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물어낼 생각을 하니 성하월은 마음이 아파 표정이 다 일그러졌다. 나윤주는 그녀 대신 기어를 중립으로 넣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린 뒤 차 문을 열어 내릴 준비를 했다.
“내가 내려가 볼게.”
슈퍼카 주인도 이미 차에서 내려와 있었다. 남자는 190이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얼굴을 절반이나 가리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우뚝 선 콧등과 지나치게 붉은 입술을 자랑했다. 나윤주를 발견한 그는 껍을 씹던 것을 잠시 멈추더니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혹시 저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요? 낯이 많이 익은데.”
나윤주도 남자가 어딘가 익숙한 것 같은 기분에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제야 남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봤다. 그는 고지헌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제일 친한 심찬이었다.
고지헌과 심찬은 어려서부터 바지 한 쪽을 같이 나눠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나윤주는 그를 본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그게 2년 전 일이었다. 그때 고지헌이 술에 취하는 바람에 나윤주가 그를 데리러 갔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녀는 심찬과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더랬다.
나윤주의 시선이 눈 뜨고 봐 주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이 된 슈퍼카 헤드에서부터 심찬의 얼굴까지 재빨리 한바퀴 배회했다. 그녀는 미소를 씨익 지었다.
“심찬 씨?”
멈칫한 심찬은 선글라스를 위로 밀어올리고 여우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저희 본 적 있는 거 맞죠?”
“저 나윤주라고 합니다.”
심찬은 열심히 몇 초간 생각하더니 그제야 나윤주가 누구인지를 떠올려내고는 저도 모르게 몸을 곧게 폈다.
“형수님…”
나윤주는 더 이상의 해명 대신 슈퍼카 헤드를 힐끔 쳐다봤다.
“저 사고는 어떻게 할…”
심찬은 손뼉을 짝 치더니 얼른 그녀의 말을 뺏어 했다.
“다 제 탓이에요! 제가 급하게 누굴 만나러 오느라 주차자리를 뺏으려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겼네요.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보험처리 할게요.”
나윤주는 작게 미소지었다.
“알겠어요. 수리값 나오면 지헌 씨한테 청구하시면 돼요.”
“뭘 이런 걸로. 아니에요, 형수님. 그저 가던 길 마저 가시면 돼요.”
심찬이 얼른 대답하자 나윤주는 가볍게 눈인사를 한 뒤 곧장 뒤돌아서서 제 차로 돌아갔다. 조수석에 올라 아직까지도 식은땀을 흘리며 멍한 눈을 하고 있는 성하월을 향해 그녀가 다그쳤다.
“넋 놓고 뭐해, 빨리 저기 맞은편 쇼핑몰 주차장으로 차를 몰아.”
“아, 그렇지.”
차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모조리 들은 성하월이 확신이 서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너 저 사람 바로 고지헌 씨한테 이를까 봐 걱정 안 돼?”
“그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봐야지. 일단은 오늘 오후까지만 무사히 넘길 수 있으면 돼.”
나윤주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했다.
“아니면 방금 그 자리에서 3시간이나 물고 늘어져 봐. 돈도 물어내야 되고 장사도 날려야 되잖아.”
어차피 고지헌과 심찬의 친분으로 이 정도 돈은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잠시 침묵한 나윤주가 성하월을 향해 당부했다.
“이따가 우림에 들어가면 네가 리엘이고 내가 네 어시인 거야.”
성하월이 이해되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왜? 기껏 쌓은 공로를 왜 나한테 넘길려고 그래?”
나윤주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너 바보야? 만일 방금 심찬이 우림을 찾아온 거였으면 내가 리엘인 걸 알게 되면 지헌 씨 귀에 들어갈 거 아냐.”
리엘이 남편을 잃고 수절을 지키고 있는 중이라고 대외적으로 말했던 터라 만약 고지헌이 나윤주가 리엘인 걸 알게 된다면 그녀를 죽이려고 들지도 몰랐다.
“……”
두 사람은 우림 엔터의 맞은편에 있는 쇼핑몰 주차장에 차를 대고, 그 뒤로 또 한참을 질질 끈 뒤 3시가 돼서야 설마하니 재수없게 다시 심찬과 마주칠 일은 없겠지하고 우림 엔터로 향했다.
프런트 데스크의 안내원은 두 사람이 에르문에서 왔다고 하자 저도 모르게 여러번 그들을 힐끔거리며 작게 물었다.
“혹시 리엘 디자이너님이신가요?”
성하월은 거짓말을 하려니 속이 켕겨 선글라스를 사서 꼈기 때문에 표정을 숨길 수가 있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일부러 깔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