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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터프한 남동생

  • 세 사람의 대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선우 그룹 직원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 매사 냉정했던 대표가 고작 별 볼일 없는 기생오라비 하나 때문에 서 씨 가문의 도련님한테 반항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고?
  • 역시 사사로운 감정에 빠진 여자는 이성을 잃기 쉽다더니 여선우도 똑같은 모양새였다.
  • 일순간 직원들의 입을 타고 유언비어가 회사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 여선우는 아랑곳 얺고 육은성을 이끌어 선우 빌딩을 나왔다. 그리고 밖에서 운이 나쁘게 염강과 또 마주쳤다.
  • 염강은 역시나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두 사람을 발견한 그는 얼른 다가오더니 재빠르게 여선우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 “큰 누나, 나 4천만 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주면 안 돼? 이번이 마지막이야. 나 정말 맹세해!”
  • 알고 보니 염강은 여선우가 전에 줬던 4천만 원을 빚 갚는 데 쓴 게 아니라, 그걸로 더 큰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또 도박을 했다가 그 돈마저도 다 날린 것이었다.
  • “꺼져. 네 면상만 봐도 역겨우니까!”
  • 이미 기분이 상해서 회사를 나서던 여선우가 염강에게 좋은 태도를 보일 리가 만무했다. 그녀는 곧장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찾아 육은성과 함께 빠르게 떠나갔다.
  •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육은성은 잔뜩 굳은 여선우의 옆얼굴을 보며 미안해하며 말했다.
  • “미안해, 누나.”
  • 돌아온 첫날에 큰 누나한테 이렇게 큰 폐를 끼치다니, 육은성은 제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못말린다고 생각했다.
  • 여선우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 “뭐라는 거야. 네 탓도 아닌데 뭐.”
  • 그녀는 사실 서준의 이런 간섭이 예전부터 진절머리났다. 하지만 중요한 거래처라는 상대방의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았을 뿐이다. 육은성의 도발이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터졌을 문제였다.
  • “누나, 나 생각해 봤는데 인사팀 부장직이 나한테 안 어울리는 것 같아.”
  • 끼익!
  • 여선우가 급정거하며 고개 돌려 육은성을 나무랐다.
  • “너도 소문이 신경 쓰여서 그래? 우리 둘이 서로 남 부끄러울 게 없게 행동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 회사 사람들이야 뭐라고 떠들든, 여선우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육은성마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면 여선우는 정말로 화가 날 것 같았다.
  • “아니야, 누나. 내 말은 그게 아니라.”
  • 육은성이 다급하게 해명했다.
  • “난 자유롭게 사는 게 습관 됐어서 회사를 관리하는 게 정말로 나한테는 안 맞는 것 같아서 한 소리였어. 소문이랑은 상관 없어.”
  • 여선우는 잠시 침묵하더니 결국 작게 탄식했다.
  • “알겠어. 그게 너한테는 편하다면 할 수 없지.”
  • “맞다. 누나네 회사 모레 신제품 런칭회를 연다면서?”
  • “응. 그래서 지금 좀 걱정 돼. 서준 씨랑 예인 그룹 쪽에서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거든.”
  • 선우 그룹은 상장 전 신제품 런칭회를 열어 회사의 신제품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는 자리를 가지려 준비하고 있었다. 기자들한테도 이미 관련 소식을 다 넣은 상태이고 말이다.
  • 하지만 최근에 발생한 여러 가지 일들로 미루어 보건대 이번 발표회가 그렇게 쉽게 마무리 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 그게 여선우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 그린 별장.
  • 여선우가 거주하고 있는 이곳은 잘 정돈된 정원에 꽃내음이 향긋하게 풍기는 그녀의 안식처였다.
  • 매일 아침 정원을 향한 문을 활짝 열면 만개한 꽃에서 나는 싱그러운 향기들에 여선우는 모든 고민들이 말끔히 씻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는 했다.
  • 육은성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놀라워하며 물었다.
  • “누나 이렇게 큰 집에서 혼자 살아?”
  • “응. 네 나머지 누나들은 밖에서 일이 바쁘다 보니 집에 평소에 잘 안 들어와. 네가 비밀로 해달라 하지 않았으면 오늘밤 집에 들어오라고 전화 한바퀴 쫙 돌렸을 건데.”
  • 여선우는 집에서 입는 편한 옷으로 이미 갈아입은 뒤였다. 카툰 캐릭터가 그려진 귀여운 잠옷이었다. 순식간에 한 회사의 대표에서 이웃집 누나로 변모한 모습이었다.
  • “은성아, 거실에서 잠시 티비 보고 있을래? 누나가 얼른 밥 차려줄게.”
  • “아니야, 누나. 그냥 라면이나 끓여주면 돼.”
  • “그… 너무 성의가 없지 않을까?”
  • “성의가 없긴. 우리 어렸을 때 간식도 없어서 거의 못 먹고 그랬잖아. 그때마다 누나가 원장님 라면을 몰래 훔쳐다가 우리한테 끓여주고 그랬던 게 기억나서 오랜만에 그때 그 맛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 그래.”
