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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사람을 잘못 본 것뿐입니다

  • 이 가격은 거의 글로벌 패션 디자이너들의 작품과 비교해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 금액으로, 가격책정이 과하게 높게 된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디자인의 완성도를 놓고 본다면 그 어느 명품보다도 뒤지는 곳이 없었다. 비록 이 웨딩드레스가 만들어진지 3년이나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퀄리티가 뛰어나고 아름다웠다.
  • 고지헌은 표정변화 없이 나윤주를 봤다가 눈빛을 거뒀다. 그러고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세를 유지한 채 무심히 말했다.
  • “네 맘에 들면 됐어. 그걸로 해.”
  • 지갑에서 카드를 꺼낸 고지헌이 어시에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 잔뜩 흥분한 배효민이 고지헌에게 와락 안겼다.
  • “고마워 지헌 씨. 사랑해~”
  • 나윤주는 두 사람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애써 돌렸다. 그녀는 가슴에 커다란 돌이 내려앉은 듯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역시 7억이라는 숫자는 고지헌에게 있어 그닥 타격이 없는 액수인 모양이었다. 배효민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는 언제든지 서슴없이 그녀에게 모든 걸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 나윤주는 어시에게 결제를 도와주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어시는 카드를 받는 대신 초조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에게 어떻게 이걸 팔 수 있냐고 따져묻는 듯했다. 에르문의 직원들은 이 웨딩드레스가 나윤주가 본인을 위해 디자인한 거라는 걸 다 알고 있었다.
  • 물론 나윤주 또한 하나도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미 이혼을 결심한 마당에 결혼식도 올릴 일이 없을 터, 이 와중에 굳이 웨딩드레스를 남겨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 나윤주는 걱정 말라는 듯 어시를 향해 옅게 웃어보였다.
  • “사장님께서 말씀하셨잖아. 돈 벌 기회가 있는데 그걸 놓치면 바보라고.”
  • 더군다나 고지헌의 돈을 번 것이라면 마침 제대로 된 상대에게 ‘팔았다'라고도 볼 수 있었다.
  • 어시는 내키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카드를 받아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그동안 나윤주는 직접 전시칸에 걸린 웨딩드레스를 마네킹 몸에서 벗겨냈다.
  • 피팅을 위해 자리를 옮기던 도중에 배효민이 나윤주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 “다른 분은 필요 없으니 그쪽이 제 피팅을 도와주시죠?”
  • 나윤주는 무의식적으로 고지헌을 쳐다봤다. 아직 이혼도 안 한 와이프한테 미래의 약혼자 피팅을 도와주라는 건 아니겠지? 고지헌이 바보멍청이가 아닌 이상…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다 끝나기도 전에 고지헌의 총애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럼 수고하시죠.”
  • 피팅룸에 들어선 고지헌은 조명이 반쯤 걸쳐진 곳에 멈춰섰다. 절반은 어둠 속에, 절반은 밝은 곳에 몸이 가려진 그의 신장이 유난히 늘씬해 보였다. 준수하면서도 강단이 있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 나윤주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겉으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은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수고랄 게 없어요. 제가 응당 해야 할 일인데요 뭘.”
  • 웨딩드레스 피팅을 도와주는 일도, 혼인 내 인수인계도 모두 다 말이다.
  • 고지헌의 싸늘한 시선이 날아들었다. 나윤주는 그걸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웨딩드레스를 품에 안은 채 사무적인 미소를 지었다.
  • “걱정 마세요. 와이프분 제대로 잘 모시겠습니다.”
  • -
  • 에르문의 피팅실은 두 사람이 들어가도 넉넉할 정도로 크기가 충분했다.
  • 나윤주는 낯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배효민의 피팅을 도와주었다. 웨딩드레스는 나윤주의 사이즈에 맞춰 제작했기에 제 아무리 배효민의 몸매가 좋은 편에 속해도 입기 힘들어 했다. 특히 허리 부분이 애를 먹였는데 배효민이 아무리 숨을 들이마셔도 지퍼를 올릴 수가 없었다.
