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호령과 함께 염강이 얼빠진 표정을 했다. 육은성의 얼굴에 고정된 시선이 진지하게 상대방의 오관을 살폈다. 그러다 문득 염강의 몸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15년 전 자신이 자주 괴롭혔던 연약한 아이의 얼굴이 지금 그의 눈앞에 자리한 얼굴과 중첩되면서 완벽하게 일치한 얼굴을 했다.
“그럴 리가 없어…”
염강은 있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목끝까지 올라온 이름이 꾸물거리며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지금 상황이 그에게는 너무도 황당하게 느껴졌다.
“많이 놀랍지?”
육은성이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어렸을 때 너 틈만 나면 나 괴롭혔잖아. 내 신발에 오줌을 싸는가 하면, 크레파스로 내 옷에 일부러 낙서도 했었고. 그리고 분명 네가 잘못한 일인데도 여러 번이나 나한테 뒤집어 씌우는 바람에 내가 원장님한테 혼난 일도 부지기수였지. 이런 것들 이제 기억 안 나는 거야?”
걔다, 역시 걔였어!
염강이 크게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경악했다. 그한테 무수한 괴롭힘을 당했던 육은성이 돌아왔다.
“너 그 화재 때 왜 죽어버리지 않았어? 왜 갑자기 나타나서 내 생활을 망쳐버리려고 하는 건데!”
염강의 정서가 몹시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내가 누나들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런데 누나들은 나를 동생으로 전혀 인정해 주지 않았어. 자신들한텐 동생이 육은성 너 하나밖에 없다면서 말이야.”
“영감탱이도 그래. 내가 온갖 애를 써서 결국 나를 입양하게 만들었더니, 입만 열면 하는 소리라는 게 네 이름뿐이야.”
“너처럼 되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아무도 나한테 기회를 안 줘. 대체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뭔데!”
염강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네가 제발 죽었기를 내가 얼마나 갈망했는지 알지?”
완전히 이성을 잃은 그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마침 옆에 아무렇게나 나뒹골고 있던 쇠파이프 하나를 들더니 울부짖으며 육은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건 환영처럼 빠르게 뻗어져 나온 다리였다.
퍽!
염강이 손에 든 쇠파이프를 미처 휘두르기도 전에 그의 복부에 선명한 발자국이 갑자기 찍히며 5미터 밖으로 몸 전체가 날아가 박혔다.
“네가 나보다 못한 게 뭔지 알고 싶어?”
육은성이 천천히 걸어가 염강 옆에 서며 그를 내려다봤다.
“난 스스로의 강함을 믿고 약한 자를 괴롭히지 않지. 그리고 난 배은망덕하지 않아. 질투에 눈이 멀어 미움에 사로잡히는 일 또한 없지.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해?”
가볍게 흘러나온 음성이었지만 염강의 영혼에는 마치 거대한 망치처럼 묵직하게 내리쳐졌다.
사람으로서 제일 기본적으로 갖춰야 될 준칙들을 염강은 가지고 있었나?
아니.
그는 스스로의 강함에 도취되어 약한 자를 괴롭히고, 은혜를 개같이 아는, 질투심에 눈 먼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이었다.
“크헉!”
너무 강렬한 자극을 받아서인지 염강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고통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바라보는 육은성의 냉담한 눈동자에 일말의 연민도 느껴지지 않았다.
질투심에 침식돼 인성이 비틀려지기까지 한 자는 동정할 가치도 없었다.
“얘야… 너… 네가 정말로 은성이니?”
그때, 오문덕의 떨리는 음성이 문득 등뒤에서 들려왔다.
몸을 돌린 육은성은 얼굴에 떠올랐던 찬기를 모두 털어내고 햇살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저 맞아요, 원장님. 저 돌아왔어요.”
“정말 은성이 맞구나!”
심장이 쿡 조여지는 느낌에, 오문덕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육은성을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은성이, 네가 아직… 아직 살아있었구나… 하나님이 드디어 나를 괴롭히기를 그만둔 것이야. 나는, 나는 나 때문에 네가 죽은 줄로만 알고… 크흑…”
오문덕은 큰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슬퍼서 울고 있다기보다는 일종의 시름을 덜은 듯한 시원함이었다.
그를 15년이나 죄책감에 쌓이게 만든 아이가 여전히 살아있었던 것이다.
“네, 원장님. 저 아직 살아있어요. 이렇게 잘 커서 돌아왔어요.”
육은성이 조용하게 그를 다독였다.
오문덕의 말에서 무언가를 알아챈 그는 울음소리가 잦아든 뒤에야 입을 떼어 물었다.
“원장님, 15년 전에 있었던 그 화재 사고 아니죠? 혹시 저한테 뭐 숨기고 있는 거 없으세요?”
오문덕이 눈물을 훔치며 답했다.
“지나간 일은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둬. 네가 살아있기만 하면 된 거야.”
그의 말은 육은성의 추측을 더 확신하게 만들었다. 진지한 얼굴의 육은성이 오문덕을 향해 말했다.
“원장님, 정말로 저한테 미안하게 생각하시는 거면 솔직하게 저한테 다 알려주세요, 네?”
오문덕은 이 화제를 피해가고 싶었으나 육은성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더 이상 감출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입에서 느릿느릿하게 흘러나온 얘기가 길어짐에 따라 사건의 진상이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역시나 15년 전에 있었던 그 화재사건에는 이상한 점이 존재했었다.
그때 당시 원딜 컴퍼니라는 부동산 회사에서 햇살보육원이 자리한 땅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면서 몇 번이나 오문덕을 찾아와 헐값에 그 땅을 사들이려는 수작을 부렸었다.
그러나 오문덕은 그들의 어떠한 수단과 방법에도 강경하게 맞서며 뜻을 굽히지 않았었는데, 결국 그를 어쩌지 못한 원딜 컴퍼니 책임자 하나가 마지막으로 그를 찾아와 계약에 사인하지 않으면 그 후과를 알아서 책임져야 할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고 간 것이었다.
그리고 이튿날, 햇살보육원에 모두가 다 알고있는 그 화재가 일어났다.
오문덕은 그날의 화재가 원딜 컴퍼니의 복수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닐까라고 의심했다. 다만 그들의 소행이라는 증거를 여태 찾지 못한 상태였다.
햇살보육원의 화재가 있은 후로 육은성이 사라졌다.
오문덕은 자기가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햇살보육원 원장직에서 사직하고 육은성과 나이가 비슷한 아이를 입양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염강이었다.
오문덕은 그때부터 육은성에 대한 모든 죄책감을 염강한테 갚기 시작했다.
그렇게 과분한 총애는 오히려 염강의 악습을 길렀고, 지금에는 3일에 한 번 꼴로 오문덕에게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예전에는 그래도 금액이 적었어서 별말을 안 했는데, 이번에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4천만이나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오문덕이 이를 거절하자 방금 전과 같은 상황이 일어난 것이었다.
오문덕의 얘기가 끝나고 죽음과 같은 적막이 감돌았다.
고개를 들어 육은성을 쳐다본 오문덕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육은성의 칠흑과도 같은 눈동자에서 무시무시한 섬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원딜 컴퍼니!
나를 15년이나 고향을 떠나 밖에서 떠돌아 다니게 만들고, 하마터면 화염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만들었으며, 또 일곱 누이들을 나의 곁에서 빼앗아 갈 뻔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