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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용의 역린을 건드린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 거의 반 시간을 얘기 나눈 뒤에야 여선우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할아버지, 저 회사로 가봐야 해서 나중에 다시 찾아 뵐게요.”
  • “그래. 일이 중요하지. 난 괜찮으니까 얼른 가봐.”
  • 오문덕이 흡족한 얼굴로 답했다.
  • “염강이 또 오늘처럼 찾아와서 애를 먹이면 저한테 말해 주세요. 제가 혼낼게요.”
  • 작별 인사를 한 뒤 여선우는 이번에 육은성을 향해 말했다.
  • “나랑 같이 나갈래? 따로 할 말이 있어서 그래.”
  • 고개를 끄덕인 육은성은 여선우의 뒤를 따라 마당을 나섰다.
  • 골목을 돌아 나오자 도로 옆에 포르쉐 911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 운전기사 하나가 서 있는 게 보였다.
  • “차에 타.”
  • 짤막한 지시에 육은성은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 제대로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데 문득 가까운 곳에서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 앉은 여선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였다.
  • 육은성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큰 누나 왜 이러지? 아무리 15년이나 떨어져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날 냉담하게 대할 필요는 없잖아.
  • “이제 얘기해 봐. 우리 할아버지한테 접근한 목적이 뭔지.”
  • 여선우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 목적?
  • 멈칫한 육은성이 물었다.
  • “목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 “계속해서 연기할 생각인가? 당신이랑 낭비할 시간 없으니까 얼마를 원하는지 빨리 얘기하라고.”
  • 얼음장 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여선우의 모습에서, 육은성은 그제야 큰 누나가 자기를 쌀쌀하게 대하는 게 자신을 가짜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였다는 걸 깨달았다.
  •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네?
  • 입가를 끌어올린 육은성은 큰 누나를 놀려줘야겠다 생각하고 뒤로 몸을 완전히 기대며 한량 같은 태도를 취했다.
  • “내가 가짜인 줄 알았으면 왜 아까 원장님 앞에서 나 까발리지 않았어?”
  • 역시 이제야 승인하는구나.
  • 여선우의 표정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 그녀는 한 번도 제 동생이 아직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은 적이 없었다.
  • 방금 전 진실을 들추지 않은 것도 할아버지의 흥을 깨지 않기 위해서였다.
  • 여선우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가까이에서 모두 지켜본 그녀였다.
  • 15년 동안 봐온 날들 중 오늘 오문덕이 보여준 웃는 얼굴이 제일 많았다. 그런 할아버지의 앞에서 어떻게 남자의 정체를 까발릴 수가 있단 말인가.
  • 물론 이런 자세한 내용들을 가짜 동생한테 해명할 필요는 없었다.
  • 여선우는 육은성의 질문에 대답을 않고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육은성은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 “뭐 일단은 나도 그쪽이랑 길이 같으니까 차 좀 태워주면 좋겠는데.”
  • 말을 마친 그는 눈을 감고 여유로운 표정을 했다.
  • 여선우는 어이가 없었지만 운전기사한테 차를 몰라고 지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 포르쉐가 빠른 속도로 오문덕의 집에서 멀어져갔다.
  • 안정적으로 달리는 차 안에는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온도가 내려가다 못해 분위기가 얼음 같았다.
  • 여선우의 표정 또한 내내 서리가 껴져 있었다.
  • 그렇게 약 20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어느 순간부터 여선우의 눈썹이 작게 찌푸려졌다.
  • “여기 회사로 가는 방향이 아닌데요?”
  • 운전기사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여전히 직진 주행했다.
  • 불길한 예감이 여선우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 끼익!
  • 결국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한곳에 차를 세운 운전기사 하선철이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 “여 대표님, 저도 밥 먹자고 하는 짓이니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죠?”
  • “뭐 별다른 뜻은 없고, 그저 여 대표님께서 저랑 협조해서 사진 몇 장만 찍어주면 끝날 일입니다. 물론 협조만 잘 해주신다면야 여 대표님께서 다칠 일도 없으실 거고요.”
  • 버튼을 눌러 차 문을 걸어잠근 그는 시트 밑에서 카메라와 날카로운 단칼을 꺼내들며 말했다.
  • “여 대표님은 똑똑하시니까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음흉하게 두어 번 웃은 하선철이 옆에 앉은 육은성을 쳐다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 “새꺄,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여기 계신 미녀 대표님의 옥체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드릉드릉 하는데. 자식, 너 눈요기 제대로 하겠네.”
  • 딱 보기에도 카메라로 제 나체사진을 찍으려 하는 하선철에, 여선우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예리한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
  • “당신, 예인 그룹이랑 관련된 사람이야, 아니면 유지빈 그들과 엮여 있어?”
  • 예인 그룹은 선우 그룹과 마찬가지로 스킨케어 사업을 주요하게 개척하고 있는 기업으로 두 그룹간의 명쟁암투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었다.
