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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의 본질

계약 결혼의 본질

왕관쿠키맘

Last update: 2024-05-16

제1화 닥치고 이혼해

  • 깊은 밤, 가은은 잠을 설치고 있었다.
  •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있는 것처럼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고 귓가에는 묵직하면서도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곧이어 하반신에서 찢어지는듯한 고통이 느껴지자 지금의 상황을 인지한 가은은 공포에 휩싸인 채 눈을 떴다.
  • 어렴풋이 자신의 위에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 “지혁아… 너야?”
  • “응.”
  • 남자가 나직이 대답했다. 그에게서는 술냄새가 짙게 풍겨오고 있었다. 그 뒤로 그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몸을 범해올 뿐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 하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가은은 안도하며 그의 움직임에 따라 자신 역시 서서히 분위기에 휩싸여 들었다.
  • 입술 사이에서는 저도 모르게 교태로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 그의 움직임이 더더욱 격렬해지자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냈다. 이 순간의 야릇한 분위기에 잠긴 그녀는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 결혼한 지 3년 만에 한지혁이 드디어 그녀를 안은 것이었다.
  • 할아버지의 성화에 못이겨 마지못해 그녀와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지난 시간 동안 그녀를 제대로 봐준 적조차 없었다.
  • 하지만 오늘 밤에는 무슨 이유로 그녀의 방을 찾은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그녀는 기쁘기만 했다.
  • 두 시간 후, 한마디 묵직한 신음과 함께 지친 한지혁이 그녀의 위로 쓰러졌다.
  • 통유리창 밖의 달빛이 그런 그의 완벽한 몸매를 비추고 있었다.
  • 가은은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토록 현실적이면서도 또한 꿈만 같았다.
  • 만약 지금 이 순간이 정말 꿈이라면 차라리 영원히 이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 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 “지혁아… 한지혁, 나 정말이지 널 너무…”
  • “사랑해.”
  • 그녀가 미처 마지막 세 글자를 내뱉기도 전에 남자의 입에서 중얼거리듯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율아…”
  • 그 한마디에 가은은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만 같았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 율, 그것은 한지혁의 첫사랑인 민소율의 애칭이었다.
  • 한지혁의 할아버지 때문에 지난 몇 년간 내내 해외에 있었지만 바로 어제 민소율은 귀국했고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 시비를 걸어왔었다.
  • “가은아, 나 돌아왔어. 한 씨 가문에 이제 네 자리는 없어!”
  • “나랑 혁이는 소꿉친구라고. 설마 정말로 고작 몇 년의 시간만으로 내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꺼져. 보육원으로 썩 꺼지라고. 그곳이야말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이야.”
  • “넌 혁이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지? 아무리 네 침대에 누워있다고 해도 걘 분명 내 이름을 부를 거고 넌 그저 내 대체품밖에 안 될 뿐이야. 그럼 분명 엄청 기분이 더럽겠지?”
  • ‘대체품? 난 할아버지가 선택한 손자며느리야, 정당한 한지혁의 아내라고. 난 가은이야! 그 누구의 대체품도 아니란 말이야!’
  • 귓가에선 여전히 한지혁이 연신 ‘율이’를 찾아대고 있었다.
  • 그 하나하나의 조롱 섞인 메시지들도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모든 것들이 그녀가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가은은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얼마나 기를 쓰고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인지 그녀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 그녀는 지난 몇 년간 누구보다도 얌전히 지내왔었다.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온 마음을 다해 한지혁의 완벽한 아내가 되기 위해 애써왔다.
  • 본가의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그녀가 출신도 확실하지 않다면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돈에 미치기라도 한 듯 사사건건 그녀를 힘들게 하고 모욕했었지만, 한지혁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그 모든 수모를 다 혼자서 감내해 왔었다.
  • 오직 그의 사랑을 바라며 그렇게까지 비굴해졌는데, 그것마저도 부족했던 걸까?
  • 왜 마지막 남은 얼마 안 되는 그 자존심마저도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짓밟았어야 한 했던 걸까!
  • 그 밤은 유난히도 길었고, 가은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
  • 다음날 아침, 창밖에서 비쳐드는 눈부신 햇살에 한지혁은 잠에서 깨어났다.
  • 미간을 주무르며 눈을 뜬 그의 앞에 그를 등진 채 화장대 앞에 앉아있는 가은의 모습이 보였다.
  • 그 순간 어젯밤 황당했던 그 일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그는 무언가 알아챈 듯 새까만 눈동자가 순식간에 얼어붙더니 온몸에서 냉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 그를 등지고 있던 가은마저도 남자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살기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화장품을 발랐다.
  • 하지만 누군가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확 낚아챈 탓에 들고 있던 화장품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유리로 된 화장품 병이 산산이 부서져 하얀 크림이 바닥에 한가득 쏟아져 나왔다.
  • 이에 가은은 화가 난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 하지만 분노와 증오가 가득 담겨있는 남자의 새까만 두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그녀는 늘 그랬듯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 “약을 쓰는 비겁한 수로 내가 널 안게 만들면 진정한 한 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수 있을 줄 알았어?”
  • 한지혁은 이를 갈며 무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손을 놓기는커녕 더욱더 손에 힘을 실었다. 살기로 가득 찬 그의 잘생긴 얼굴은 유난히도 무섭게 느껴졌다.
  • ‘약이라니?’
  • 가은이 창백한 얼굴로 설핏 웃음 지었다.
  • “네 눈에 난 그런 여자인 거야?”
  • 한지혁은 조롱하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짙은 혐오를 담을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때도 네가 수를 써서 할아버지를 속여 내가 너랑 결혼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잖아. 그래놓고 이제 와서 또 웬 순진한 척이야. 너같이 뼛속부터 천한 여자는 율이의 손가락 하나만도 못해!”
  • ‘뼛속부터 천하다니, 순진한 척이라니…’
  • 그의 마음속의 그녀는 그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 약을 쓰는 방법을 그녀가 만약 정말로 생각했다면 진작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굳이 힘들게 지금까지 기다릴 필요 따위가 있었을까?
  • 한지혁은 정말이지 그녀를 조금도 몰랐다. 우습게도 그녀가 지난 3년간 쏟아낸 모든 것들이 완전히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 그렇다면 더 이상 버틸 필요도 없었다.
  • 가은은 그에게 잡힌 손목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을 참으며 이를 악물고 힘껏 그의 손을 떨쳐냈다.
  • 그리고는 고개를 들고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한지혁, 우리 이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