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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장사를 뒤엎다

  • 나윤주는 정신소모가 너무 심해 참지 못하고 잠들어 버린 탓에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 한잠 자고 일어나니 두 사람이 탄 차는 스튜디오 앞이 아닌 이제 갓 개발된 듯한 아파트 단지 앞에 세워져 있었다. 나윤주는 멍한 얼굴로 운전석에 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는 성하월을 바라봤다.
  • “여기에서 또 다른 거래처 만나기로 했어?”
  • 성하월은 잠에서 깨어난 그녀를 보며 손에 든 키를 멋있게 흔들어 보였다.
  • “그러엄~ 큰 거 보여줄 테니까 기대해.”
  • 거래처는 무슨, 나윤주는 차에서 내린 뒤에야 성하월이 그녀를 위해 몰래 아파트를 한 채 준비했음을 깨달았다. 아파트는 방이 세 개 딸려있는, 나윤주 혼자서 살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 성하월이 걱정을 가득 담아 말했다.
  • “너 스튜디오에서 계속 생활하는 것도 방법이 아니잖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건 둘째치고 안전문제도 걱정돼. 여기가 스튜디오에서 멀지도 않고 딱 좋아. 너 아직 이혼 도장을 찍은 게 아니라서 그 쓰레기가 네 재산 뺏을까 봐 일단은 내 이름으로 해놨어. 이제 나중에 네가 자유의 몸이 되거든 네 이름으로 돌려줄게.”
  • 키를 손에 든 나윤주는 일순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 성하월은 손을 연신 내저었다.
  • “어우야~ 이 돈 다 네가 벌어들인 돈이거든? 너 연말마다 보너스 적게 챙겨갔으니까 내가 한 번에 챙겨주는 거라고 생각해. 나 아직 네가 디자인한 도면으로 더 높이 훨훨 날 앞날을 기대하고 있어!”
  • 나윤주는 더는 사양하지 않고 키를 주머니에 챙겼다.
  • 이튿날 아침, 나윤주는 시끄러운 휴대폰 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휴대폰 화면을 켜니 부재중 전화가 33통이나 와 있는 게 보였다. 그중 32통은 성하월에게서 온 전화였고 한 통은 고지헌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윤주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성하월에게 전화를 걸었다.
  • “무슨 일로 전화했어?”
  • “아니야. 그냥 당분간은 빡세게 일 안 해도 된다고 얘기해 주려고. 원래는 디자인할 시간이 부족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제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일부 고객들이 드레스 최종 전시효과가 맘에 안 든다면서 계약금도 안 받을 테니 일방적으로 주문을 취소한 거 있지. 그렇게 퇴짜맞은 옷들 지금 스튜디오에 잔뜩 걸려있어. 최근에 우리가 했던 노력들이 모두 다 물거품이 된 거나 마찬가지야.”
  • 나윤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맘에 안 든다고?”
  • 지금까지 스튜디오를 운영해 오면서 한 번도 없었던 상황에 나윤주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혹시나 대형 브랜드 스튜디오에서 압박이 들어와 이렇게 됐다고 추측하기에는 에르문이 아직은 이름을 갓 알리기 시작한 작은 스튜디오이기에 무리가 있어 보였다.
  • 휴대폰을 그러쥔 나윤주의 손끝이 하얗게 번졌다.
  •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지금 바로 건너갈게.”
  • 전화를 끊은 후 나윤주는 택시를 잡아 스튜디오로 향하는 동안 휴대폰을 계속 했다. 그러다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배효민의 해시태그가 올라와 있는 게 보였다. 해시태그를 누르자 그녀가 최근 올린 게시물이 화면에 나타났다. 언제인지, 어떤 마음에서였는지 기억 안나지만 나윤주는 그녀의 계정을 이미 팔로우하고 있었다. 배효민은 자신의 셀카와 함께 짧은 글을 하나 게시했다.
  • “누군가가 사소한 일로 나를 위해 온세상을 뒤집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때,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것이 이런 게 아닌가 싶다.”
  • 그녀의 셀카 배경은 우림 엔터 건물이었다. 사진의 우측 하단에 남자의 반쪽 어깨가 나와 있었는데 슈트 원단이 척 보기에도 최상급 품질에 세련된 디자인을 자랑했다. 오늘 심찬을 만나러 갔다가 본 고지헌이 입은 슈트가 바로 사진속 슈트였다.
  • 리엘의 디자인을 손에 넣지 못할 바에야 장사를 뒤엎는 것을 택하다니. 정실의 사활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는 남자의 모습에 나윤주는 이를 갈며 팔로우 취소를 눌렀다. 휴대폰 화면을 껐음에도 마음속 불길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땐 여기저기에서 울리는 전화들로 인해 모든 직원들이 진땀을 빼고 있는 중이었다. 대충 들어보니 모두 주문 취소에 관한 내용들 뿐이었다.
  • “고객한테 연락은 해봤어? 다들 뭐라고 그래?”
  • 성하월은 그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으나 점점 늘어나는 주문 취소건을 마주하니 도저히 성질을 눌러참을 수가 없었다.
  • “온갖 이유를 대면서 맞지 않아서 취소하겠다고 난리지. 겨우 단골 손님을 구슬려서 좀 알아보긴 했는데, 그저 돈을 받은 게 있다는 얘기밖에 안 해. 그러면서 우리한테 혹시 누구랑 척진 거 있냐면서 물어보더라고.”
  • 척을 질만한 게 고지헌을 제외하고 또 누가 있겠는가!
  • 나윤주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그래서 손실이 얼만데?”
  • “모두 다 고객님들의 요구에 맞춰 맞춤제작에 들어간 옷들이라 원래는 잔금 결제를 받으면 그때 공장이랑 다시 정산하려고 그랬거든. 그런데 이제 옷을 물리겠다고 하니 잔금이 다 날아간 거나 마찬가지라서 공장 측에 지불할 돈이 아예 없어. 이것저것 다 합하면 4… 40억 쯤 될 것 같다.”
  • 40억이라니… 에르문은 거의 파산할 위기에 놓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 나윤주는 흐트러진 숨을 애써 다잡으며 뭔가 말하려고 했는데,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고지헌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