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을 돌아 나오자 도로 옆에 포르쉐 911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 운전기사 하나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차에 타.”
짤막한 지시에 육은성은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제대로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데 문득 가까운 곳에서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 앉은 여선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였다.
육은성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큰 누나 왜 이러지? 아무리 15년이나 떨어져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날 냉담하게 대할 필요는 없잖아.
“이제 얘기해 봐. 우리 할아버지한테 접근한 목적이 뭔지.”
여선우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목적?
멈칫한 육은성이 물었다.
“목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계속해서 연기할 생각인가? 당신이랑 낭비할 시간 없으니까 얼마를 원하는지 빨리 얘기하라고.”
얼음장 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여선우의 모습에서, 육은성은 그제야 큰 누나가 자기를 쌀쌀하게 대하는 게 자신을 가짜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였다는 걸 깨달았다.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네?
입가를 끌어올린 육은성은 큰 누나를 놀려줘야겠다 생각하고 뒤로 몸을 완전히 기대며 한량 같은 태도를 취했다.
“내가 가짜인 줄 알았으면 왜 아까 원장님 앞에서 나 까발리지 않았어?”
역시 이제야 승인하는구나.
여선우의 표정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 그녀는 한 번도 제 동생이 아직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은 적이 없었다.
방금 전 진실을 들추지 않은 것도 할아버지의 흥을 깨지 않기 위해서였다.
여선우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가까이에서 모두 지켜본 그녀였다.
15년 동안 봐온 날들 중 오늘 오문덕이 보여준 웃는 얼굴이 제일 많았다. 그런 할아버지의 앞에서 어떻게 남자의 정체를 까발릴 수가 있단 말인가.
물론 이런 자세한 내용들을 가짜 동생한테 해명할 필요는 없었다.
여선우는 육은성의 질문에 대답을 않고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육은성은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일단은 나도 그쪽이랑 길이 같으니까 차 좀 태워주면 좋겠는데.”
말을 마친 그는 눈을 감고 여유로운 표정을 했다.
여선우는 어이가 없었지만 운전기사한테 차를 몰라고 지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포르쉐가 빠른 속도로 오문덕의 집에서 멀어져갔다.
안정적으로 달리는 차 안에는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온도가 내려가다 못해 분위기가 얼음 같았다.
여선우의 표정 또한 내내 서리가 껴져 있었다.
그렇게 약 20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어느 순간부터 여선우의 눈썹이 작게 찌푸려졌다.
“여기 회사로 가는 방향이 아닌데요?”
운전기사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여전히 직진 주행했다.
불길한 예감이 여선우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끼익!
결국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한곳에 차를 세운 운전기사 하선철이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 대표님, 저도 밥 먹자고 하는 짓이니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죠?”
“뭐 별다른 뜻은 없고, 그저 여 대표님께서 저랑 협조해서 사진 몇 장만 찍어주면 끝날 일입니다. 물론 협조만 잘 해주신다면야 여 대표님께서 다칠 일도 없으실 거고요.”
버튼을 눌러 차 문을 걸어잠근 그는 시트 밑에서 카메라와 날카로운 단칼을 꺼내들며 말했다.
“여 대표님은 똑똑하시니까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음흉하게 두어 번 웃은 하선철이 옆에 앉은 육은성을 쳐다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새꺄,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여기 계신 미녀 대표님의 옥체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드릉드릉 하는데. 자식, 너 눈요기 제대로 하겠네.”
딱 보기에도 카메라로 제 나체사진을 찍으려 하는 하선철에, 여선우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예리한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 예인 그룹이랑 관련된 사람이야, 아니면 유지빈 그들과 엮여 있어?”
예인 그룹은 선우 그룹과 마찬가지로 스킨케어 사업을 주요하게 개척하고 있는 기업으로 두 그룹간의 명쟁암투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었다.
근래에 이르러 선우 그룹에서 상장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여선우의 나체사진이 인터넷을 떠돌아 다니게 되면 선우 그룹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게 될 게 분명했다.
