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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수절하느라 시간 없습니다

  • 멸시가 섞인 음성에 나윤주의 미간이 툭하고 튀어올랐다.
  • 배효민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피팅할 시간은 많고 이혼을 위해 고작 20분을 기다려 달라는 건 짜증난다 이건가? 좋게 좋게 해결보려고 먼저 자리를 내주기로 한 게 나윤주는 비참하게 느껴졌다.
  •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숨을 크게 들이쉬는데 전화 너머로 문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예감이 그녀의 머리를 때렸다.
  • “지헌 씨 지금 가정법원에 아예 안 간 건 아니죠?”
  • 고지헌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 “사람들이 다 너처럼 앞뒤 언행이 안 맞는 줄 알아?”
  • 나윤주는 그가 약속장소에 아예 가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 “그럼 가정법원 대문이 보이게 사진을 찍어서 저한테 보…”
  •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지헌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휴대폰을 내팽개친 나윤주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 “빌어먹을!”
  • 성하월은 그녀의 몸에 반쯤 밖에 안 걸쳐진 옷을 마저 입혀주며 똑같이 거침없이 욕했다.
  • “또 무슨 난리래?”
  • 나윤주는 여전히 씩씩거렸다.
  • “낸들 알아! 난 지각한 거고, 자기는 아예 가지도 않았으면서 지가 성질을 부리잖아.”
  • 이중잣대를 시전하는 고지헌의 태도에 나윤주는 어이가 없었다.
  • 그때 성하월의 휴대폰에 메시지 도착 알림음이 울렸다. 휴대폰을 켜고 메시지를 확인한 그녀는 경멸하듯 눈을 흘기더니 나윤주에게 그대로 화면을 보여주었다.
  • “고지헌이 거금을 들여서 너랑 모레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대.”
  •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고지헌은 리엘과의 만남을 요청했다.
  • 개자식, 20분도 시간 내기 어렵다더니 뒤돌자마자 리엘과 약속을 잡을 땐 시간이 바로 넘쳐나는 거야 뭐야. 나윤주는 휴대폰을 박살낼 것처럼 힘을 부들부들 주었다.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지금 과부가 돼서 수절하느라 시간 없다고 그냥 까버려.”
  • 나윤주는 지금 머릿속에 온통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 이혼하자! 당장 고지헌과 이혼하는 거야!
  • 성하월은 톡톡 자판을 두드려 그녀의 말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그대로 어시한테 전송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내린 뒤 바로 분석에 들어갔다.
  • “내가 보기엔 고지헌이 배효민이 입을 드레스를 위해 널 만나려는 것 같거든? 다음달에 우림 엔터테인먼트에서 파티를 개최하는데 배효민도 거기 초대명단에 들어있다고 들었어. 이번 파티는 꽤나 프라이빗하게 진행된다던데 고지헌이 배효민을 명단에 올리려고 아마 돈을 엄청 썼을 거야.”
  • 이미 마비 되어서인지 나윤주는 생각보다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놀랍지 않다는 듯 입가를 끌어올렸다. 파티 참석도 모자라 리엘이 제작한 드레스까지 입혀 보내려 했으니 거금을 들였을 건 뻔했다.
  • 성하월은 그녀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성질을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힘껏 내려쳤다.
  • “너 진짜 세컨드한테 이렇게 짓밟힘 당할 생각이야?”
  • 나윤주는 여전히 표정변화가 없었다.
  • “고지헌을 파산하게 만들 방법이 있으면 알려줘. 나도 그 주식을 사게.”
  • 바람이 난다는 건 어느 한 쪽만 잘못해서 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두 사람의 경우에는 고지헌이 혼인관계에 있어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을 지키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윤주는 그녀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세컨드와 다투기엔 격이 떨어지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 성하월이 그치지 않고 더 말하려 하자 나윤주는 얼굴을 문대며 화제를 돌렸다.
  • “너 지난번에 대형 거래처가 생길 거라 하지 않았어?”
  • 그녀는 화제가 돌려진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 “맞아. 그게 바로 우림 엔터테인먼트야. 거기 대표님이 마침 오늘 인천에 와있는데 너랑 자세하게 디테일에 대해 논의를 해보고 싶다고 그랬어. 근데 내가 아직 답장은 안 드렸어.”
  • 우림 엔터테인먼트에는 이름을 대면 바로 아는 톱급 여자 배우들이 여럿 소속되어 있었다. 일년 내내 각종 행사며 시상식, 파티 등이 끊임없이 있었기에 엔터테인먼트에는 드레스에 대한 수요가 다른 고객층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만약 여기와의 계약을 따낸다면 내년뿐만 아니라 에르문 스튜디오 명성 자체가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었다.
  • 나윤주는 기합을 넣으며 입을 열었다.
  • “뭘 더 기다려. 돈 벌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그걸 놓치면 멍청이지. 오늘 바로 시간 잡자고 해.”
  • 성하월은 두 손안에 쏙 들어올 것 같은 나윤주의 허리를 쳐다보더니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그녀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오후 2시, 나윤주와 성하월은 함께 차를 타고 우림 엔터테인먼트 회사 앞에 도착했다. 성하월이 주차자리를 찾아 후진을 하려는데 두 사람의 차 사선 뒤쪽 방향에서 파란색 슈퍼카 한 대가 멋들어진 드리프트를 그리며 성하월이 찜한 주차자리로 미끄러져왔다. 당황한 그녀는 실수로 악셀을 힘껏 밟았다.
  • 쾅!
  • 거대한 충돌음이 주차장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