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빈 씨, 당신은 이제 저희 선우 그룹 직원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장 이 회의실을 나가 주세요.”
“하하, 여 대표님. 저를 쫓아내지 못해 안달난 걸 보니 제가 대표님의 더러운 사생활을 까발릴까 봐 두려운 모양이죠?”
“두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저는 언제나 한치 부끄럼 없이 행동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다만 유지빈 씨가 하려는 얘기가 오늘 런칭회 내용과는 전혀 상관 없는 얘기이니 당장 나가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제 말을 다 듣고 난 후에 상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시면 되겠네요.”
유지빈이 빈정대며 웃었다.
“혹시 회사에서 잘리게 된 경과를 자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한 기자가 벌떡 손을 들며 물었다.
그러자 카메라가 이번에는 일제히 유지빈을 화면에 담았다. 누구 하나 선우 그룹의 신제품에 대해 관심 주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하죠. 제가 오늘 이곳에 온 것도 다 여선우 대표님의 거짓된 가면을 벗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녀의 속마음이 얼마나 더러운지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이죠.”
유지빈은 목을 가다듬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유지빈이라고 하고요, 원래는 선우 그룹 인사팀 부장으로 십여 년을 회사를 위해 뼈빠지게 일 해 왔습니다. 선우 그룹이 오늘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이 유지빈의 공헌이 빠져서는 안 된다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선우 그룹이 상장을 앞두고 있다 그랬을 때 저는 진심으로 기뻤습니다. 저의 다년간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구나라고 말이죠. 그런데 글쎄 여 대표님께서 배은망덕하게도 어느날 갑자기 저 기생오라비 같은 사람을 데리고 와서는, 그 사람을 고위직에 앉히겠다고 이 한몸 바쳐 회사를 위해 애쓴 저를 갑자기 자른 겁니다.”
“이게 공평한 처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유지빈이 큰 목청으로 호소했다.
자리에 앉은 기자들은 이제 좀전과 완전히 뒤바뀐 눈빛으로 여선우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역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저렇게 아름다운 얼굴 아래에 저렇게 악독한 마음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그런 성품을 가지고 회사를 다스리면서도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고? 어림도 없는 일이지.
여선우가 가라앉은 얼굴로 유지빈의 말에 반박했다.
“없는 얘기 지어내지 마세요. 유지빈 씨야말로 예인 그룹과 먼저 손을 잡고 저 해하려 했잖아요. 유지빈 씨의 형사책임을 묻지 않은 것도 충분히 봐줬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모르고 이렇게 역으로 저를 비난한다고요?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제가 예인 그룹이랑 손을 잡았다고요? 증거가 있고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그날 사무실에서 유지빈 씨가 직접 본인 입으로 예인 그룹과 부당한 거래가 있었다고 인정 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증거요?”
“웃기는 소리.”
유지빈은 기자들을 둘러보며 입을 뗐다.
“여러분, 여 대표님이 한 말이 도리에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체 누가 회사를 배신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제가 그 정도로 바보겠어요?”
그의 말에 공감하며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다.
유지빈의 말대로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제가 다른 회사와 부당한 거래를 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여선우의 주장은 도리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사실 저보다는 제일 억울한 게 제 아우와도 같은 하선철 씨죠.”
유지빈이 휠체어에 앉은 하선철을 가리키며 격분해 했다.
“이분은 원래 여 대표님의 운전기사로 제일 먼저 여 대표님께서 술집 남자를 스폰하고 있다는 걸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그러면 안 된다고 좋게좋게 두 사람한테 충고를 몇 마디 했더니 지금 이 꼴로 때려놓은 겁니다.”
샤샤샥! 모든 카메라가 순식간에 하선철에게로 돌아갔다.
하선철은 타이밍 좋게 병원에서 뗀 진단서를 꺼내더니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게 병원에서 떼 준 진단서입니다. 오른쪽 팔목 분쇄골절에 양쪽 다리 무릎 관절 인대까지 파열되었죠.”
그의 말은 깊은 호수면에 폭탄을 던진 것처럼 실내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진짜 너무 하네요! 이거 완전 법은 안중에도 없는 안하무인의 태도 아닙니까!”
“그렇게 악독한 마음을 품고 무대에 올라 신제품 런칭회를 뻔뻔하게 이어갔다니, 여 대표는 지금 당장 무대에서 내려가라!”
“하선철 씨와 유지빈 씨한테 사과해라! 사과해라!”
여론이 순식간에 한쪽으로 치우쳤다. 모든 기자들이 분에 겨운 얼굴로 여선우를 나무라자 여선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유지빈 씨야 말로 제가 술집 남자를 스폰하고 하선철 씨를 때렸다는 증거가 있나요?”
그녀로서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 유지빈에게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는 일이었다.
유지빈이 콧방귀를 뀌며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던 그때, 기자석 제일 앞에 앉아있던 중년 남성 하나가 일어서며 입을 뗐다.
“제가 한 마디 하죠.”
