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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남양성의 왕이 운천신군을 뵙습니다

  • “왕, 무슨 지시가 있으십니까?”
  • 통화가 연결되고 깍듯한 인사가 들려왔다.
  • “내가 지금 알려주는 사람의 개인 네트워크를 해킹해서 그 사람 컴퓨터에 있는 모든 파일을 제일 빠른 속도로 나한테 보내줘.”
  • “알겠습니다.”
  • 간단하게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은 육은성은 방금 전 통화 상대에게 한 사람의 이력서를 넘겼다. 그 사람은 바로 유지빈이었다.
  • 어제 여선우가 유지빈을 해고할 때 육은성도 그 현장에 있었다. 세밀한 관찰을 통해 육은성은 그가 간단한 인물이 아님을 직감했다.
  • 우선 먼저 여선우의 질문에 있어 유지빈은 해명하겠다는 시도도 없이 깔끔하게 연우 그룹과 부당한 거래가 있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두 번째, 유지빈은 사무실을 나서기 전 분명 입가에 이상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치 무언갈 계획하고 있다는 듯 말이다.
  • 최근 선우 그룹의 동향과 결합해 봤을 때 육은성은 제일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많은 게 내일에 있을 신제품 런칭회라고 생각했다.
  • 빠르게 판단을 마친 육은성은 남들의 눈을 피해 선우 그룹의 데이터망에서 유지빈의 이력서를 찾아내 복사해뒀다.
  • 그리고 방금 유지빈의 컴퓨터 해킹을 의뢰한 참이었다. 그의 컴퓨터를 잘만 뚜진다면 유지빈의 약점을 쥘 수 있을 테고, 그렇다면 그가 신제품 발표회에서 혹시 모를 사고 치는 것을 제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 신제품 발표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육은성의 보험 전략이었다.
  • 아침을 먹은 뒤 정원으로 내려온 육은성은 잠시 산책하려 했다가 대문 밖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 40대로 추정되는 각진 얼굴에 수염을 짧게 기르고 있는 남성이었다. 그의 외모는 척 보아도 포스가 남달랐다.
  • 남자의 이름은 팽호현으로 양성 사람이며, 사람들에겐 남양성의 왕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 “남양성의 왕 팽호현이 운천신군을 뵙습니다!”
  •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인사한 팽호현이 몸을 90도로 접으며 인사를 해왔다. 이미 이곳에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동작이었다.
  • “소식이 빠르네요.”
  • 팽호현을 슬쩍 쳐다본 육은성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남양성의 왕이란 자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래도 상대방이 어느 정도 무공을 하는 자라는 건 알 수 있었다.
  • “저에게 형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분이 천기 장군님의 부하이십니다. 저한테 신군 전하를 잘 섬기라고 하시더군요.”
  • “섬기라고요? 그냥 저한테 아부나 떨라고 보낸 거겠죠.”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 팽호현이 폭포수 같은 식은 땀을 흘렸다. 심장 또한 커다란 바위산에 깔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 운천신군이 아무렇지 않게 내뿜는 기세인데도 어마어마하게 다가왔다.
  •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를 평범한 인물로 봤을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운천신군이라는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면 평범할수록 더 무섭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 팽호현이 바로 그러했다.
  • 사전에 육은성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면 그는 아마도 육은성을 그저 아주 평범한 청년으로 봤을 것이다.
  • 그러나 육은성의 신분을 안 뒤로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팽호현에게 거대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저를 섬기든 아부를 떨든 마침 잘 오셨으니깐요.”
  • 팽호현이 질식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때 육은성의 한 마디가 그에게 새로운 삶을 다시 얻게 해줬다.
  • “신군 전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 “좋습니다.”
  • 육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 “몇 가지 일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 15년 전 햇살보육원이라는 곳에 큰 화재가 일어났었는데 전 그게 원딜 컴퍼니와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회사 책임자들을 중점적으로 조사 좀 해 주세요.”
  • “두 번째, 내일 저의 누이가 대표로 있는 선우 그룹에서 신제품 런칭회를 개최하는데 당신이 앞장 서서 무언가 표시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 “세 번째…”
  • 육은성의 지시가 있고 난 후 그린 별장을 떠나며 팽호현은 흥분되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 운천신군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게 수많은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는 일이었다.
  • 그런데 그런 기회를 자기가 잡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이만한 영광이 어딨겠는가. 분명 다른 사람들도 부러움의 눈길로 자신을 질투할 게 뻔했다.
  • 팽호현이 떠난지 얼마 안 되어 육은성은 새로운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는 알림음을 들었다.