  • “그럼… 알겠어.”
  • 수줍게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선 여선우는 부지런히 물 끓이고 라면 봉지를 뜯는 등 잠시 뚝딱거리더니 얼마 안 돼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라면 두 그릇을 내왔다.
  • 육은성은 허겁지겁 면을 후루룩 먹더니 연신 칭찬했다.
  • “쩝… 누나, 역시 그때 그맛 그대로야. 진짜 오랜만에 먹는다. 너무 맛있어.”
  • “네가 좋아하면 누나가 평생 끓여줄게.”
  • 국물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그릇을 비운 육은성을 보며 여선우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 이제 다 먹은 그릇들을 치우려고 일어서는데 육은성이 그녀를 제지했다.
  • “내가 할게. 누나 피부가 약해서 세제에 자주 닿으면 거칠어져.”
  • “우리 은성이가 벌써 누나 아낄 줄도 다 알고, 많이 컸네.”
  • 흡족한 웃음을 지은 여선우는 사양 않고 말했다.
  • “그럼 누나 먼저 샤워하고 올게.”
  • 욕실로 들어선 그녀는 샤워기를 틀고 뜨끈한 물에 몸을 맡겼다.
  • 상쾌하게 샤워를 마친 여선우는 곧 당황하고 말았다. 평소에 집에 남자를 들일 일이 없다 보니 샤워를 다 한 후에 아무렇지 않게 알몸으로 다니던 게 습관 돼서 갈아입을 옷을 안 가지고 왔던 것이다.
  •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자매들도 마찬가지로 집에서는 다들 거의 헐벗다시피 다녔다.
  • 이미 바구니에 던져 넣은 더러운 옷을 바라보며 여선우는 사색에 잠겼다. 그걸 다시 주워서 입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 결국 여선우는 하얀색 타올을 몸에 두른 채 조심스레 화장실을 나왔다. 육은성이 티비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얼른 제 방으로 잠입해서 옷을 갈아입을 계획이었다.
  • 그러나 절반도 채 가지 못해 아직 마르지 않은 발바닥이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 “아야…”
  • “누나 괜찮아?”
  • “오지…”
  • ‘마’라는 말을 마저 뱉기도 전에 육은성이 이미 달려와 그녀의 앞에 섰다.
  • 여선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여선우는 상황파악을 하지 못해 넋이 나가 있었다.
  • 갑자기 들려온 큰 누나의 비명 소리에 달려왔더니 바닥에 대자로 뻗은 여선우를 봤을 때의 기분이란…
  • 육은성은 잠시 멍 때리다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얼른 다가가 여선우를 그대로 안아들었다.
  • “은성아, 너…”
  • 여선우는 원래도 빨개졌던 얼굴이 더 뜨거워지며 심장 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릴 것처럼 더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 비록 육은성과 어려서부터 친 누나, 동생처럼 서로 지내왔었다지만 그래도 엄연히 말하자면 두 사람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었다.
  • ‘설마 은성이가…’
  • 여선우가 긴장으로 몸을 한껏 굳히고 있는데 육은성이 갑자기 입을 떼며 물어왔다.
  • “집에 연고 있어?”
  • “어. 저기 티비 밑에 서랍장에.”
  • 육은성은 여선우를 안고 그녀의 방으로 걸어간 뒤 침대에 조심스레 여선우를 내려놨다. 그러고는 곧바로 뒤돌아서 방을 나서더니 연고와 알콜솜을 찾아 다시 들어왔다.
  • 그 틈을 타 여선우는 재빨리 잠옷치마를 찾아 갈아입었다.
  • “누나 여기 무릎 까졌어. 일단은 먼저 소독하고 다시 연고 발라줄게.”
  • 육은성이 무릎을 꿇고 알콜솜을 준비했다.
  • “내… 내가 직접 할게!”
  • 여선우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 이미 잠옷치마로 갈아입었다지만 그래도 재질이 얇은 편이라 이런 자세로 육은성에게 내보이는 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 “움직이지 마.”
  • 육은성이 작게 그녀를 나무라며 엄숙한 표정을 했다.
  • 여선우는 깜짝 놀랐다가 곧 옆의 이불에 고개를 파묻으며 얼굴을 붉혔다.
  • 어느새 어른이 된 동생한테서 터프한 남자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 그날밤, 육은성은 간만에 푹 잠에 들었다.
  • 이튿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여선우는 어느새 회사로 출근했고 거실에 그녀가 한 걸로 추정되는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하트 모양의 메모지에 글이 한 줄 적혀 있었다.
  • “잊지 말고 아침 꼭 먹어~^^”
  • 작게 그려진 눈웃음에 육은성은 행복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 여선우는 밖에서 고고한 도시녀처럼 보여도, 집에서는 다시 마음 따뜻한 큰 누나로 돌아와 육은성을 살뜰하게 보살폈다.
  • 그 갭차이를 느끼며 육은성은 다시 한 번 그 누구도 누나한테 상처 하나 주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 어제 있었던 일을 다시 상기해낸 육은성의 눈동자에 일순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휴대폰을 꺼낸 그는 곧 특수한 번호를 띄우고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