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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융단폭격

  • 유지빈의 출현과 동시에 여선우는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음을 인지했다.
  • “유지빈 씨, 당신은 이제 저희 선우 그룹 직원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장 이 회의실을 나가 주세요.”
  • “하하, 여 대표님. 저를 쫓아내지 못해 안달난 걸 보니 제가 대표님의 더러운 사생활을 까발릴까 봐 두려운 모양이죠?”
  • “두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저는 언제나 한치 부끄럼 없이 행동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다만 유지빈 씨가 하려는 얘기가 오늘 런칭회 내용과는 전혀 상관 없는 얘기이니 당장 나가달라는 뜻이었습니다.”
  • “제 말을 다 듣고 난 후에 상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시면 되겠네요.”
  • 유지빈이 빈정대며 웃었다.
  • “혹시 회사에서 잘리게 된 경과를 자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 한 기자가 벌떡 손을 들며 물었다.
  • 그러자 카메라가 이번에는 일제히 유지빈을 화면에 담았다. 누구 하나 선우 그룹의 신제품에 대해 관심 주는 사람이 없었다.
  • “당연하죠. 제가 오늘 이곳에 온 것도 다 여선우 대표님의 거짓된 가면을 벗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녀의 속마음이 얼마나 더러운지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이죠.”
  • 유지빈은 목을 가다듬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 “저는 유지빈이라고 하고요, 원래는 선우 그룹 인사팀 부장으로 십여 년을 회사를 위해 뼈빠지게 일 해 왔습니다. 선우 그룹이 오늘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이 유지빈의 공헌이 빠져서는 안 된다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죠.”
  • “그렇기 때문에 선우 그룹이 상장을 앞두고 있다 그랬을 때 저는 진심으로 기뻤습니다. 저의 다년간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구나라고 말이죠. 그런데 글쎄 여 대표님께서 배은망덕하게도 어느날 갑자기 저 기생오라비 같은 사람을 데리고 와서는, 그 사람을 고위직에 앉히겠다고 이 한몸 바쳐 회사를 위해 애쓴 저를 갑자기 자른 겁니다.”
  • “이게 공평한 처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 유지빈이 큰 목청으로 호소했다.
  • 자리에 앉은 기자들은 이제 좀전과 완전히 뒤바뀐 눈빛으로 여선우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 역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저렇게 아름다운 얼굴 아래에 저렇게 악독한 마음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그런 성품을 가지고 회사를 다스리면서도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고? 어림도 없는 일이지.
  • 여선우가 가라앉은 얼굴로 유지빈의 말에 반박했다.
  • “없는 얘기 지어내지 마세요. 유지빈 씨야말로 예인 그룹과 먼저 손을 잡고 저 해하려 했잖아요. 유지빈 씨의 형사책임을 묻지 않은 것도 충분히 봐줬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모르고 이렇게 역으로 저를 비난한다고요?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 “제가 예인 그룹이랑 손을 잡았다고요? 증거가 있고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 “그날 사무실에서 유지빈 씨가 직접 본인 입으로 예인 그룹과 부당한 거래가 있었다고 인정 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증거요?”
  • “웃기는 소리.”
  • 유지빈은 기자들을 둘러보며 입을 뗐다.
  • “여러분, 여 대표님이 한 말이 도리에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체 누가 회사를 배신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제가 그 정도로 바보겠어요?”
  • 그의 말에 공감하며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다.
  • 유지빈의 말대로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제가 다른 회사와 부당한 거래를 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여선우의 주장은 도리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 “사실 저보다는 제일 억울한 게 제 아우와도 같은 하선철 씨죠.”
  • 유지빈이 휠체어에 앉은 하선철을 가리키며 격분해 했다.
  • “이분은 원래 여 대표님의 운전기사로 제일 먼저 여 대표님께서 술집 남자를 스폰하고 있다는 걸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그러면 안 된다고 좋게좋게 두 사람한테 충고를 몇 마디 했더니 지금 이 꼴로 때려놓은 겁니다.”
  • 샤샤샥! 모든 카메라가 순식간에 하선철에게로 돌아갔다.
  • 하선철은 타이밍 좋게 병원에서 뗀 진단서를 꺼내더니 이를 악물며 말했다.
  • “이게 병원에서 떼 준 진단서입니다. 오른쪽 팔목 분쇄골절에 양쪽 다리 무릎 관절 인대까지 파열되었죠.”
  • 그의 말은 깊은 호수면에 폭탄을 던진 것처럼 실내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 “진짜 너무 하네요! 이거 완전 법은 안중에도 없는 안하무인의 태도 아닙니까!”
  • “그렇게 악독한 마음을 품고 무대에 올라 신제품 런칭회를 뻔뻔하게 이어갔다니, 여 대표는 지금 당장 무대에서 내려가라!”
  • “하선철 씨와 유지빈 씨한테 사과해라! 사과해라!”
  • 여론이 순식간에 한쪽으로 치우쳤다. 모든 기자들이 분에 겨운 얼굴로 여선우를 나무라자 여선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 “유지빈 씨야 말로 제가 술집 남자를 스폰하고 하선철 씨를 때렸다는 증거가 있나요?”
  • 그녀로서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 유지빈에게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는 일이었다.
  • 유지빈이 콧방귀를 뀌며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던 그때, 기자석 제일 앞에 앉아있던 중년 남성 하나가 일어서며 입을 뗐다.
  • “제가 한 마디 하죠.”
