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청렴하게 살아온 나윤주의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들을 이유가 하등 없었다. 아이는 그녀 혼자가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지헌이 협조해야 애를 가지든 말든 할 거 아닌가? 나윤주는 두 사람을 뒤로하며 씁쓸해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나윤주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속상한 마음을 감추며 얌전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고지헌의 할아버지 고성철이 제 안사람을 호통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애들이 어쩌다가 집에 들른 건데 아이 얘기는 그만해.”
황인숙이 그를 반박하고 나섰다.
“당신은 증손주 보고 싶지 않아요?”
고성철은 말머리를 아예 돌려버렸다.
“윤주야, 듣자하니 요즘 세간에 안 좋은 소문이 돌아다니고 있다 하던데 넌 무슨 생각인 게냐?”
나윤주는 전과 같이 예의바르게 굴었다.
“지헌 씨가 알아서 잘 대처할 거라 전 믿어요.”
고성철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밖에서 뭐라고 하든 우리 고 씨 집안에 손주며느리는 너 하나뿐이다. 급이 맞지 않는 것들은 우리 가문에 한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할 것이야.”
황인숙이 틈을 놓치지 않고 또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윤주 너도 서둘러서 아이를 낳아야 돼. 그럼 우리 지헌이도 알아서 집에 들어온다니까?”
고성철이 또 호통 칠 것처럼 낯빛을 바꾸자 황인숙은 얼른 제 선에서 말을 끊었다.
“아유, 알겠어요. 얘기 안 하면 될 거 아니에요. 윤주야, 오늘 저녁은 여기 본가에서 자고 가. 할머니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갈비탕을 끓여놨어.”
나윤주는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으나 황인숙은 이미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한 뒤였다.
단호했던 고성철의 눈빛이 부드럽게 바뀌면서 그녀에게로 향했다.
“네 할머니 얘기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안사람도 다 너랑 지헌이가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저렇게 말하는 거야.”
나윤주는 담담히 대답했다.
“네. 저도 알죠.”
얌전한 그녀의 모습에 고성철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흘렸다.
“네 할머니는 요즘 어떠시더냐?”
그녀의 친할머니 얘기가 나오자 나윤주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환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건강히 잘 계세요.”
“아직도 인천에 올라오기 싫다셔?”
재차 물어오는 고성철에 잠시 멍 때리던 나윤주가 입을 열었다.
“시골에서 사는 게 익숙하셔서 도시가 너무 시끄럽대요. 그래서 제가 마을 분들한테 할머니 잘 부탁드린다고 얘기 다 해놨어요.”
고지헌의 할아버지와 나윤주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서로 오랜 친분이 있었다. 할머니가 오늘 닭 사료를 몇 번 먹였는지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나윤주가 할머니의 사소한 신변 소식들을 조곤조곤 얘기하는 모습에서 고성철은 그녀가 얼마나 집안일에 열성을 다하는 지를 알 수 있었다.
고성철은 나윤주의 얼굴에서 다른 사람의 얼굴을 투영해 보았는지 그리운 얼굴을 했다.
“나덕수 그 양반도 윤주 너 같은 손녀를 두었으니 참으로 복이 많구나.”
나윤주는 잠시 멈칫하다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클 수 있어서 복 받은 걸요.”
고성철은 그 뒤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저녁식사 후, 고지헌과 나윤주는 안방으로 동시에 향했다. 신혼 첫날밤 이후로 두 사람이 본가에서 취침을 결정한 건 오늘이 두 번째였다. 불편한 마음에 나윤주가 삐걱거리고 있는데 고지헌이 먼저 침묵을 깼다.
“할머니 어제 건강검진 다녀오셨는데 심장이 조금 안 좋게 나왔대. 오늘 남겠다고 해줘서 고마워.”
나윤주는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그저 끄덕였다.
“아니에요.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뭐.”
40억이 걸려있는 만큼 나윤주는 모든 걸 그에게 협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디에서 자나 잠은 다 똑같다며 스스로 세뇌한 그녀는 먼저 방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처음부터 그들의 신혼방으로 꾸며졌는데 원래는 차가운 톤의 블랙 앤 화이트로 심플하게 인테리어 되었던 곳이 지금은 바닥에 부드러운 카펫도 깔리고, 또 방 한가운데 자리한 탁자 위에 올려진 팔목만한 캔들로 인해 좀 더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나윤주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그녀의 뇌리속에 두 사람의 첫날밤이 저절로 재생되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촛불이 흔들리는 밤이었다. 나윤주는 신혼 첫날을 고지헌과 서로 조심스러워하며 아무일 없이 보낼 줄 알았었다. 그러나 나중에 어떻게 된 일인지 두 사람은 한데 뒤엉키기 시작했고 그 일로 꽤 오랜 시간을 고지헌은 그녀한테 약을 쓴 게 아니냐 의심하며 그녀를 본체만체 했었다.
사실 나윤주는 이 방에 대한 기억이 그리 좋지 못했다. 처음 관계를 가졌을 때의 통증에 대한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고지헌은 그날밤 미친 사람처럼 온밤을 그녀에게 매달렸었다.
나윤주는 눈을 감고 정서를 차분히 다스렸다. 그러고는 뒤돌아서 방을 나서며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한테 방을 하나 더 준비해달라고 할게요.”
고지헌의 미간이 구겨졌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우리가 각방을 쓴다고 자랑할 일 있어?”
뜨거운 열기가 미친듯이 머리끝으로 용솟음치는 것 같은 기분에 나윤주는 크게 숨을 몇 번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하다 쌀쌀하게 대답했다.
“그럼 우리 따로 자요. 지헌 씨가 소파에서 쉬어요.”
고지헌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의 말투에는 불쾌한 기운이 역력했다.
“왜 내가 소파에서 자야 돼? 내가 따로 자자고 제안한 거 아니잖아.”
“……”
그래, 내가 소파에서 자고 말지. 고지헌 본인이 배효민이 질투하든 말든 상관 안 하는데, 그녀가 괜히 몸을 사릴 이유가 딱히 없었다. 어차피 하룻밤만 버티면 되는 거라 나윤주는 반박하지 않았다.
한편 두 사람의 침실 밖.
“내가 말한 거 넣었어?”
황인숙은 장미선이 들고 있는 트레이를 가리키며 작게 물었다.
“네. 말씀하신 양대로 넣었습니다. 임신하더라도 아이한텐 문제 없을 양입니다.”
장미선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춘 채 대답했다.
“그런데 사모님, 이러는 거 안 좋지 않을까요?”
“안 좋을 게 뭐 있어. 임신하면 윤주한테 좋은 점밖에 더 있겠어? 이래도 임신이 안 되면 앞으로도 임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겠지. 그럼 나도 미리 준비를 해야 될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