  • 근래에 이르러 선우 그룹에서 상장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여선우의 나체사진이 인터넷을 떠돌아 다니게 되면 선우 그룹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게 될 게 분명했다.
  • 여선우가 방금 전 거론한 유지빈이라는 사람은 선우 그룹의 인사팀 부장으로, 지금 그녀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는 하선철이 바로 유지빈이 채용해 들어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 하선철은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 “다들 선우 그룹의 여 대표님이 미모는 물론이고 비상한 두뇌에 용기마저 있는 여인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더니, 오늘 그 진면모를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됐네.”
  • 그의 말은 여선우의 추측을 긍정하는 바나 마찬가지였다.
  • “여 대표, 내가 말이지, 예전부터 여자라 하면 아까워서 손도 잘 못 대고 그랬어. 특히 여 대표 같은 여신급의 미녀들한테는 더 약해. 내가 차마 내 손으로 여 대표 몸을 더럽히지 못하겠으니 본인이 직접 옷을 벗어 봐. 만약 말을 안 듣고 내가 직접 나서게 만든다면 간단하게는 끝내지 못할 거야. 흐흐.”
  • 여선우가 얌전하게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음흉하게 웃은 하선철이 탐욕스런 눈빛을 했다.
  • 바로 그때, 탁하는 소리와 함께 하선철의 손목이 커다란 손에 꽉 잡혀 옴짝달싹을 못했다.
  • 그리고 곧바로 그는 육은성의 뼈를 에일 듯한 눈동자와 마주했다.
  • “감히 내 앞에서 우리 누나를 괴롭혀? 지옥의 맛이 어떤지 궁금해서 그러는구나?”
  • 차가운 눈빛만큼 싸늘한 음성이었다.
  • 전쟁터를 5년이나 누비고 다니면서 육은성은 그야말로 별의별 인간들을 다 겪어봤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 고로 상대방이 조금의 악심이라도 품은 순간, 육은성은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자연스레 지니게 됐다.
  • 포르쉐에 몸을 처음으로 담은 순간에도 그러했다.
  • 육은성은 백미러를 통해 뒤를 살피는 운전기사의 번뜩이는 눈빛에서 상대에게 문제가 있음을 바로 직감하고 여선우에게 차를 태워달라고 말한 참이었다.
  • 그리고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였다.
  • “주제도 모르고 날뛰지 마라, 새끼야.”
  • 하선철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 “공짜로 좋은 구경 시켜주겠다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여기에 상황극까지 더하겠다는 거야?”
  • 잡힌 손목을 빼내려던 하선철은 아무리 힘을 써도 꿈쩍 않는 육은성의 갈고리와도 같은 손바닥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 까드득!
  • 그때 문득 들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하선철의 손목 관절이 순식간에 박살이 나면서 단칼이 바닥으로 추락해 떨어졌다.
  • “크아악!”
  • 사람한테서 어떻게 저런 공포스러운 악력이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 단번에 손목이 아작난 하선철은 다른 손에 들린 카메라를 내던진 채 미친 듯이 차 문고리를 잡아 당기고는 밖으로 튀어나갔다.
  • 그러나 얼마 못 가 그의 다리에서 격렬한 통증이 또 전해져 왔고, 하선철은 곧바로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 겨우 고개를 돌려보니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불규칙한 모양의 돌멩이 두 개가 그의 무릎 뒤쪽 옴폭한 곳에 깊숙히 박혔다.
  • 듣도보도 못한 수법에 하선철은 전에 없는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며 온몸을 격렬하게 떨기 시작했다.
  • “나도 아까워서 조심히 대하는 우리 누나를 네까짓 게 뭐라고 감히 덤비려 들어?”
  • 느긋하게 다가온 육은성은 하선철이 가격당한 부위를 지그시 눌러 밟았다.
  • “으아아아악!”
  • 돼지 멱따는 비명소리와 함께 결국 하선철은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 용에게는 역린이 있는 법이고, 그 역린을 건드린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법이다.
  • 육은성에게 있어 그의 역린은 바로 그의 일곱 누이들이었고, 그녀들의 손끝 하나라도 건드린 자들은 반드시 천합의 왕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분노의 불길을 감당해야 할 지어라.
  • 만약 이곳이 전쟁터였다면 하선철은 이미 죽은 시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 여선우도 뒤따라 차에서 내렸다가 육은성의 뒤에서 멈춰섰다. 그의 잔인한 행동에 고운 눈동자가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
  • “당신 도대체 누구야?”
  • 여선우가 물었다.
  • 그녀의 물음에 불쑥 뒤돌아 선 육은성은 한 손으로 제 바지띠를 풀며 다른 손으로 여선우의 어깨를 짚고는 힘껏 아래로 눌렀다.
  • “미안, 누나. 잠시 실례할게!”
  • “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