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께서 지금 당장 돌아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신영 그룹 산하의 angle 그룹의 경영권을 받아들이셔야 하고, 그룹의 올해 매출액을 작년 대비 50% 이상 올리셔야 합니다. 회장님께서는 이 또한 거절하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이로 인해 한진 그룹은 굉장히 참담한 결과를 맞게 될 겁니다.”
가은은 이를 악물었다. 예전 한지혁의 할아버지가 임종하기 전에, 그녀는 반드시 한진 그룹을 잘 지키겠노라 그와 약속을 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한진 그룹에 무슨 일이 생기도록 놔둘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분명 내 약점을 쥐고 있어. 하지만 그걸 이용해 날 돌아가도록 협박하는 게 아니라 나더러 angle 그룹을 경영하라고?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좋아요,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죠.”
가은은 펜을 건네받아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 뒤 곧이어 6조 원이 들어있다는 블랙 카드도 건네받았다.
온통 검푸른 금빛으로 뒤덮인 그 카드를 바라보며 그녀는 우스운 듯 고개를 저었다.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온몸에 지닌 돈이라고는 고작 2000원뿐이라 택시비로 쓰기에도 부족했었다.
‘그러니까, 이것도 어찌 보면 졸부가 된 셈인 건가?’
예전에 아버지와 했던 약속 때문에 이제껏 그녀의 카드는 막혀있었고 자신의 진짜 신분도 숨겼어야 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약속을 어긴 것으로 간주되었다.
평소 돈에 눈이 멀어있는 데다 남과 비기기를 좋아했던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녀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 만약 그녀가 사실은 국내 재계 1순위인 신 씨 가문의 막내딸 신가은이고 몸 값만 수 억 원인 엄청난 재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그녀는 기억이 아직 돌아오기 전, 보육원에서 알게 된 친구가 목숨이 위태로워져 시어머니인 오혜선에게 돈 좀 빌려달라고 무릎 꿇고 애원했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 오혜선은 도도한 표정으로 플래티늄 카드를 한 장 꺼냈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건네기 위해서가 아닌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이 안에 얼마가 들어있는지 아니? 2억이야. 넌 평생 이렇게 많은 돈은 본 적도 없겠지? 하지만 난 이 돈으로 강아지 사료를 살 지언정 너한테는 단 한 푼도 빌려주지 않을 거야! 내 눈에 네 그 찢어지게 가난한 친구는 애완견 보다도 못하니까.”
가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얼핏 조롱이 스쳤다.
기회가 된다면 그녀는 사람을 깔보는 그 두 사람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고 싶었다. 지난날의 설움을 제대로 갚아주고 싶었다.
한창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등뒤에서 신가은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에 고개를 돌리자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시어머니인 오혜선이었다. 턱을 추켜들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는 불만과 언짢음이 가득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몇 명의 부잣집 사모들이 따르고 있었는데, 손에 들린 크고 작은 쇼핑백들로 보아 방금 쇼핑을 마치고 나온 듯했다.
가은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들고 있던 블랙 카드를 가방에 넣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이에 오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가은의 태도가 이렇게까지 차가울 줄은 생각 못한듯한 눈치였다.
분명 예전에만 해도 자신을 보면 기를 못 펴던 그녀였으니 말이다.
“누가 너더러 기어 나와서 집안 망신 시키라고 했어? 집안일은 다 한 거야? 점심은 차려놨고? 만약 우리 아들을 굶기기라도 한 거면 내가 네 낯짝을 찢어버릴 줄 알아! 옷은 또 그게 뭐니? 시집온 지 몇 년인데 아직도 그런 한심한 꼴을 하고 다니다니, 정말이지 부끄러워 죽겠어. 얼른 집으로 기어들어가!”
“제가 부끄러우시다고요?”
가은은 마치 엄청나게 웃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한 씨 집안에 시집온 뒤로 어머님께선 일부러 저택의 고용인들을 쫓아내시고 제가 직장을 그만두게 강요하셨죠. 당신 아들한테 빨래해주고, 밥해주고, 조신한 아내가 되라면서요. 그래서 전 시키는 대로 했어요. 그런데 어머님은 만족하셨나요? 어머님은 거기에서 한 술 더 떠 제가 어머님의 보석을 훔쳤다고 모함하시면서 그걸 이유로 할아버님께서 제게 주신 회사의 지분도 가져가시고 절 빗속에 무릎까지 꿇게 하셨잖아요. 그런 것들은 다 잊으셨어요?”
오혜선의 뒤에 있던 부잣집 사모들이 다들 혀를 찼다. 오혜선이 며느리에게 각박하게 군다는 것은 그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 정도가 이렇게까지 심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부잣집 사모들은 하나 둘 핑계를 대어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무,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오혜선은 몇 번이고 그녀의 말을 끊으려 했지만 고삐가 풀린 듯 정신없이 쏟아내는 그녀의 말에 막혀 단 한마디도 끼어들 수가 없었다.
“전 헛소리 같은 거 한적 없어요. 어머님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가은은 차가운 표정으로 턱을 추켜올렸다. 그녀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전에는 참아드렸지만 이제 더 이상 절 건드리시면, 전에 당했던 것들까지 전부다 배로 돌려받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