  • 여선우의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로 메일함에 들어간 그는 첨부파일에 들은 압축파일을 다운하고 그걸 풀었다.
  • 그러자 파격적인 내용이 담긴 파일들이 그의 눈 앞에 쫘악 펼쳐졌다.
  • “꽤나 요란하게 노는데?”
  • 내일 유지빈이 일만 치지 않는다면 그를 건드리지 않겠으나, 조금이라도 주제를 모르고 설치기 시작하면 육은성은 제 손에 넣은 파일들로 충분히 그를 패가망신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 이튿날, 선우 빌딩 13층 회의실 안.
  • 사전에 초청한 매체와 기자들이 줄 지어 회의실로 들어섰다.
  • 여선우는 직원에게 재차 강조하며 말했다.
  • “정체불명의 사람들을 거를 수 있게 반드시 모든 사람들의 사원증을 잘 확인하고 들여 보내세요.”
  • 경호팀장 곽휘용이 가슴을 치며 자신있게 말했다.
  • “걱정 마세요, 대표님.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 런칭회를 위한 준비를 하면서도 여선우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멈추질 않았다.
  • 육은성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물었다.
  • “왜, 누나?”
  • “아침부터 오른쪽 눈꺼풀이 계속 뛰는 게 꼭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 “괜찮아. 내가 있는데 뭘.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받치고 있어줄게.”
  • “그저 듣기 좋은 말밖에 할 줄 모르지.”
  • 여선우가 곱게 눈을 흘겼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육은성이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그의 말을 듣고나니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 10시 정각이 되고 신제품 런칭회가 약속대로 시작됐다.
  • 잠시 차림새를 가다듬은 여선우는 무대 앞으로 걸어가 자세를 바로 했다.
  • 회의실에 착석한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등장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 다들 양성에 대표적인 미녀라 불리는 여선우 대표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어도 그저 소문이 과장된 거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그들이었다.
  • 지금 세월에야 조금만 메이크업을 공들여 하고 옷을 잘 차려 입으면 미녀처럼 보이는 세상이 아닌가?
  • 그리고 워낙 카메라 필터 기능이 많이 발전해서 아무리 못생긴 사람도 순식간에 얼짱으로 탈바꿈하는 시대였다.
  • 그런 편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여선우가 등장한 순간 사람들은 제가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 늘씬한 몸매에 출중한 기질, 특히 대다수 인플루언서들이 자주 하는 진한 메이크업과 달리 그저 옅은 화장만 했음에도 모든 여성 인플루언서들을 압살하는 그녀의 얼굴이 그야말로 진국이었다.
  • 기자들은 순식간에 온몸에 활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 여선우의 표현은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깔끔한 진행솜씨로 자기 회사의 신제품을 소개하는 그녀에게서 무대 아래에서 보였던 긴장한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 그렇게 발표회 전반전 순서가 무사하게 마무리 되었다.
  • 여선우는 몰래 숨을 작게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던 그때, 잠깐 큐시트를 확인하던 그녀의 귀에 한 여기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 대표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여 대표님께서 자신이 스폰하고 있는 젊은 남성을 본인 회사에 취직시키기 위해 기존의 고참 직원을 해고 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 현장에 있던 선우 그룹 직원들의 낯빛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 “저 사람 누구야? 지금은 질문 타임이 아닌데 갑자기 어디서 무례한 질문을.”
  • 몇몇 경호 인원들이 나서며 여기자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경호팀장 곽휘용이 제 부하들을 막았다.
  • “제 물음에 답해 주십시오, 여 대표님.”
  • 여기자가 포기를 모르고 계속해서 질문했다.
  • 기타 매체들이 카메라를 여선우의 얼굴에 맞추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 아무렴 선우 그룹의 신제품보다야 미녀 대표의 사생활 폭로가 더 그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여선우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답했다.
  • “오늘 발표회 내용이랑 전혀 상관 없는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다.”
  • “상관 없다뇨?”
  • 이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유지빈이 차가운 웃음과 함께 들어섰다.
  •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하선철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들어온 그는 두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으며 한 쪽 팔도 붕대로 싸여 목에 걸려 있었다.
  • 경호팀장 곽휘용은 두 사람의 난입에도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나서서 하선철의 휠체어를 밀어주었다.
  • 눈치 빠른 기자 하나가 마이크를 유지빈의 입가에 갖다댔다.
  • “죄송하지만 선우 그룹과 어떻게 되는 분이시죠?”
  • “제가 바로 여 대표님한테 잘렸다는 그 고참 직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