그의 이름은 장호영으로, 현 선우 그룹 인사팀 부장이었다. 동시에 유지빈이 인사팀 부장으로 있었을 때 그의 바로 밑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유지빈 씨가 한 말 모두 다 사실임을 제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그가 여선우를 위해 변호하고 나설 거라 생각하던 그때, 장호영의 입에서 정반대의 말이 튀어나왔다.
현장이 또 한 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장호영 씨,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여 대표님께서 제 말 뜻을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저희 회사 전체 직원들이 다 알 텐데요. 저의 지금 직책인 인사팀 부장 자리를, 여 대표님께서 원래 저 기생오라비한테 넘겨주기로 했다는 것을요. 그러다가 주위의 압박에 못 이겨 저를 임명하신 거잖아요.”
장호영은 제 목에 걸린 사원증을 거칠게 벗어 던지며 기개 넘치게 말했다.
“전 이런 남이 안 먹어서 버린 음식 따위 싫습니다!”
비틀!
여선우의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우뚱했다. 그러나 그녀가 정신을 미처 차리기도 전에 회의실 문이 또 한 번 밖에서 열렸다.
이번에 들어온 건 서 씨 가문의 도련님 서준과 염강이었다.
“장호영 씨 말이 맞습니다. 여 대표님 같은 사람 밑에서 일 할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선우 그룹에서 나와 저희 회사로 입사하시죠. 저희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서준의 등장이 현장 분위기를 또 다른 고조로 이끌었다.
서 씨 가문의 회사가 선우 그룹의 최대 거래처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문의 후계자인 서준이 여선우을 열광적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아무래도 여선우가 술집 남자를 곁에 두고 스폰하고 있다는 소리에 성이 난 서준이 따지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닐까하고, 기자들은 추측했다.
역시나 서준은 한 기자가 건네준 마이크를 손에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로 서 씨 가문은 선우 그룹과의 협력을 일절 중단할 것임을 선포합니다.”
말을 마친 그는 염강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그쪽도 할 말 있지 않아요? 지금 얘기 하시면 됩니다.”
마이크를 손에 든 염강이 원한에 절은 눈빛을 했다.
‘서준 도련님께서 내 빚을 대신 갚아 주겠다고 했어. 누나가 먼저 나한테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하든 내 탓하지 마.”
“저는 염강이라고 하고요. 여기 계시는 여 대표님이랑 같이 햇살보육원 출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선우 씨가 어떤 사람인지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여선우 씨는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기 일쑤였고, 그중에는 저도 포함되어 있었죠.”
염강이 제가 어릴 적 저질렀던 일들을 모두 여선우에게 뒤집어 씌우며 진실을 왜곡하려 들었다.
“어렸을 때 일들은 다 지나간 일이니까 여기에서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딱 한 가지만 우선 말씀 드리자면 저희를 보살펴 주셨던 햇살보육원 전 원장님께서 최근에 많이 아프셔서 거액의 치료비가 필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여 대표님을 여러 번이나 찾아 갔었고 심지어 무릎까지 꿇으며 제발 돈을 빌려달라고 애원 했었습니다. 그런데 여 대표님은 돈은 커녕, 오히려 저를 욕하며 꺼지라고 내쫓았어요.”
염강의 고발이 있고 나서 현장은 긴 침묵에 휩싸였다. 회의실 전체가 억압된 분위기에 짓눌렸다. 폭발이 일어나기 전의 징조였다.
“여선우, 이 사회쓰레기 같은 년아!”
기나긴 억압의 침묵 끝에 드디어 사람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여선우, 넌 살아있을 자격조차 없어. 빨리 가서 콱 뒤져!”
“같은 여자로서 내가 다 수치스러워! 이 철면피야!”
“여선우, 하루 빨리 지옥으로 떨어지길 내가 매일 밤마다 저주할 거야!”
맹렬한 비난이 폭격처럼 쏘아졌다. 여선우는 비틀거리는 몸을 애써 가누며 하염없이 눈물을 떨궜다.
“아니에요. 아니야… 저 그런 적 없어요…”
있는 힘껏 내젓는 고개 위로 억울함의 눈물이 흘러내려 옷깃을 가득 적셨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미 그녀를 배은망덕한 인간에, 수치도 모르고 악독한 독사 같은 여자라고 쾅쾅 낙인을 찍어놓은 뒤였다.
기자들은 그녀를 침에 익사시킬 작정으로 융단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여선우, 너 그렇게 속내를 깊게 감추고 있을 줄 몰랐다. 너랑 친구한지 몇 년인데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 했다니.”
고안별이 성큼성큼 걸어와 여선우의 면전에 대고 사원증을 떼어내 바닥에 던지며 이를 갈았다.
“너 같은 사람이랑 같이 일 했다는 게 수치스러워!”
“안별아, 너마저 어떻게…”
제 아무리 여선우의 멘탈이 강하다 해도 연이은 타격에 정신을 똑바로 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곧 까매지는 시야와 함께 여선우의 몸이 힘 없이 늘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몸이 완전히 바닥으로 추락하기 전 무대 아래에서 튀어 올라온 인영 하나가 여선우의 가녀린 몸을 안정적으로 안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