일이 내 상상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 이때 남자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 “일단 여기서 지내. 그런데 공짜는 아니야. 당연히 일은 해야할 거고. 내가 호식보다 호락호락한 상대일 거라는 생각은 버려. 곧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 “정말요?”
  • 나는 곧바로 울음을 뚝 그치고 놀란 듯 상대방을 바라봤다. 남자가 뒤에 한 말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남아도 된다는 말만 골라서 들은 것이었다. 남자의 잘생긴 얼굴, 또렷한 눈매, 그리고 선명한 이목구비에 나는 저도 모르게 몇 번이고 남자의 얼굴을 다시 봤다.
  • “응.”
  • 남자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내가 뭔 생각을 하든 상관하기도 말 섞기도 귀찮다는 듯 와인잔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 앞에 다다를 때 뭔가 생각 나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려 말했다.
  • “올 때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못했으니까 내일 기사와 함께 백화점에 가서 필요한 것과 입을 옷 좀 사.”
  • “서진 도련님...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고마워요.”
  • “얼른 자. 몸도 다 나은 거 아니니까.”
  • 남자는 나 대신 방문을 닫아주고 떠나갔다.
  • 하지만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이 발걸음을 내디디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아마 아까 남자가 말한 것처럼 그가 호식보다 나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이보다 나은 퇴로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