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양성, 불길처럼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시내 한복판,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몸집이 가냘픈 청년 하나가 묵묵히 이 익숙하고도 낯선 도시를 주시하고 있었다.
“15년 만에 드디어 돌아왔네. 나의 일곱 누이들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청년이 조용하게 읊조렸다.
그의 이름은 육은성으로 부모 하나 없는 고아였다. 어려서부터 보육원에서 자란 육은성에게는 그를 가족처럼 아껴주던, 혈연관계가 없는 일곱 누나들이 있었다.
그녀들이 제일 좋아하던 게임이 바로 육은성과 소꿉놀이를 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마다 일곱 누나들은 육은성에게 꼭 함께 시집가겠노라 약속했었다.
그때의 육은성은 고작 5살이었는데도 벌써 세상일에 다 눈 뜬 것처럼 애티가 나는 목소리로 우린 3, 4살의 어린애가 아니라면서, 말하면 말한대로 꼭 해야 한다고 누나들한테 으름장을 놓았었다.
일곱 누나들은 그런 육은성의 새끼손가락에 본인들의 새끼손가락을 건 채 엄지를 서로 맞대고 도장을 찍으며 약속하겠노라 다짐했다.
그렇게 매일밤 어서 어른이 되었으면 하고 소망하는 육은성의 생활은, 보육원에 일어난 커다란 화재로 인해 무참히 박살나버렸다.
맹렬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와중에 일곱 누나들은 스스로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육은성을 찾으러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탓에 결국 여덟 사람 모두 다 화염 속에 갇히고 말았다.
잔뜩 겁먹은 육은성은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본인도 당황했을 텐데 큰 누나는 작은 육은성을 품에 안으며 무서워하지 말라고 다독여 주었다.
불길이 보육원 전체를 집어삼킬 것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갔다.
서로 꽉 끌어안은 여덟 명의 아이들은 곧 짙은 연기를 들이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의식을 차츰 잃어갔다.
어린 육은성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펼쳐진 건 여전히 불바다였다. 그러나 좀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앞에 언제인지 모르게 늙은 도사 하나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길 속에서도 늙은 도사의 옷은 탄 자국 하나 없이 멀쩡하기만 했다.
어린 육은성은 제가 환각을 보고 있는 줄로만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때 늙은 도사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네 누이들을 구해줄 수 있단다. 물론 네가 날 사부님으로 모신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지.”
늙은 도사의 말은 육은성에게 그야말로 구명줄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고민할 시간도 없이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했다. 그 결정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리라는 의식도 전혀 하지 못한 채 말이다.
보육원을 떠난 후 늙은 도사는 육은성을 한 사원으로 데려와 그에게 의술, 무공, 영법 등을 배워줬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무명신공까지 하나 수련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10년이나 훌쩍 지나갔다.
15살이 된 육은성은 이제 양성으로 드디어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 건만, 그의 소망과는 달리 늙은 도사는 이번에 그를 변방의 전쟁터로 보내버렸다.
그곳에서 육은성은 또 5년이라는 세월을 있었다.
5년간 전쟁터를 전전하며 살육이 난무했고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때를 기점으로 ‘천합’이라 불리는 거대한 조직 하나가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천합에 속한 36개의 별은 하나같이 모두 난다긴다하는 신장들이었고, 그들이 사방을 굳건히 지키고 있기 시작하면서부터 용국은 그 아무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조직을 이끄는 그들의 왕, 운천신군은 자신의 어릴적 추억이 살아있는 양성으로 조용히 발을 들였다.
지나간 시간을 다시 되돌아 보자니 정말 꿈만 같았다.
정말이었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 아니었다면 이런 경력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든 지간에 육은성은 모두 터무니 없는 얘기라고 여겼을 것이다.
햇살보육원은 아직 같은 자리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육은성의 심정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15년 전의 그 화재사고로 보육원은 사회 각 계층들의 광범위한 관심을 끌었다.
보육원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손길을 보내왔고, 보육원은 원래의 기와장 몇 장 얹은 허름한 주택에서 순식간에 작은 빌딩으로 탈바꿈했다.
비록 여러 방면에서 조건이나 시설 모두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좋아졌지만, 필경 이제는 육은성이 알던 익숙한 그곳이 아니게 돼버렸다.
그건 그렇고, 그래도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마주한 순간 육은성은 마음 속의 낯선 감정이 눈 녹듯 일초 만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과 일곱 누이들의 어릴 적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역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거였어. 보육원은 여전히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육은성은 보육원 직원을 찾아 제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돋보기를 쓴 중년 여성이 그의 앞에 나타나 의혹이 담긴 눈길을 보내왔다.
“제가 햇살보육원의 원장입니다만, 누구를 찾으시는 거죠?”
“그쪽이 원장이라고요?”
육은성은 순간 멍을 때렸다.
