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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보라색 번개

  • 여선우는 전례 없이 당황했다. 당황한 와중에도 그녀가 느낀 것은 비교할 데 없는 수치스러움이었다.
  • 육은성이 정의롭게 나서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온 순간부터 여선우는 이미 그에 대해 새롭게 인식이 바뀐 참이었다.
  • 자신의 동생이 아니더라도 상대와 친구로 지내도 괜찮겠다는 마음에 말을 걸었던 것이 이렇게 참패를 당할 줄이야.
  • 여선우는 늑대 무리에서 빠져나왔더니 바로 다음 순간 호랑이굴에 떨어진 것 같은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 몸을 뒤틀며 일어서려던 그녀는 불현듯 시선 안으로 파고든 무언가 때문에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 육은성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는데, 바로 그의 대퇴부 안쪽에 태어났을 때부터 갖고 자란 흉터 하나가 있다는 것이다.
  • 그게 바로 번개 모양의 보라색 모반이었다.
  • 보육원에 있었던 아이들은 거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물론 육은성의 일곱 누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 그랬기 때문에 여선우는 선명히 보이는 보라색 번개를 보자마자 눈 앞의 청년이 그녀가 15년 동안이나 오래 떨어져 살았던 동생 육은성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 “은성아, 정말 은성이구나. 네가 육은성이었어. 누나는, 누나는 진짜로 다시는 널 볼 수 없을 줄 알았어.”
  • 어깨를 누르는 힘이 사라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여선우는 와락 육은성을 품에 안으며 무너져내린 뚝처럼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 육은성도 코가 시큰해나는 것을 느꼈다.
  • 안 변했어.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구나. 그가 기억하던 큰 누나는 여전히 그 큰 누나였다.
  • 15년이라는 세월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 멀어지게 만든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친밀하게 이어줬다.
  • 크게 감동한 육은성은 남은 평생을 누나를 보호하는 데 온힘을 다할 거라 몰래 다짐했다.
  • ‘그나저나 뭔가가 좀 썰렁한 기분이 드는데?’
  • 육은성은 곧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 “누나, 나 바지 먼저 좀 제대로 입을게.”
  • “……”
  • 발갛게 물들었던 얼굴이 빠르게 진정되며 곱게 흘긴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 “부끄러울 게 뭐 있어. 누나가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 “그게 아니라, 여기에 다른 사람도 있잖아.”
  • “아!”
  • 짧게 탄식한 여선우는 그제야 이곳에 둘만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 재빨리 쓰러진 하선철에게로 다가가 그가 아직 기절해 있음을 확인한 그녀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하선철은 제가 얼마나 값진 장면을 놓쳤는지 아마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 포르쉐 911에 다시 시동이 걸렸다.
  • 이번에 운전석에 앉은 건 여선우였고, 육은성이 조수석을 차지했다.
  •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당연하게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 그중 여선우가 제일 궁금해한 건 육은성이 어떻게 15년 전 그 화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였다.
  • 그리고 15년 동안 그에게 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말이다.
  • 육은성은 차근차근 그녀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물론 그가 5년이나 전쟁터를 누볐다는 얘기는 빼고, 그저 15년을 산에서 늙은 도사 따라 수련을 했었노라, 라고만 대답했다.
  • 얘기를 다 들은 여선우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눈을 흘겼다.
  • “무슨 신선 같은 얘기나 하고 앉아있어 지금.”
  • 그녀는 당연히 이 터무니 없는 스토리를 믿지 않았다.
  • 솔직하게 말했는데도 믿어주지 않으니, 육은성으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 다행히도 여선우는 계속해서 캐묻지 않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 “네 다른 누나들도 네가 살아있는 걸 알게 되면 다들 무슨 반응일지 너무 궁금해. 그것도 이렇게 잘생긴 청년으로 말이야.”
  • “하하, 일단은 비밀로 해줘.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싶으니까.”
  • “으이그, 이 개구쟁이야.”
  • 두 사람의 얼굴에 약속이나 한 듯 웃음이 떠올랐다.
  • 운전 내내 수다를 떨었더니 시간이 날개 돋친 듯 빠르게 지나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선우 그룹에 도착해 있었다.
  • 여선우와 육은성이 웃고 떠들며 선우 빌딩으로 들어서던 순간, 1층 라운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런 두 사람을 쳐다봤다.
  • 그들이 우스개 소리로 빙산의 여신이라 일컫던 여 대표가 글쎄 처음 보는 남자와, 처음 보는 다정한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 수많은 남정네들의 심장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오늘밤 잠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사람이 꽤나 많아 보였다.
