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다음 화
미워할 용기

미워할 용기

판다내꺼

Last update: 2024-05-08

제1화 우리 이혼해요

  • “네 남편 바람났어.”
  • 나윤주가 절친 성하월한테서 문자를 받았을 땐 마침 과배란 주사를 맞고 뻐근한 배를 그러안은 채 진료실 밖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때였다.
  • 윤기 나는 검은 머리에 매끈한 피부, 보기 좋은 계란형 얼굴이 통증으로 인해 창백하게 질렸음에도 그 화려한 미모에 점수가 깎이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었다.
  • 나윤주는 크게 숨을 들이쉰 후 떨리는 손으로 친구가 보내온 사진을 터치해 크게 확대했다. 사진에는 고지헌이 핑크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을 안고 호텔에서 나오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평소 남들에게 딱딱한 인상을 심어주기 십상인 남자의 얼굴 윤곽이 사진에서는 고개가 숙여져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 나윤주는 화면 속 여인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지헌의 첫사랑인 배효민이었다.
  • 정신을 다잡은 나윤주는 연락처를 열어 고지헌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한참을 울리고 난 후에야 남자의 차가운 음성이 흘러들었다.
  • “왜?”
  • “오늘 저녁에 올 거예요?”
  • 사실 나윤주가 묻고 싶은 건 오늘 오긴 올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 그녀의 전화가 상대방을 방해한 모양이었다. 고지헌은 몇 초간 침묵하다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
  • “그게 그렇게 당장 물어봐야 될 정도로 급한 용건이었어?”
  • 싸늘한 그의 대꾸에 나윤주의 두 눈이 일순 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입을 여는 그녀의 음성에는 상처 받은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 “오늘 무슨 날인지 까먹었죠?”
  • 나윤주와 고지헌은 결혼 3년차 부부였다. 그리고 오늘은 그들의 3주년 결혼기념일이자 고지헌이 집에 들르기로 되어 있는 고정 날짜였다.
  • 수면 위로 드러낼 수 없는 은혼(隐婚)을 한 3년 동안, 두 사람은 매달 의례적으로 만나 잠자리를 가진 것 외에는 서로 만나는 일조차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지난달 그 의례적인 잠자리를 가진 후 고지헌은 나윤주에게 오늘 반드시 그녀와 함께하겠노라 약속했었다.
  • 고지헌은 여전히 짜증이 가시지 않은 말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 “늦게라도 갈 거니까 걱정 마.”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가 뚝하고 끊어졌다.
  •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통화종료음을 들으며 나윤주는 심장이 바닥끝까지 곤두박질 치는 기분을 느꼈다. 고개를 들고 깊은 숨을 몇 번 들이쉬며 마음을 추스른 후에야 그녀는 성하월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데리러 와 줄 것을 부탁했다.
  • 10분 후, 병원 복도에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쿨톤의 네이비색으로 염색한 똑단발에 군데군데 실버 색상으로 브릿지를 넣은 머릿결이 여자의 발걸음과 함께 멋들어지게 휘날렸다. 자신한테 쏟아지는 사람들의 신기한 시선에도 성하월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바삐 걸음을 옮기다 나윤주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들썩였다. 그녀는 친구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 나윤주의 앞에 선 성하월은 눈앞의 헬쓱해진 얼굴을 보며 가슴이 아파 결국 참지 못하고 작게 불만을 터뜨렸다.
  • “네 남편, 배효민인가 뭔가하는 그 여자랑 그렇게까지 나오는데 넌 여기서 과배란 주사나 맞고 있고, 이게 대체 다 무슨 소용이야?”
  • 나윤주는 고개만 숙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 그녀와 고지헌의 혼인은 처음부터 고지헌의 할아버지인 고성철이 억지로 이어준, 고지헌의 개인 감정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일방적인 혼인이었다.
  • 처음 결혼 제의가 들어왔을 때 나윤주는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속으로 몰래 기쁨의 환호를 질렀었다.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사실 나윤주는 혼자서 고지헌을 몇 년간 짝사랑해 왔었다.
  • 그렇게 결혼식을 올린 후에야 나윤주는 고지헌에게 첫사랑 상대가 있었으며 그녀의 이름이 배효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배효민의 가정배경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고성철이 나윤주에게 제 손자와의 결혼제의를 했고 그녀를 방패막이로 삼았던 것이다.
  • 나윤주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었던 고지헌은 두 사람의 결혼사실을 비밀로 했고, 3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들의 혼인은 소위 말하는 은혼 상태를 계속 유지했다.