그의 기억 속 햇살보육원 원장은 오 씨 성을 가진 자애로운 할아버지였지, 절대 지금 그의 눈앞에 선 중년 여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년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이곳 원장직을 맡은지 벌써 십여 년이 흘렀어요. 보아하니 저를 찾으러 온 게 아니신 모양이죠?”
“저 오씨 성을 가지신 할아버지를 찾으러 왔습니다.”
“아, 원래 여기 원장님이셨던 그분을 찾으시는구나. 그분 은퇴하신지 벌써 오랜데요.”
전의 원장님을 찾으러 왔다는 육은성의 말에 중년 여인은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친절한 태도로 바꿨다.
그러나 육은성의 표정은 오히려 찌푸려졌다.
할아버지 원장님이 이미 은퇴하셨다니, 그것도 중년 여인의 말을 들어보면 은퇴하신지 벌써 십여 년이나 흐른 모양이었다.
혹시 그 화재사건 때문에 그런 건가?
육은성은 다급한 어조로 캐물었다.
“그럼 혹시 할아버지 원장님 주소를 알 수 있을까요?”
“그럼요.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종이에 적어 드릴게요.”
뒤돌아서 사무실로 들어선 중년 여인은 곧 주소가 적힌 메모장 하나를 들고 나와 육은성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중년 여인이 준 쪽지에 적힌 주소를 따라 육은성은 한 낡은 주택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주택 앞에 백발이 무성한 늙은 할아버지 한 명이 구부정한 허리로 마당을 쓸고 있는 게 보였다.
육은성은 한눈에 그가 햇살보육원의 원래 원장임을 알아봤다.
15년을 못 본 새에 저렇게나 많이 늙으셨단 말인가?
마음이 시큰해진 육은성이 발걸음을 서두르려던 찰나, 이어서 발생한 장면 하나가 그의 마음에 불길을 지피기 시작하며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빗자루를 쓸고 있는 할아버지 원장님 곁으로 갑자기 꽃무늬 남방을 입은 청년 하나가 나타나더니 그를 힘껏 밀며 욕지거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이, 영감탱이. 돈 어딨어? 빨리 돈 내놔. 그 여자들이 당신한테 매달 돈 부치는 거 아니까 숨길 생각 말고, 어?”
훤한 대낮에 대놓고 강도짓이라니!
육은성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쏜살같이 튀어가 꽃무늬 남방을 입은 청년의 옷깃을 꽉 그러쥐었다.
“어디 뺏을 사람이 없어서 노인의 돈까지 뺏어!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짐승만도 못한 자식!”
“켁켁…”
꽃무늬 남방을 입은 청년은 갑자기 누군가가 튀어나올 줄 몰랐다는 듯 당황스런 얼굴을 했다가 곧바로 침착한 척 애쓰려 했다.
“이… 이거 놔, 새꺄! 우리 집안일에 네까짓 게 뭔데 끼어들어?”
“집안일?”
이번에는 육은성이 당황할 차례였다. 의혹이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 돌려 할아버지 원장님을 돌아보자 침울한 표정을 한 오 원장이 탄식하며 말했다.
“맞습니다. 저놈이 날강도나 그런 건 아니고, 염강이라고 제가 입양한 아이지요.”
염강이라고?
그래, 그 염강이었던 거구나!
육은성은 꽃남방을 입은 청년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다가 겨우 그를 알아봤다. 어쩐지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다 했더니.
남자는 어릴적 육은성을 자주 괴롭혀서 일곱 누나들한테 머리에 혹이 날 정도로 맞은 적이 있었던 염강이었다.
그런데 염강을 왜 할아버지 원장님이 입양하게 된 거지?
육은성이 생각하느라 넋이 나간 틈을 타 염강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 격렬하게 기침해댔다. 한참 뒤에야 제 호흡을 되찾은 그가 악에 받쳐 소리질렀다.
“씨발 새끼, 그러게 무슨 되도 않는 오지랖을 부려! 이제 우리 집안일인 걸 알게 됐으니 빨리 꺼지기나 해!”
무시무시한 눈길로 육은성을 노려봐준 뒤 염강은 이번에 오문덕을 향해 고함을 쳤다.
“늙은 영감탱이, 나를 입양했으면 잘 먹이고, 잘 입히고 했어야지. 제대로 키우지도 못할 거면서 대체 나를 입양은 왜 한 거야!”
“그 여자들이 보낸 돈은 어쨌어? 빨리 내놔! 그렇게 꿍쳐두고 있다가 왜 관까지 들고가서 쓰게? 이제 살 날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내가 잘 돼야 할아범이 죽어도 내가 장례를 치러줄 거 아냐. 그 돈을 나한테 안 주면 뒀다가 누구 쓰라고 줄 건데? 뇌는 어디에 빼다 두고 다니는지 원!”
시간이 흐를수록 염강의 입에서 도를 넘는 언사가 내뱉어졌다.
오문덕의 쇠약한 체구가 격렬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머리만 수그릴 뿐 염강의 욕설을 그대로 받아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