  • 회사로 돌아온 여선우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인사팀 부장 유지빈을 찾아가 그에게 해고를 통보한 일이었다.
  • 그게 바로 여선우의 일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녀는 종래로 결정을 질질 끄는 법이 없었다.
  • 인사팀 부장직이 공석이 되자 여선우는 육은성을 향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 “육은성, 부장 자리에 흥미 있어? 한 번 내 밑으로 입사해서 일 해 볼래?”
  • 육은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됐어. 나 회사 관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걸.”
  • 천합의 왕이자, 팔방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36명의 신의 장수들을 거느린 운천신군인 그이지만, 그것들은 회사 관리와 별개의 것들이었다.
  • 천합을 관리함에 있어 강력한 무공만 있으면 되지만, 회사를 관리함에 있어 수많은 규칙 제도를 따라야 하는 게 다른 점이었다. 그리고 육은성은 그런 것들에 능숙하지 않았다.
  • 여선우는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 “괜찮아. 그냥 일단 앉아만 있고, 나중에 모르는 게 있으면 고 비서가 알려줄 거야.”
  • 고 비서란 여선우의 비서 고안별을 가리키는 말로, 두 사람의 사이는 아주 가까웠다.
  • 회사에서는 엄격하게 상사와 직원으로 서로를 대하지만 사석에서는 둘도 없는 좋은 친구였다.
  • 여선우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거절하기도 뭐해 육은성은 일단 알겠다며 대답했다. 나중에 가서 아닌 것 같으면 그때 다시 물러나면 그만이지라는 생각에서였다.
  •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고안별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 육감적인 몸매, OL 제복에 탄탄해 보이는 허벅지를 검은색 스타킹으로 감싼 스물 대여섯 살 돼 보이는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핑크색 테의 안경은 고안별의 눈물점을 아슬아슬하게 가리며 묘한 섹시한 분위기를 풍겼다.
  • 선우 그룹에서 여선우 다음으로 미녀라 불리는 칭호에 걸맞는 상당한 미녀였다.
  • 육은성은 그저 스치듯 그녀를 쳐다봤을 뿐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마음 속에는 그 어떠한 여인도 그의 일곱 누나들보다 못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 “고 비서, 마침 잘 왔네요. 여기 소개시켜 드릴 사람이 있어서요.”
  • 여선우가 웃으며 말했다.
  • “이쪽은 제 동생 육은성이에요. 지금 마침 인사팀 부장 자리가 비어서 제 동생을 앉힐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죠?”
  • 그녀의 시선을 따라 육은성을 힐긋 쳐다본 고안별의 표정이 의미심장하게 변해갔다.
  • 아까 밖에서 여선우가 어디서 기생오라비 같은 남자 하나를 데리고 왔다며 동료들이 수군거릴 때, 사실 고안별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더랬다.
  • 여선우의 눈이 얼마나 높은지 잘 알기에 웬만한 사람은 그녀의 눈에 들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소문의 남자를 직접 대면한 순간, 고안별은 여선우가 완전히 타락되어 버렸음을 이제 믿을 수 있었다.
  • “여 대표님, 이런 말씀 감히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 두 사람의 사이가 좋다 하더라도 회사에서 만큼 고안별은 눈치 있게 여선우를 여 대표님이라 불렀다.
  • 여선우는 웃으며 답했다.
  •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어딨어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그냥 하시죠.”
  • 고안별은 콧등에 걸친 안경을 위로 한 번 들추더니 서론을 뗐다.
  • “제가 생각하기에 회사 상장 전에는 관리층 인사변동이 없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인사팀 부장 자리는 비었으면 비었지 여기 계시는 육은성 씨에게 일임하는 게 좋지 않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 “그래요? 이유는 무엇이죠?”
  • 잠시 생각하던 고안별이 대답했다.
  • “대중들의 시선 때문이죠.”
  • “고 비서도 육은성 씨를 제가 스폰하고 있는 술집 기생오라비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죠?”
  • 똑똑한 사람을 꼽으라면 여선우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녀는 즉시 고안별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챘다.
  •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회사 상장 전, 그룹의 대표 여선우가 술집에서 만난 남자에게 일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기존의 오래된 직원을 잘랐다는 소문이 돌게 되면 회사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 분명했다.
  • 여선우라고 그 도리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해명하는 대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 “어쨌든 오늘부터 육은성 씨는 저희 회사 인사팀 부장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으니까, 고 비서는 시간 되면 육은성 씨를 데리고 회사 구경을 먼저 시켜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