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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누나, 나 돌아왔어!

  • 육은성 마음 속 분노의 불길이 지옥에서 기어나온 악마의 마수처럼 그의 신경을 미친듯이 찢어발겼다.
  • 깜짝 놀란 오문덕은 얼른 육은성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랬다.
  • “얘야, 잠깐만 내 말 들어, 은성아. 내가 너한테 이런 얘기를 들려준 건 너한테 아무것도 속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무모한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두려고 그런 게 아니야!”
  • 그가 진실을 물어왔을 때 처음에 입을 떼려고 하지 않았던 게 바로 이런 상황이 펼쳐질까 봐 걱정해서 그런 것이었다.
  • 원딜 컴퍼니의 배후 세력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육은성이 알 리가 만무했다.
  • 그렇기 때문에 원딜 컴퍼니에 시비를 건다는 건 결코 그에게 아무런 이점이 없을 거라는 게 오문덕의 고려였다.
  • 주름이 가득한 손바닥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감각이 육은성을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
  • “죄송해요, 원장님. 저 때문에 놀랐죠.”
  • “은성아, 원장님 말 들어. 지나간 일을 다시 들추고 그러지 마. 알겠지?”
  • 오문덕이 애원했다.
  • 육은성은 마음의 분노를 억지로 내리누르며 답했다.
  • “걱정 마세요, 원장님. 저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 “그래, 착하지.”
  • 그제야 한시름을 놓은 오문덕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 “참, 그러고 보니 네 누이들이 은성이 네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면 무척이나 기뻐하겠구나.”
  • 육은성의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 “누나들은 다 잘 있어요?”
  • “그럼. 다들 자기 사업도 잘 해나가고 있고 매달 나한테 돈도 부쳐주는 걸… 맞다. 나한테 네 누이들 사진도 있는데.”
  • 사진?
  • 육은성의 눈빛이 순간 초롱초롱해졌다.
  • 누나들을 못 본지도 어언 15년.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 동안 누나들이 어떻게 자라났을지 저도 모르게 궁금해졌다.
  • 다들 어여쁜 아가씨들로 컸을려나? 물론 그녀들이 어떻게 변해있든 육은성에게 있어 일곱 누나들은 그가 평생을 제일 사랑하는 여인들임에 변함이 없었다.
  • 집으로 들어간 오문덕은 서랍 깊숙한 곳에서 조심스레 사진 몇 장을 꺼내 육은성에게 보여줬다.
  • 서둘러 사진을 펼쳐보던 육은성은 고작 한 번 눈길을 준 것만으로도 하마터면 눈알이 빠져나와 바닥을 구를 뻔했다.
  • “정… 정말 이 사람들이 제 누나들이라고요?”
  • 육은성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누나들이 너무 못 생겨서가 아니라 하나같이 선녀처럼 예뻤기 때문이다.
  • 오문덕이 웃으며 답했다.
  • “그래. 네 누이들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다들 능력도 출중하단다.”
  • 육은성은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두 사람이 드문드문 얘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겨우 정신을 차린 염강이 죽상이 된 얼굴로 오문덕의 발밑까지 기어와 애원했다.
  • “할아범, 나 이번만 4천 좀 줘. 나 정말로 이 돈이 너무 필요해서 그래.”
  • 염강이 정에 호소하며 오문덕을 뒤흔들려 시도했다.
  • 육은성과 한창 재밌게 얘기를 나누고 있던 오문덕은 즐거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망쳐진 것에 대해 대노했다.
  • “이놈의 불효자식아. 아직도 뻔뻔하게 돈 얘기가 나와?”
  • “아니, 그게 아니라… 나…”
  • “그게 아니라 뭐? 빨리 불어. 너 또 밖에서 무슨 사고 쳤지?”
  • 더 이상 속이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염강은 할 수없이 철면피를 깔고 말했다.
  • “그게, 실은 내가 도박장에서 빚 좀 졌는데… 일주일 안으로 돈 못 갚으면 내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고 그래서…”
  • “뭐라고? 그곳이 어디라고 감히 도박장을 가! 이 썩을노무자식!”
  • 염강이 도박장에서 빚을 졌단 말에 오문덕은 노발대발하며 옆에 있던 빗자루를 들어 그의 몸을 아무렇게나 내려치기 시작했다. 염강은 피하지 않으며 애원했다.
  • “나도 알아, 내가 잘못한 거. 그때는 나도 귀신에 홀렸었나 봐. 그런데 이미 이렇게 된 거 어떡하겠어. 나도 다른 방법은 전혀 생각 안 나니까 이렇게 할아범한테 돈 달라고 하는 거잖아.”
  • “이 자식이, 너 날 화나서 죽게 만들려고 작정했지?”
  • 오문덕은 미쳐 죽을 것 같았다.
  • 바로 이때, 서늘한 목소리가 두 사람과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다.
  • “염강, 내가 할아버지한테 더는 애를 먹이지 말라고 여러 번 경고했지? 어떻게 된 게 그렇게 말을 안 들어먹어?”