  • 나윤주는 고지헌의 선택에 대해 한 번도 불평을 품은 적이 없었다. 자신이 열성을 다한다면 언젠간 차갑게 얼어붙은 그의 마음을 녹여, 고지헌이 첫사랑은 잊고 자신과 함께 마음을 다잡고 생활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효민이 또다시 출현한 오늘, 나윤주는 그제야 자신이 여태까지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깨달았다.
  • 집에 돌아온 나윤주는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나와 침대 위에 미리 준비해 놓은 야한 속옷 세트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오늘이 마지막이야.
  • 나윤주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녀에게 있어서든, 고지헌에게 있어서든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 한밤중, 나윤주는 허리에서 느껴지는 약간은 차가운 감촉에 잠에서 깨어났다.
  • 물기를 머금은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안으며 태워버릴 것 같은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귓가에 연신 쏟아졌다. 깜짝 놀란 나윤주가 본능적으로 반항하려고 다리를 뻗자, 눈치 빠른 고지헌이 그녀의 발목을 움켜쥔 채 양쪽으로 내리 누른 동시에 그녀의 다리 사이에 야릇한 자태로 자리를 잡았다.
  • 아직 잠기가 채 가시지 않은 눈동자를 깜빡이던 나윤주는 그제야 상대방의 정체를 깨닫고는 팔을 뻗어 남자의 목에 감고 고개를 들어 그의 상체에 몸을 붙였다.
  • 고지헌의 시선이 그녀의 차림새를 따라 천천히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내려갔다. 원래도 뜨거웠던 호흡이 끝을 모르고 열기를 더해갔다.
  • “나한테 오냐고 물어본 게 이거 때문이었어?”
  • 나윤주의 몸이 부자연스럽게 흠칫 굳었다. 곧바로 웃는 얼굴로 돌아온 그녀가 입을 열었다.
  • “네. 새로 연구해 낸 자세가 있거든요.”
  •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시간 동안 적극적인 쪽은 언제나 나윤주였다. 과배란 주사, 푹 곤 각종 탕들, 심지어 잠자리를 가질 때 자세까지, 임신을 하기 위한 것이라면 나윤주는 모든 걸 시도해 보려고 노력했다.
  • 지금 이 상황이 아이를 가지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고지헌은 계속 이어나갈 흥미를 잃었다. 그녀를 품에서 떼어낸 고지헌은 침대맡 탁자 위에서 물티슈를 찾아 한 장 뽑아내고 천천히 손을 닦기 시작했다.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한 듯 뼈마디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느긋하게 닦은 후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고지헌이 차가운 얼굴을 했다.
  • “고작 이거 때문에 효민이한테 사람 붙였어?”
  •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 잠시 의아한 표정을 한 나윤주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두 사람의 사진을 폭로한 파파라치를 가리켜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 고지헌의 물음은 그녀가 한 게 맞는지 떠보는 말이기도 했지만 사실상 이미 확신하는 말투에 가까웠다.
  • 뭐야, 결국 오늘 여기 온 것도 애인을 위해 따지러 온 것이었네? 나윤주는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식는 것을 느꼈다.
  • 잠시 침묵을 지킨 그녀는 몸을 일으켜 한쪽에 벗어둔 잠옷 치마를 아무렇게나 입었다. 방금 전 침대 위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던 매혹적인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어느새 무표정이 자리한 얼굴이 대체했다.
  • “네. 전여친과 당당하게 만나고 다니면서 프라이버시를 요구하는 모습이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파파라치만으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요. 음란죄로 경찰에 신고하려던 걸 참은 거니까. 정말로 고소했으면 당신과 같은 호적에 이름을 올린 나도 덩달아 쪽팔렸겠죠.”
  • 평소에 얌전하기만 하던 나윤주가 따박따박 쏘아붙이자 고지헌은 잠시 멍을 때렸다. 역시 여태까지 본성을 꽁꽁 잘도 감췄구나. 이마에 핏줄이 툭 불거진 고지헌이 대번에 그녀를 밀어젖혔다.
  • “너의 그 더러운 생각들로 효민이를 더럽히지 마. 걔는 너랑 달라.”
  • 고지헌의 눈에 나윤주는 언제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끝까지 더러워질 수 있는 사람이었고 배효민은 한결같이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3년이라는 시간을 바쳤지만 결국 나윤주는 배효민의 눈빛 한 방조차도 못한 존재였다.
  • 나윤주는 그를 좋아한 세월이 진심으로 부질없게 느껴졌다. 좀 더 젊었을 때라면 이런 형편없는 남자를 주먹 한 방으로 바로 보내버렸을 텐데, 여태까지 보물처럼 그를 받들어 모신 자신이 나윤주는 한심하게 느껴졌다.
  • 잠깐의 침묵 후 나윤주는 턱을 쳐들고 티 나지 않게 눈썹을 들썩였다.
  • “우리 이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