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묵인했다. 그의 말은 전부 맞는 말이었지만 나는 어떻게 하면 강해질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사실 나도 언젠가는 호식을 숨어 다닐 필요 없이 강해져서 더 이상 이런 곳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며 살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서진 도련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요 며칠 내가 자리를 비울 거야. 그러니 무슨 일 있으면 리아한테 말해.”
그 말에 나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뱉었다.
“어디 가시는데요?”
하지만 말을 뱉은 순간 내가 물어볼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들은 거로 해줘요.”
“사적인 일을 처리해야 해. 이건 선물.”
그는 마술이라도 부리는 듯 어느 때 나타났는지도 모를 작은 박스 하나를 나한테 건넸다.
“이건...”
나는 놀란 듯 박스를 받아들고 포장을 뜯었다. 박스를 열어보니 익숙한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해외 유명 브랜드의 최신형 휴대폰. 휴대폰에는 이미 유심 카드가 꽂혀 있었고 필요한 앱들도 깔려 있었다.
이에 나는 휴대폰을 들며 물었다.
“저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도련님 번호를 모르는데요.”
그는 얼른 자기의 휴대폰을 꺼내더니 긴 손가락으로 숫자를 눌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손에 들려 있던 휴대폰이 울리면서 위에 그의 이름이 떴다.
박서진.
이제야 난 그의 성과 이름을 완전하게 알 수 있었다. 내 휴대폰에는 그의 번호가 맨 처음의 연락처로 저장되었다.
저녁에 서진 도련님은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 방에서 나를 안고 잠들었다. 나는 어색해서 버둥거렸지만 그는 이불을 끄집어 나한테 덮어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걱정 마. 난 너처럼 어린애 같은 몸매에는 관심 없으니까. 수면 장애가 있어서 안고 잘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야.”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오히려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한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어딘가 이상했다.
하지만 이렇게 대단한 남자가 나를 안고 잔다면 나로서 별로 아쉬울 것도 없었기에 나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그의 품에 안겨 날이 밝을 때까지 잤다.
서진 도련님은 역시나 며칠 동안 자리를 비웠고 진 기사마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 기사는 다른 기사더러 내 출퇴근 시간에 맞춰 태워주라고 미리 말해놓은 듯했다.
사실 이럴수록 나는 더욱 어색했다. MIX의 사람들은 매번 나를 심사하는 듯한 이상한 눈빛으로 봤고 마치 내가 서진 도련님이 기르는 애완동물이라도 되는 듯 바라봤다.
오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난 뒤 옷을 갈아입고는 밖에 나가 돌아보려고 하다가 복도에서 마침 익숙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고 말았다. 이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다급히 뒤로 물러나다가 오히려 뒤에서 오는 사람과 부딪치는 바람에 그 사람이 들고 있던 물건이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대체 눈을 어디에 달고 다니는 거야?”
부딪힌 사람을 제대로 보니 2층에서 일하는 리사였다. 그녀는 바로 예쁜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꼬나봤고 당장이라도 화를 낼듯했지만 꾹 참고는 쪼그리고 앉아 접시를 주웠다.
“리사,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도와줄게.”
나는 얼른 리사를 도와 물건을 주웠고 그녀가 떠나간 뒤 곧바로 복도를 떠났다.
하지만 요란한 소리에 앞의 몇몇도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봤고 나의 불안한 눈빛과 마주하고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다름 아닌 호식과 그의 부하들이었다.
“하. 이 도시를 뜬 줄 알았더니 여기 숨어 있었네.”
호식은 많이 야윈 것 같았지만 여전히 우락부락한 모습이었고 눈빛은 당장이라도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이에 나는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호식 오빠, 이런 인연이 다 있네요.”
“여기서 일해?”
호식은 의아한 듯 나를 보더니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듯한 말투로 물었다.
나는 곧바로 머리를 굴리다가 웃으며 말했다.
“네. 저 이젠 MIX 직원이에요.”
이곳은 적어도 서진 도련님의 구역이었기에 호식이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도 조금은 있었다.
그러자 호식은 찡그리고 있던 얼굴을 펴면서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MIX처럼 고급스러운 곳까지 들어오고, 역시 제법이네.”
“별말씀을요. 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거잖아요. 밥을 굶지 않으려면 일은 찾아야 하니까요.”
나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그를 떠보면서 주위의 환경을 살폈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려 할 때 바로 소리 지르면 경호원이 달려올 거니까.
하지만 그는 손을 휘젓더니 더 이상 나와는 말을 섞지 않고 부하를 데리고 떠나버렸다. 떠나기 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힐끗 보는 게 다였다.
MIX의 간판은 정말로 좋은 방패막이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한 그는 나를 절대 어떻게 할 수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