  • 마당 밖에서 늘씬한 몸매의 여인 하나가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 정교한 오관과 도도한 듯한 아우라, 윤기나는 검은색의 긴 머리를 높게 얹은 여인은 온몸으로 점잖으면서도 고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 아래위로 입은 하얀색 오피스 정장은 그녀의 굴곡진 몸매를 전혀 감추지 못하였다. 그야말로 여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대단한 미녀였다.
  • 육은성은 여인을 첫눈에 본 순간 그녀에게 깊이 이끌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 그녀가 바로 육은성이 15년이나 못 보고 지냈던 큰 누나 여선우였다.
  • 사진에서 보던 것과 달리 여선우는 실물이 더 아름답고, 그리고 더 고고해 보이기도 했다.
  • 육은성이 여선우를 쳐다봄과 동시에 여선우의 시선도 그에게로 향했다.
  • 네 눈동자가 서로 마주치는 순간, 여선우의 몸이 작게 흠칫 떨렸다.
  • 아름다운 눈매에 일순 의아함이 서렸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선우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 “염강, 할아버지를 봐서 마지막으로 도와줄 테니까 앞으로 알아서 몸 사려.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네 다리를 분질러 놓을 줄 알아.”
  • 할아버지가 염강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게 싫어, 여선우는 4천만 짜리 수표를 써서 그에게 던져주었다.
  • “고마워, 큰 누나.”
  • 염강이 기뻐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 “큰 누나라고 부르지 마. 역겨우니까.”
  • “헤헤…”
  • 여선우의 질타에도 염강은 헤벌죽 웃기만 했다. 어차피 돈을 이미 손에 넣은 마당에 그녀가 무슨 태도를 취하든 크게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 “누나, 나야.”
  • 그때, 곁에 있던 육은성이 끝내 참지 못하고 작게 그녀를 불렀다.
  • 5년간 전쟁터를 누비며 이미 철옹성과도 같은 굳건한 성정이 형성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척에 있는 큰 누나 여선우를 마주한 순간, 육은성은 긴장으로 온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 백만 적군들을 마주했을 때에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그런 감정이었다.
  • 사나이에게도 가슴속 깊은 곳에는 물렁한 구석이 있으렸다. 그리고 그런 사나이 육은성을 물렁하게 만드는 게 바로 그의 일곱 누이들이었다.
  • 여선우는 또 한 번 몸을 흠칫 떨었다.
  • 눈 앞에 선 정체 모를 남자의 부름이 그녀를 순식간에 15년 전 그때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어린 남동생에게로 말이다.
  • 뻣뻣하게 굳은 목을 겨우 돌리며 어딘가 익숙한 듯한 얼굴을 향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 “너… 너…”
  • 여선우는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 아까 마당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그녀는 저쪽 한구석에 있던 청년이 15년 전 화재로 인해 목숨을 잃은 제 동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 그러나 그의 정체를 확인하려 들지 않은 건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클까 봐서였다.
  • 육은성이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던 때의 어투나 표정이 그렇게나 비슷했음에도 여선우는 여전히 청년과 제 동생 육은성을 동일 인물이라 믿을 수가 없었다.
  • 오문덕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선우야, 이 사람이 바로 네 동생 육은성이란다. 은성이가 돌아왔어.”
  • “육은성…”
  • 여선우는 찰나 정신을 놓을 뻔했다. 정말로 내 동생 육은성이 돌아왔단 말인가?
  • “그래. 누나, 나 돌아왔어!”
  • 육은성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큰 누나한테 포옹했다.
  • 여선우의 몸짓이 순간 굳으며 차갑게 식은 눈동자에 일말의 거부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 “정말 은성이가 돌아온 거구나. 누나 정말 너무 기뻐!”
  • 여선우는 말의 온도와 달리 작게 뒤로 물러서며 육은성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 육은성은 어리둥절해졌다. 제 예상과는 달리 큰 누나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 어떻게 그 화재 속에서 살아날 수 있었냐는 질문도, 왜 이제야 찾아온 거냐며 격분하는 장면도 없었다.
  • 마치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우한테 서로 안부를 묻듯 미지근한 리액션이었다.
  • 역시나 15년이라는 세월이 두 사람을 서로 멀리 떨어뜨려 놓은 걸까?
  • 시고 떫은 것을 먹은 것처럼 육은성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심각한 문제를 깨달았다.
  • 큰 누나가 이미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혹시 모를 불화를 피면하기 위해 자신과 내외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 아무리 서로 누나 동생하며 가깝게 지냈어도 필경 그들은 피가 섞이지 않은 남남이었다.
  • 만약 그가 예상한 대로라면 육은성은 그저 진심으로 여선우의 행복을 빌어줄 수밖에 없었다.
  • 오문덕은 미묘해진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두 사람을 안으로 이끌며 못다한 얘기를 이어갔다.
  • 그 기간동안 여선우는 한 번도 먼저 나서서 육은성에 관한 얘기를 묻는다거나 하지 않았다.
  • 육은성의 마음이 점점 더 시큰해져갔다.
  • 아마도, 정말 서로 멀어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