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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이걸로 할래

  • 나윤주는 피곤한 심신을 재빨리 가다듬었다.
  • “잠시만, 나 금방 내려갈게.”
  • 제일 빠른 속도로 간단히 메이크업을 해서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을 가리고, 깔끔한 정장 세트를 아래위로 갖춰입은 뒤 나윤주는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 1층으로 내려가자마자 그녀는 저 멀리 소파에 서로 딱 붙어 앉아있는 익숙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순간 발걸음이 멈칫하고 입가에 올린 미소도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대로 뒤돌아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어버렸다.
  • 동시에 나윤주를 발견한 고지헌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와 나윤주의 팔뚝을 단번에 잡아끌었다.
  • “나윤주, 너 능력 대단하네? 감히 여기까지 쫓아와?”
  • 나윤주는 입술을 말아물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헤어지기로 한 마당에 그에게 오해를 해명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그녀는 잡힌 팔을 빼내고 입가에 예의바른 미소를 담았다.
  • “자중하세요, 지헌 씨. 저 지금 일하고 있는 중입니다.”
  • 미간을 구긴 고지헌은 비아냥과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 “내가 너한테 돈 적게 줬어? 여기서 남들한테 커피나 타다 줘야 될 만큼 돈이 궁한 거야?”
  • 나윤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패션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한 번도 고지헌에게 숨긴 적이 없었다. 고지헌이 조금이라도 자신한테 관심이 있었더라면 평소에 그녀가 디자인 도면을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 사랑이 없었기에 자신한테 쏟을 마음조차 없었겠지. 고지헌은 그녀가 자신을 떠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들한테 커피를 타다 주는 일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만 봐도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 “우린 이미 이혼했어요. 제가 커피를 타든 차를 나르던 지헌 씨 체면을 깎아먹을 일이 없으니까 그만하시죠. 지금 이곳에서 이러시면 배효민 씨가 오해하지 않겠어요?”
  • 두 사람의 결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배효민은 아마 나윤주의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을 게 분명했다.
  • 고지헌은 대번에 포인트를 캐치하고 얼굴을 굳혔다.
  • “이혼이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 나윤주의 싸늘한 눈빛이 남자에게 향했다. 그날밤 고지헌은 배효민에게 신경이 온통 쏠려있던 터라 그녀가 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집'에 들어오는 일도 거의 없다 보니 자연히 그 이혼서류도 보지 못했을 테고 말이다.
  • 나윤주는 본인이 소홀했음을 인정했다. 그녀는 차분하게 대처하려 애썼다.
  • “아니에요. 내일 지헌 씨 회사로 이혼서류 부칠 테니까 사인하는 거 잊지 마요.”
  • 고지헌은 더 캐묻고 싶었으나 배효민이 쪼르르 달려온 탓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보조개를 만들며 물어왔다.
  • “지헌 씨, 왜 그래?”
  • 고지헌은 얼른 말을 바꿨다.
  • “아냐.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지 왜 왔어?”
  • 나윤주는 얌전하게 그의 옆에 기대고 서서 애교가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아니, 계속 기다려도 안 오길래 무슨 일 있나하고 와 봤지. 왜, 지헌 씨 이 점원분 알아?”
  • 싸늘한 음성의 고지헌이 딱딱하게 몇 글자를 뱉어냈다.
  • “사람 잘못 봤나 봐.”
  • 3년간의 결혼생활이 그의 입에서 부정을 당했다. 졸지에 모르는 사람이 돼버린 나윤주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고지헌과 따지기 싫어 자리를 뜨려는데 배효민이 그의 팔짱을 끼고 이해심 가득한 목소리로 나윤주에게 말을 걸어왔다.
  • “잘못 알아 본 것도 다 인연인데요 뭐. 그래도 장사는 챙겨드려야죠. 혹시 리엘 디자이너님께서 디자인하신 웨딩드레스 보여줄 수 있을까요?”
  • 아무리 이제는 고지헌에 대한 감정을 다 정리했다고 해도 나윤주는 제자리에 굳어설 수밖에 없었다.
  • 아직 그녀와의 결혼도 완전히 끝난 게 아닌데 벌써부터 전 여친과의 결혼을 준비한다고? 그렇게까지 한 시도 지체하기 싫었던 거였어? 암담한 마음에 나윤주의 동공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 배효민이 보여달라고 한 웨딩드레스는 리엘이 최근 몇 년간 유일하게 제작한 웨딩드레스라고 알려져 있으며 아직까지도 에르문 매장의 제일 눈에 띄는 곳에 전시돼 있었다. 이 웨딩드레스의 가격은 어마어마했는데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이 웨딩드레스가 판매용으로 제작된 게 아닌, 애초부터 디자이너가 비매품으로 제작한 것이라는 걸 알수 있었다.
  • 이 웨딩드레스는 나윤주가 한땀한땀 직접 바늘질해가며 만든 것인데 고지헌의 입에서 나온, 이행할 생각이 없어보였던 약속을 위해 탄생한 작품이었다.
  • 잠깐의 머뭇거림 후 그래도 나윤주는 두 사람을 그 웨딩드레스 앞으로 데려갔다.
  • 배효민의 얼굴에 떠오른 감탄과 환희의 표정을 보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난 나윤주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져갔다.
  • 배효민은 흥분된 목소리로 전시칸에 진열된 웨딩드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 “나 이걸로 할래.”
  • 고지헌이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럼 입어 봐.”
  • 그때 곁에 있던 어시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저기, 죄송한데요 손님. 이 드레스는 저희가 대외로 판매하지 않ㄴ…”
  • 하지만 어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윤주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 “판매는 하는데 가격이 좀 있는 편입니다. 이 웨딩드레스의 가격은 7억 1800만입니다.”
  • 금액을 들은 배효민은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