  • 여러번의 시도에도 지퍼 올리기에 실패하자 두 사람 모두 약간의 땀이 배어나왔다. 나윤주는 할 수 없이 나가서 가위를 찾아와 무릎을 굽히고 허리부에 달린 버클 몇 개를 잘라버렸다. 그렇게 해서야 겨우 지퍼를 힘겹게 올릴 수 있었다. 나윤주는 허리를 굽혀 웨딩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어색해진 분위기를 수습했다.
  • “나중에 사이즈를 살짝 수선하면 돼요.”
  • 배효민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웨딩드레스는 장식칸에 전시되어 있는 것보다 입었을 때 더 진가를 발휘했다. 이 드레스를 입음으로써 사람 자체에서 존귀한 아우라가 풍기는 것 같았다. 배효민은 거만해진 태도로 주위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는 나윤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 “그쪽은 제 남편이랑 알고 지낸지 얼마나 됐죠?”
  • 나윤주의 동작이 일순 멈췄다. 그녀는 몸을 바로하고 눈썹을 들썩였다.
  • “아까 고객님께서 사람을 잘못 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거울을 통해 나윤주를 관찰하던 배효민이 긴장을 풀며 말을 이어갔다.
  • “하긴, 제 남편이 매일 업무로 바쁜데 그쪽 같은 매장 점원 따위랑 만날 일이 어딨겠어요.”
  • 나윤주는 그저 웃어보였다.
  • 배효민은 아랑곳 않고 계속 말했다.
  • “여기에서 일하는 거 힘드시죠? 페이는 인센티브로 받는 식인가요?”
  • 나윤주는 웨딩드레스의 허리띠를 정리하며 대충 둘러댔다.
  • “적당히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 인센티브는 안 받아요.”
  • “아, 그럼 혹시 그쪽이 여기 점장인가요?”
  • 배효민이 눈빛을 반짝였다.
  • 나윤주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 “네, 비슷합니다.”
  • 성하월이 대외 업무를 보고 나윤주가 대내 업무를 주로 보는 형식이라 그녀를 점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 배효민은 허리를 굽혀 곁에 놔둔 백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그러고는 유혹하는 말투로 제안했다.
  • “제 남편이 리엘 씨 디자인을 꽤나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이곳에서 장기적으로 제 드레스를 주문하고 싶어하는데 저는 맞춤제작으로 진행하고 싶거든요? 혹시 가능하다면 저희한테 줄을 좀 놔줄 수 있을까요? 제 남편은 고진 그룹의 대표예요. 돈은 문제될 게 없으니까, 줄만 놔주시면 제가 다른 일거리도 소개해 드릴게요.”
  • 나윤주는 이 상황이 풍자적으로 느껴졌다.
  • 고지헌이 그녀의 디자인을 좋아한다니. 그는 자기가 배효민을 위해 캐스팅하려는 디자이너가 자신과 3년이나 생활했다가 버림받은 아내라는 것을 알기나 할까?
  • 나윤주는 명함을 받지 않고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 “고객님 남편분께서 그렇게 대단하시면 직접 리엘 디자이너께 연락을 해보심이 더 빠르실 텐데요. 저한테 얘기하기보단 남편분께 얘기하시지 그러세요?”
  • 거절 당할 줄 몰랐던 배효민은 순식간에 노기가 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명함을 휙하고 다시 거두더니 비꼬듯 말했다.
  • “그러네요. 당신 같은 레벨의 사람들은 리엘처럼 유명한 디자이너랑은 접촉할 기회조차 별로 없을 거라는 걸 제가 잊었네요.”
  • 배효민은 나윤주를 단번에 밀치고는 피팅실을 나갔다가 마침 고지헌과 마주쳤다. 그녀는 곧바로 괴롭힘을 당한 토끼처럼 눈시울을 붉힌 채 억울함을 담아 투덜거렸다.
  • “지헌 씨, 나 스탭 바꿔주면 안 돼? 이 사람 태도가 진짜 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