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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착각

  • 단상 위에서 상을 받고 있는 윤청아를 바라보는 남주하는 믿을 수 없는 듯 황망한 표정이었다.
  • 남주하는 윤청아가 그럴 만한 실력자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분명 아주 조금밖에 할 줄 모른다고 했는데, 설마 그동안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 연설이 끝난 뒤에도 단상 위에서 교장선생님의 장황한 훈화 말씀을 들어야 했던 윤청아는 기나긴 표창 대회가 끝날 때 즈음 다리가 저리고 온몸이 시큰거렸다.
  • 감각을 잃은 다리를 통통 두드리고 있는 윤청아의 앞에 남주하가 수학 올림피아드 문제집을 들이밀며 심통이 난 듯 불퉁한 어조로 말했다.
  • “그렇게 자신 있으면 여기 있는 문제들도 풀어 봐!”
  • 나른한 눈동자로 문제집을 대충 훑어보던 윤청아는 이내 펜을 들었다.
  • 그녀의 문제 풀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던 남주하는 눈을 크게 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전부 정확한 데다 윤청아는 해답지보다도 더욱 간결하고 간편한 해법으로 문제를 풀고 있었다.
  • 남주하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중의 한 문항을 가리키며 물었다.
  • “이거 이번 경시대회의 마지막 문제잖아. 해답을 알고 있는데 왜 풀지 않았던 거야?”
  • 만점을 맞으면 의심받을 게 뻔해 윤청아는 마지막 문제는 일부러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 “시간 없었어.”
  • 윤청아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충 얼버무렸다.
  • 그런 윤청아를 동경하게 되었음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남주하는 속마음과는 달리 빈정거리며 말했다.
  • “고작 그 정도 가지고 우쭐대지 마. 나도 마음먹고 한다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어.”
  • 반면 남 씨 어르신은 표창 대회 이후 윤청아를 더욱 어여삐 여겼다.
  • “역시 우리 남 씨 가문의 며느리야!”
  • 그 말에 윤청아는 대답 대신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 “이왕 이렇게 된 거, 주하 녀석 과외를 잘 부탁한다, 청아.”
  • “저는 아무래도 괜찮지만 남주하가 제 가르침을 받으려 할까요?”
  • 윤청아는 얼른 이 골치 아픈 문제를 남주하에게 떠넘겼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남주하가 고개를 치켜들고서 자신 있게 말했다.
  • “할아버지, 저도 열심히 하면 잘 할 수 있어요.”
  • “이 할아버지도 네가 잘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끊임없이 설득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할아버지에게 끝내 설득당한 남주하는 꼼짝없이 매일 윤청아에게서 수학 과외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 “이것도 풀어 봐.”
  • 남주하는 “쳇” 하고 혀를 차며 윤청아에게서 문제집을 건네받았다. 윤청아가 짚은 지문을 대충 훑어보던 남주하가 이내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거드름을 피웠다.
  • “난 본디 총명하고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데다 그동안의 과외 덕분에 이깟 문제는 귀찮아서 안 풀어.”
  • 그 모습에 윤청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죽거렸다.
  • “잘난 체하기는.”
  • 수업이 끝나고 벌써 저만치 교실을 빠져나가는 윤청아의 모습을 발견한 남주하가 성큼성큼 다가가며 큰 소리로 물었다.
  • “이따가 형이 데리러 오기로 했는데 어디 가는 거야?”
  • “왜? 난 화장실도 못 가?”
  • 주변에서 또다시 술렁이기 시작하자 윤청아는 성가시다는 듯 인상일 구기며 언성을 높였다.
  • 복이라고? 그 복이 그렇게 부러우면 제발 저한테서 좀 가져갔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 하지만 윤청아는 제아무리 지금 이 상황이 불만스러워도 마음속으로만 이죽거릴 뿐이었다. 저들이 보기에는 불순해 보이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윤청아는 또다시 남 씨 가문 도련님들의 추종자들에게 뭇매를 맞게 될 것이었다.
  • “그럼 난 먼저 내려간다. 교문에서 기다릴게.”
  • 윤청아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돌자 심은영의 모습이 보였다.
  • “나 왜 불렀어?”
  • 수업이 끝나기 직전 수업 끝나고 잠깐 만나자는 심은영의 쪽지를 받고 여기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 윤청아의 물음에 심은영이 간신히 쥐어짠 눈물을 훔치며 울먹이는 목소리를 냈다.
  • “남주하랑 친해 보이던데, 혹시 남주하 좋아해?”
  • 그 말에 윤청아는 야트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 그러자 심은영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되물었다.
  • “그럼 남주하 안 좋아해?”
  • 그 말에 윤청아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심은영이 빨간 홍조를 띤 얼굴로 몸을 배배 꼬며 입을 열었다.
  • “그럼 내가 주하랑 잘 되게 도와줄 수 있어?”
  • 만일 공부 잘하는 심은영이 남주하랑 사귄다면 굳이 그녀가 남주하의 과외를 맡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좋아, 그럼 내가 뭘 도우면 돼?”
  • 그렇게 말하며 윤청아가 심은영을 힐긋 바라보았다.
  • 손쉽게 승낙하는 윤청아의 모습에 심은영은 얼른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심은영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 “그럼 조용한 곳으로 가자.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얘기하기 불편해.”
  •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뀐 심은영의 표정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윤청아는 별다른 의심 없이 심은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