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빠른 속도로 간단히 메이크업을 해서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을 가리고, 깔끔한 정장 세트를 아래위로 갖춰입은 뒤 나윤주는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가자마자 그녀는 저 멀리 소파에 서로 딱 붙어 앉아있는 익숙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순간 발걸음이 멈칫하고 입가에 올린 미소도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대로 뒤돌아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어버렸다.
동시에 나윤주를 발견한 고지헌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와 나윤주의 팔뚝을 단번에 잡아끌었다.
“나윤주, 너 능력 대단하네? 감히 여기까지 쫓아와?”
나윤주는 입술을 말아물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헤어지기로 한 마당에 그에게 오해를 해명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그녀는 잡힌 팔을 빼내고 입가에 예의바른 미소를 담았다.
“자중하세요, 지헌 씨. 저 지금 일하고 있는 중입니다.”
미간을 구긴 고지헌은 비아냥과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너한테 돈 적게 줬어? 여기서 남들한테 커피나 타다 줘야 될 만큼 돈이 궁한 거야?”
나윤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패션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한 번도 고지헌에게 숨긴 적이 없었다. 고지헌이 조금이라도 자신한테 관심이 있었더라면 평소에 그녀가 디자인 도면을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사랑이 없었기에 자신한테 쏟을 마음조차 없었겠지. 고지헌은 그녀가 자신을 떠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들한테 커피를 타다 주는 일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만 봐도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린 이미 이혼했어요. 제가 커피를 타든 차를 나르던 지헌 씨 체면을 깎아먹을 일이 없으니까 그만하시죠. 지금 이곳에서 이러시면 배효민 씨가 오해하지 않겠어요?”
두 사람의 결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배효민은 아마 나윤주의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을 게 분명했다.
고지헌은 대번에 포인트를 캐치하고 얼굴을 굳혔다.
“이혼이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나윤주의 싸늘한 눈빛이 남자에게 향했다. 그날밤 고지헌은 배효민에게 신경이 온통 쏠려있던 터라 그녀가 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집'에 들어오는 일도 거의 없다 보니 자연히 그 이혼서류도 보지 못했을 테고 말이다.
나윤주는 본인이 소홀했음을 인정했다. 그녀는 차분하게 대처하려 애썼다.
“아니에요. 내일 지헌 씨 회사로 이혼서류 부칠 테니까 사인하는 거 잊지 마요.”
고지헌은 더 캐묻고 싶었으나 배효민이 쪼르르 달려온 탓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보조개를 만들며 물어왔다.
“지헌 씨, 왜 그래?”
고지헌은 얼른 말을 바꿨다.
“아냐.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지 왜 왔어?”
나윤주는 얌전하게 그의 옆에 기대고 서서 애교가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계속 기다려도 안 오길래 무슨 일 있나하고 와 봤지. 왜, 지헌 씨 이 점원분 알아?”
싸늘한 음성의 고지헌이 딱딱하게 몇 글자를 뱉어냈다.
“사람 잘못 봤나 봐.”
3년간의 결혼생활이 그의 입에서 부정을 당했다. 졸지에 모르는 사람이 돼버린 나윤주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고지헌과 따지기 싫어 자리를 뜨려는데 배효민이 그의 팔짱을 끼고 이해심 가득한 목소리로 나윤주에게 말을 걸어왔다.
“잘못 알아 본 것도 다 인연인데요 뭐. 그래도 장사는 챙겨드려야죠. 혹시 리엘 디자이너님께서 디자인하신 웨딩드레스 보여줄 수 있을까요?”
아무리 이제는 고지헌에 대한 감정을 다 정리했다고 해도 나윤주는 제자리에 굳어설 수밖에 없었다.
아직 그녀와의 결혼도 완전히 끝난 게 아닌데 벌써부터 전 여친과의 결혼을 준비한다고? 그렇게까지 한 시도 지체하기 싫었던 거였어? 암담한 마음에 나윤주의 동공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배효민이 보여달라고 한 웨딩드레스는 리엘이 최근 몇 년간 유일하게 제작한 웨딩드레스라고 알려져 있으며 아직까지도 에르문 매장의 제일 눈에 띄는 곳에 전시돼 있었다. 이 웨딩드레스의 가격은 어마어마했는데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이 웨딩드레스가 판매용으로 제작된 게 아닌, 애초부터 디자이너가 비매품으로 제작한 것이라는 걸 알수 있었다.
이 웨딩드레스는 나윤주가 한땀한땀 직접 바늘질해가며 만든 것인데 고지헌의 입에서 나온, 이행할 생각이 없어보였던 약속을 위해 탄생한 작품이었다.
잠깐의 머뭇거림 후 그래도 나윤주는 두 사람을 그 웨딩드레스 앞으로 데려갔다.
배효민의 얼굴에 떠오른 감탄과 환희의 표정을 보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난 나윤주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져갔다.
배효민은 흥분된 목소리로 전시칸에 진열된 웨딩드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 이걸로 할래.”
고지헌이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입어 봐.”
그때 곁에 있던 어시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죄송한데요 손님. 이 드레스는 저희가 대외로 판매하지 않ㄴ…”
하지만 어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윤주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판매는 하는데 가격이 좀 있는 편입니다. 이 웨딩드레스의 가격은 7억 1800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