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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파산 위기의 고지헌?

  • 성하월은 미소를 돌려준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대표실 문 앞까지 곧장 다다르자 안쪽에서 건들건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리엘 디자이너님이 도착하신 건가요?”
  • “!”
  • 나윤주와 성하월은 대표실 문밖에 얼어붙었다. 두 사람은 직접 문을 열고 마중 나온 심찬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서로 놀란 시선을 주고 받던 그때, 성하월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건넸다.
  • “안녕하세요, 심 대표님. 에르문의 책임자 리엘이라고 하고요, 본명은 성하월입니다.”
  • 심찬은 성하월과 악수를 하는 와중에도 나윤주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그럼 이쪽은…”
  • 성하월이 대답했다.
  • “제 어시스턴트입니다.”
  • 심찬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안쪽에 있는 사람을 골렸다.
  • “아이고, 몰랐는데 형 설마 파산 위기야?”
  • 나윤주는 그의 시선을 따라 안을 쳐다봤다가 문과 등진 소파 자리에 앉아있는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그저 옆모습일 뿐이지만 나윤주는 한눈에 고지헌을 알아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비죽였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나윤주는 가정법원에서 못 만난 사람을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을 생각지도 못했다.
  • 고지헌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는 눈빛으로 나윤주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 심찬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웃었다.
  • “성 대표님,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안쪽으로 드시죠.”
  • 나윤주는 티나지 않게 시선을 거두고는 열심히 어시의 역할에 몰입해 성하월의 뒤를 따랐다.
  • 우림 엔터와 에르문의 협업은 사실상 거의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로 이제 두 대표의 마지막 결정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성하월은 리엘 본인이 아니지만 몇 년간 나윤주의 절친으로 있으면서 그녀의 디자인 이념과 장점에 대해 막힘없이 줄줄 읊을 수 있었기에 상대방의 질문이 두렵지 않았다.
  • 시간이 빠르게 흘러 사인할 때가 오자 심찬은 어쩐 일인지 계약서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웃어보였다.
  • “성 대표님, 사인은 급할 거 없습니다. 그전에 사실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 제 친구가 리엘 디자이너님께 드레스 한벌을 단독으로 주문제작 맡기고 싶어하거든요. 이건 계약에 미포함된 별도의 요청으로 가격은 마음대로 부르셔도 되고, 다음달 저희 회사에서 주최하는 파티가 열리기 전까지 만들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커다란 사무실 안에 심찬을 제외하고는 고지헌 한 명뿐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가 말한 친구가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 겉으로 옅게 웃어 보인 성하월은 속으로 연신 육두문자를 날렸다.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녀는 예의바르게 거절의 말을 꺼냈다.
  • “심 대표님, 사실 제가 최근에 남편을 잃어서 디자인을 그려낼 수 있다고 해도 그게 심 대표님 친구분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 같아요. 괜히 좋은 일에 초를 쳐서 두분의 우정에 폐를 끼치면 안 되잖아요.”
  • 말을 마친 성하월은 망설임 없이 계약서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 “심 대표님께서 아직 고려할 시간이 필요하신 것 같으니 계약서는 일단 가져가겠습니다. 저 다른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 “저기!”
  • 심찬은 손을 뻗으며 만류하려 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작은 제안을 하나 했을 뿐인데 두 사람은 전혀 남을 생각이 없는지 바람처럼 그대로 문을 나섰다. 겨우 약속을 잡은 리엘을 눈앞에서 놓치자 의심 담긴 시선이 맞은편의 고지헌에게로 향했다.
  • “어라? 형수님이 리엘 씨 어시면 왜 형수님한테 직접 부탁 안 했어?”
  • 굳이 자신을 통해 길을 멀리 돌아갈 필요 있냐는 듯 심찬이 물었다.
  • “혹시 두 사람 다퉜어?”
  • 심찬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아닌데, 아까 나 회사 밑에서 형수님 만났거든? 내 차를 들이박고 형 이름 대면서 분명 눈을 반짝였는데.”
  • 돈을 물지 않아도 될 생각에 반짝인 거겠지. 고지헌은 심찬을 싸늘하게 쳐다봤다.
  • “네 아버지가 너한테 사업을 물려주지 않은 게 정확한 선택이었어.”
  • 정말로 넘겼다간 언젠가 그의 손에서 사업이 망할 게 분명했다.
  • 고지헌은 말을 마친 뒤 외투를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 -
  • 나윤주는 우림 엔터를 나오면서 재채기를 심하게 했다. 아무래도 안쪽에 남은 두 사람이 그녀를 험하게 씹어대고 있는 모양이었다. 찔끔 나온 눈물을 닦고 있는데 성하월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혀를 찼다.
  • “고지헌 그놈은 대체 뭐하는 새끼야. 너랑 아직 이혼 도장 찍은 것도 아닌데 선을 너무 넘잖아. 야, 이혼 잘 했어. 저런 쓰레기랑은 하루빨리 선을 긋는 게 나아.”
  • 괄괄한 성격의 성하월은 절대 욕을 대충하는 법이 없었다.
  • “어디서 와이프한테 세컨드가 입을 드레스를 맡겨.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배효민이 네가 만든 드레스를 입을 자격이나 돼?”
  • 우림 엔터라는 엄청난 거래처를 잃자 성하월은 배를 가득 채운 분노를 고지헌 까는 데에 모두 풀었다.
  • 나윤주는 쓴웃음을 삼켰다. 성하월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게 그녀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으로써 제일 급한 건 최대한 빨리 고지헌과 이혼하는 것이었다.
  • “일단은 빨리 여길 뜨자. 이따가 심찬 씨가 쫓아와서 차 수리값까지 물어내라고 하면 그거야말로 최악의 결말이다.”
  • 나윤주는 현 상황을 이성적으로 분석했다.
  • “상대방이 시발놈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우리도 똑같이 시발놈처럼 굴 필요 없지.”
  • 나를 방패막이로 삼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쓰레기 취급까지해?
  • 뒤이어 나왔다가 그녀의 마지막 말만 들은 고지헌이 단번에 얼굴을 검게 물들였다.
  • 나윤주와 성하월은 고지헌의 출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주고받으며 빠르게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차에 시동을 걸고 결단력 있게 현장에서 도망쳤다.
  • 운전을 하면서도 성하월은 여전히 씩씩거렸다.
  • “아참, 나 우림 엔터에서 주최하는 파티 초대장 얻었거든? 나중에 나랑 같이 가. 고지헌이 너 그렇게 괴롭히는데 나라도 가서 그 사람이랑 그 세컨드 낯짝을 두드려 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