여선우가 방금 전 거론한 유지빈이라는 사람은 선우 그룹의 인사팀 부장으로, 지금 그녀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는 하선철이 바로 유지빈이 채용해 들어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선철은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다들 선우 그룹의 여 대표님이 미모는 물론이고 비상한 두뇌에 용기마저 있는 여인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더니, 오늘 그 진면모를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됐네.”
그의 말은 여선우의 추측을 긍정하는 바나 마찬가지였다.
“여 대표, 내가 말이지, 예전부터 여자라 하면 아까워서 손도 잘 못 대고 그랬어. 특히 여 대표 같은 여신급의 미녀들한테는 더 약해. 내가 차마 내 손으로 여 대표 몸을 더럽히지 못하겠으니 본인이 직접 옷을 벗어 봐. 만약 말을 안 듣고 내가 직접 나서게 만든다면 간단하게는 끝내지 못할 거야. 흐흐.”
여선우가 얌전하게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음흉하게 웃은 하선철이 탐욕스런 눈빛을 했다.
바로 그때, 탁하는 소리와 함께 하선철의 손목이 커다란 손에 꽉 잡혀 옴짝달싹을 못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는 육은성의 뼈를 에일 듯한 눈동자와 마주했다.
“감히 내 앞에서 우리 누나를 괴롭혀? 지옥의 맛이 어떤지 궁금해서 그러는구나?”
차가운 눈빛만큼 싸늘한 음성이었다.
전쟁터를 5년이나 누비고 다니면서 육은성은 그야말로 별의별 인간들을 다 겪어봤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고로 상대방이 조금의 악심이라도 품은 순간, 육은성은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자연스레 지니게 됐다.
포르쉐에 몸을 처음으로 담은 순간에도 그러했다.
육은성은 백미러를 통해 뒤를 살피는 운전기사의 번뜩이는 눈빛에서 상대에게 문제가 있음을 바로 직감하고 여선우에게 차를 태워달라고 말한 참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였다.
“주제도 모르고 날뛰지 마라, 새끼야.”
하선철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공짜로 좋은 구경 시켜주겠다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여기에 상황극까지 더하겠다는 거야?”
잡힌 손목을 빼내려던 하선철은 아무리 힘을 써도 꿈쩍 않는 육은성의 갈고리와도 같은 손바닥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까드득!
그때 문득 들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하선철의 손목 관절이 순식간에 박살이 나면서 단칼이 바닥으로 추락해 떨어졌다.
“크아악!”
사람한테서 어떻게 저런 공포스러운 악력이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단번에 손목이 아작난 하선철은 다른 손에 들린 카메라를 내던진 채 미친 듯이 차 문고리를 잡아 당기고는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그의 다리에서 격렬한 통증이 또 전해져 왔고, 하선철은 곧바로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겨우 고개를 돌려보니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불규칙한 모양의 돌멩이 두 개가 그의 무릎 뒤쪽 옴폭한 곳에 깊숙히 박혔다.
듣도보도 못한 수법에 하선철은 전에 없는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며 온몸을 격렬하게 떨기 시작했다.
“나도 아까워서 조심히 대하는 우리 누나를 네까짓 게 뭐라고 감히 덤비려 들어?”
느긋하게 다가온 육은성은 하선철이 가격당한 부위를 지그시 눌러 밟았다.
“으아아아악!”
돼지 멱따는 비명소리와 함께 결국 하선철은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용에게는 역린이 있는 법이고, 그 역린을 건드린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법이다.
육은성에게 있어 그의 역린은 바로 그의 일곱 누이들이었고, 그녀들의 손끝 하나라도 건드린 자들은 반드시 천합의 왕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분노의 불길을 감당해야 할 지어라.
만약 이곳이 전쟁터였다면 하선철은 이미 죽은 시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여선우도 뒤따라 차에서 내렸다가 육은성의 뒤에서 멈춰섰다. 그의 잔인한 행동에 고운 눈동자가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
“당신 도대체 누구야?”
여선우가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불쑥 뒤돌아 선 육은성은 한 손으로 제 바지띠를 풀며 다른 손으로 여선우의 어깨를 짚고는 힘껏 아래로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