  • 그의 이름은 장호영으로, 현 선우 그룹 인사팀 부장이었다. 동시에 유지빈이 인사팀 부장으로 있었을 때 그의 바로 밑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 “유지빈 씨가 한 말 모두 다 사실임을 제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 모두들 그가 여선우를 위해 변호하고 나설 거라 생각하던 그때, 장호영의 입에서 정반대의 말이 튀어나왔다.
  • 현장이 또 한 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 “장호영 씨, 그게 무슨 말입니까?”
  • “여 대표님께서 제 말 뜻을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저희 회사 전체 직원들이 다 알 텐데요. 저의 지금 직책인 인사팀 부장 자리를, 여 대표님께서 원래 저 기생오라비한테 넘겨주기로 했다는 것을요. 그러다가 주위의 압박에 못 이겨 저를 임명하신 거잖아요.”
  • 장호영은 제 목에 걸린 사원증을 거칠게 벗어 던지며 기개 넘치게 말했다.
  • “전 이런 남이 안 먹어서 버린 음식 따위 싫습니다!”
  • 비틀!
  • 여선우의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우뚱했다. 그러나 그녀가 정신을 미처 차리기도 전에 회의실 문이 또 한 번 밖에서 열렸다.
  • 이번에 들어온 건 서 씨 가문의 도련님 서준과 염강이었다.
  • “장호영 씨 말이 맞습니다. 여 대표님 같은 사람 밑에서 일 할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선우 그룹에서 나와 저희 회사로 입사하시죠. 저희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 서준의 등장이 현장 분위기를 또 다른 고조로 이끌었다.
  • 서 씨 가문의 회사가 선우 그룹의 최대 거래처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
  • 그리고 그 가문의 후계자인 서준이 여선우을 열광적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 아무래도 여선우가 술집 남자를 곁에 두고 스폰하고 있다는 소리에 성이 난 서준이 따지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닐까하고, 기자들은 추측했다.
  • 역시나 서준은 한 기자가 건네준 마이크를 손에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 “오늘부로 서 씨 가문은 선우 그룹과의 협력을 일절 중단할 것임을 선포합니다.”
  • 말을 마친 그는 염강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 “그쪽도 할 말 있지 않아요? 지금 얘기 하시면 됩니다.”
  • 마이크를 손에 든 염강이 원한에 절은 눈빛을 했다.
  • ‘서준 도련님께서 내 빚을 대신 갚아 주겠다고 했어. 누나가 먼저 나한테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하든 내 탓하지 마.”
  • “저는 염강이라고 하고요. 여기 계시는 여 대표님이랑 같이 햇살보육원 출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선우 씨가 어떤 사람인지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여선우 씨는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기 일쑤였고, 그중에는 저도 포함되어 있었죠.”
  • 염강이 제가 어릴 적 저질렀던 일들을 모두 여선우에게 뒤집어 씌우며 진실을 왜곡하려 들었다.
  • “어렸을 때 일들은 다 지나간 일이니까 여기에서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딱 한 가지만 우선 말씀 드리자면 저희를 보살펴 주셨던 햇살보육원 전 원장님께서 최근에 많이 아프셔서 거액의 치료비가 필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여 대표님을 여러 번이나 찾아 갔었고 심지어 무릎까지 꿇으며 제발 돈을 빌려달라고 애원 했었습니다. 그런데 여 대표님은 돈은 커녕, 오히려 저를 욕하며 꺼지라고 내쫓았어요.”
  • 염강의 고발이 있고 나서 현장은 긴 침묵에 휩싸였다. 회의실 전체가 억압된 분위기에 짓눌렸다. 폭발이 일어나기 전의 징조였다.
  • “여선우, 이 사회쓰레기 같은 년아!”
  • 기나긴 억압의 침묵 끝에 드디어 사람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 “여선우, 넌 살아있을 자격조차 없어. 빨리 가서 콱 뒤져!”
  • “같은 여자로서 내가 다 수치스러워! 이 철면피야!”
  • “여선우, 하루 빨리 지옥으로 떨어지길 내가 매일 밤마다 저주할 거야!”
  • 맹렬한 비난이 폭격처럼 쏘아졌다. 여선우는 비틀거리는 몸을 애써 가누며 하염없이 눈물을 떨궜다.
  • “아니에요. 아니야… 저 그런 적 없어요…”
  • 있는 힘껏 내젓는 고개 위로 억울함의 눈물이 흘러내려 옷깃을 가득 적셨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 사람들은 이미 그녀를 배은망덕한 인간에, 수치도 모르고 악독한 독사 같은 여자라고 쾅쾅 낙인을 찍어놓은 뒤였다.
  • 기자들은 그녀를 침에 익사시킬 작정으로 융단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 “여선우, 너 그렇게 속내를 깊게 감추고 있을 줄 몰랐다. 너랑 친구한지 몇 년인데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 했다니.”
  • 고안별이 성큼성큼 걸어와 여선우의 면전에 대고 사원증을 떼어내 바닥에 던지며 이를 갈았다.
  • “너 같은 사람이랑 같이 일 했다는 게 수치스러워!”
  • “안별아, 너마저 어떻게…”
  • 제 아무리 여선우의 멘탈이 강하다 해도 연이은 타격에 정신을 똑바로 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 곧 까매지는 시야와 함께 여선우의 몸이 힘 없이 늘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몸이 완전히 바닥으로 추락하기 전 무대 아래에서 튀어 올라온 인영 하나가 여선우의 가녀린 몸을 안정적으로 안아 들었다.
  • “당신들 오늘 폭언을 날린 책임을 모두 물어내야 할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