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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아가씨의 6조 원

  • “뭐?”
  • 한지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그녀가 먼저 이혼 이야기를 꺼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듯했다.
  • 분명 어젯밤 자신에게 약을 먹여놓고 다음날 아침부터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미친 거야?”
  • 가은은 차갑게 그를 흘겨보았다. 분명 그보다 한참은 작은 체구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한지혁 못지않았다.
  • “너도 항상 이혼하고 싶어 했잖아. 그때 할아버지 때문에 마지못해 한 결혼이라면, 이제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더는 너랑 민소율의 사이를 가로막을 사람은 없어. 민소율한테 확실한 명분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
  • 이에 한지혁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 ‘정말로 이토록 친절하게 그 자리를 내놓는다고?’
  •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그는 가볍게 코웃음치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 “후회하지 마.”
  • 그 말에 가은은 순간 냉소 지었다. 그녀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했다.
  • “유일하게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때 너랑 결혼한 거야.”
  • 말을 마친 뒤 돌아서서 방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은 쿨하고 단호했다.
  • 한지혁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예전에만 해도 그녀는 그의 앞에서는 항상 나긋나긋한 모습을 보이며 순하고 약한 척을 해왔었다.
  • 하지만 오늘 그녀의 태도는 의외일 정도로 강경했다.
  • ‘설마 어젯밤의 일은 정말로 내가 오해한 건가?’
  • 하지만 그녀가 아니라도 달리 이런 짓을 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 ……
  • 두 사람은 그날 오전 곧바로 법원으로 향했다.
  • 노점상에서 산 낡고 예쁘지도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가은과 맞춤 제작한 프라다 블랙 슈트 차림의 한지혁의 모습은 유달리 이질적이었고 주위 사람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그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 하지만 가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그저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그리고 불과 십 분 만에 그들의 무겁기만 했던 결혼생활에 끝내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 수중의 눈에 거슬리는 이혼 서류를 바라보며 가은은 순간 얼떨떨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 “앞으로 처신 제대로 해.”
  • 차가운 목소리에 가은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남자의 모습은 이미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한 마디 만류도 없고, 눈길 한번 건네지 않은 채, 그렇게 애초부터 이곳에 없었던 듯이.
  • “차라리 잘됐어.”
  • 그녀는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 그가 이토록 매정하게 나온다면 이후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그들은 그저 서로 모르는 사이일 뿐인 것이다.
  • 그녀는 생각을 떨쳐내고 길가로 향했다.
  • 그런데 그때 갑자기 검은색 벤틀리 리무진 한 대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 차 문이 열리더니 머리가 반쯤 하얗게 센 한 중년 남자가 네 명의 보디가드들의 경호를 받으며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 자신을 찾아온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가은은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순간 그녀에게서 마치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던 듯한 고귀한 분위기가 풍겼다.
  • “이제 막 이혼하고 나온 참인데 이렇게 절 찾아오신 걸 보니, 정말이지 아버지의 권력이 대단하긴 한가 보네요.”
  • 집사인 안규진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깊이 허리를 굽혔다.
  • “아가씨, 회장님과 약속했던 3년이 됐습니다만…”
  •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가은의 손에 들려있는 이혼 서류를 힐끗 쳐다보더니 유감이라는 듯 말을 이어갔다.
  • “보아하니 한지혁 씨가 아가씨를 사랑하게 만들지는 못하셨나 보군요. 그렇다면 아가씨께서는 약속대로 서울로 돌아가 가업을 물려받으셔야 합니다.”
  • 가은은 눈살을 찌푸린 채 한참을 침묵했다.
  • 열다섯 살이 되던 그 해, 그녀는 누군가의 계략에 당해 기억을 잃고 떠돌다 인천의 한 보육원으로 가게 되었었다.
  • 그 후, 우연히 한지혁의 할아버지를 구해주게 되면서 그가 그녀를 한 씨 가문의 본가로 데리고 갔고, 그렇게 성인이 된 후 한지혁은 할아버지의 요구대로 그녀와 결혼을 했던 것이었다.
  • 한지혁과의 신혼 첫날밤 뜻밖의 일로 인해 그녀는 공교롭게도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우습게도 당시 마음속에 한지혁뿐이었던 그녀는 안규진과 함께 돌아가기를 거부했고 결국 아버지와 이 3년의 약속을 한 것이다.
  •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를 위해 흘려보낸 그 3년이라는 시간이 정말이지 너무도 아까웠다.
  • “회장님께서 아가씨를 정말 많이 보고 싶어 하십니다. 아가씨, 이제 회장님께 그만 화내시고 저와 함께 돌아가시죠. 회장님께서는…”
  • “안 집사님.”
  • 가은이 그의 말을 끊었다. 지나간 일을 언급하는 그녀의 표정은 더욱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 “아버지 곁에는 그 여자가 있고, 신 씨 가문에도 저 같은 한량은 굳이 필요 없잖아요. 전 아직 인천에서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전 안 돌아가요.”
  • 그녀는 지난 2년간 당시 누구 때문에 그녀가 기억을 잃고 인천까지 흘러들어오게 됐는지 조용히 조사해오고 있었고 그 사람이 높은 가능성으로 바로 신 씨 가문에 있다는 것까지는 알아낼 수 있었지만 정확히 누구인지는 아직 모르는 상황이었다.
  • 그리고 현재 적은 숨어 있고 그녀만 드러나 있는 상태에서 돌아간다는 건 너무 위험했다.
  • 더군다나 그녀는 그곳으로 돌아가 그 여자와 부딪히고 싶지도 않았다.
  • 안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 “아가씨께서 아직 회장님께 화나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실 거라던 회장님의 짐작이 맞았군요.”
  • 그는 말을 하면서 공손하게 프리미엄 블랙 카드를 한 장 꺼냈다.
  • “이건 아가씨의 카드입니다. 안에 들어있는 6조 원은 단 한 푼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그가 뒤에 있는 보디가드를 향해 손짓하자 보디가드가 신속히 새로운 계약서 하나를 가은에게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