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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이혼절차 밟죠

  • 고지헌은 품에 들이밀어진 이혼서류와 카드를 보며 순간 짜증이 일었다. 그저 홧김에 한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윤주가 실제로 행동에 옮길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 “진심이야?”
  • 겨우 화를 눌러참은 고지헌이 억지로 몇 글자를 뱉어냈다.
  • 나윤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 “당연하죠. 거기에 사인하고 언제 시간 나면 가서 이혼절차 밟죠?”
  • 고지헌은 자신의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지난 3년간 나윤주는 언제나 얌전하고, 말 잘 듣고, 그의 가족들한테도 정성을 다하는 합격된 와이프였다. 고지헌한테도 극진히 잘 보이려고 애쓰던 그녀였는데, 지금의 나윤주는 전혀 딴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 희고 윤기 나는 얼굴에는 이제 예전과는 다른 짜증이 담겨있었고 촉촉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윤주는 정말로 그를 당장 떠나지 못해 안달나 있었다.
  • 가슴에 뜨끔한 통증을 느낀 고지헌은 빠르게 시선을 거두고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담담한 음성이 안쪽에서 들려왔다.
  • “따로 시간 낼 거 없이 내일 아침 9시, 가정법원 앞에서 만나.”
  •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다 했다고 생각했던 그녀였지만 정작 이 순간이 도래하고 보니 여전히 가슴이 욱신거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치 천 개, 만 개의 바늘에 콕콕 쏘이는 것처럼 그녀는 몸 절반이 마비된 듯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 나윤주는 어떻게 집을 나섰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스튜디오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운 뒤에야 그녀는 속이 뒤집힐 것처럼 위가 아파져옴을 느꼈다. 다급히 입을 막고 화장실로 달려가 저녁에 먹고 마신 것을 모두 토해냈지만 위의 통증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쏘시개로 지지는 것처럼 따가웠다.
  • 위병은 나윤주의 고질병이었는데 매번 발작할 때마다 그녀의 혼을 쏙 빼놓고는 했다. 다만 오래동안 발작을 하지 않았던 터라 방심을 한 탓에 집에서 나올 때 나윤주는 위약을 챙길 생각을 못했다.
  • 화장실에서 침대로 걸어가는 그 짧은 사이에 그녀의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나윤주는 겨우 통증을 참아가며 성하월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성하월은 인사불성이 되어 잠에 빠진 상태라 벨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오늘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재차 망설이던 나윤주는 결국 고지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 첫 번째 통화는 받는 사람 없이 음성안내로 넘어갔다.
  • 두 번째 통화는 두 번의 연결음이 울린 후 바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스피커 너머로 들려온 건 부드럽고 나른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윤주는 듣자마자 상대방이 배효민임을 알아챘다.
  • “여보세요? 누구시죠?”
  • 방금 전 아파트에서 나올 때만 해도 고지헌은 혼자였는데 그새 배효민과 만난 모양이었다. 나윤주는 고지헌에게 도움요청을 하기로 한 제 자신이 멍청이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대답을 않자 배효민이 다시 조심스레 입을 뗐다.
  • “나윤주 씨 맞으신가요? 지헌 씨 찾으시려고요?”
  • 나윤주는 그녀의 입에서 고지헌이 지금 샤워 중이라는 그런 개소리를 듣기 싫어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카펫 위에 몸을 쭈그리고 누워 통증으로 찡그려진 코를 풀쩍이며 고지헌의 모든 연락방식을 차단했다. 그다음 휴대폰을 내려놓은 그녀는 블랙아웃이 되어 그대로 기절했다.
  • -
  • “윤주야?”
  • 이튿날 아침, 나윤주는 성하월의 부름 소리에 깨어났다. 성하월은 잠옷바람이었는데 딱 봐도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스튜디오로 달려온 게 분명했다. 그녀는 면목이 없는 얼굴로 자책했다.
  • “너 위병이 발작한 거지? 다 내탓이야. 내가 어제 너무 깊게 잠들어서 네 전화 못 받았어.”
  • 나윤주는 그녀의 말에 대꾸할 여유도 없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시간을 물었다.
  • “지금 몇 시야?”
  • “9시 됐어.”
  • 나윤주의 머리가 웅하고 울렸다.
  • “큰일 났어. 나 지헌 씨랑 이혼하려고 가정법원 앞에서 9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 고지헌은 약속에 늦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나윤주는 카펫 위에 떨어진 휴대폰을 더듬어 들고는 재빨리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스피커에선 지금은 전화 받기가 어렵다는 안내멘트만 흘러나왔다. 고지헌도 그녀의 번호를 차단한 것이었다.
  • 어젯밤 호기롭게 그의 번호를 차단할 땐 언제고, 오늘이 되자 나윤주는 쭈굴해졌다. 다시 그의 연락처를 찾아 차단을 풀고 보이스톡을 보내니 통화가 연결되었다. 나윤주는 최대한 예의바르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어투로 탐색하듯 말했다.
  • “혹시 아직 가정법원에서 기다리고 있나요? 저 지금 바로 건너갈게요.”
  • 고지헌의 싸늘한 음성이 스피커를 타고 전해졌다.
  • “그러니까 네 말은 나더러 여기 밖에서 반 시간이나 기다리라는 뜻이야?”
  • 당당하지 못한 건 나윤주였기에 그녀는 변명하는 대신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으며 한쪽으로 휴대폰에 대고 사과를 했다.
  • “미안해요. 저 최대한 빨리 서두를게요. 20분이면 될 것 같은데 괜찮죠?”
  • 하지만 고지헌은 순순히 나오지 않았다.
  • “내 시간이 네 시간처럼 넘쳐나는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