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바람을 쐬러 나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도 연회장 안의 그 역겨운 분위기에 질식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은!”
갑자기 등뒤에서 울려 퍼진 날카로운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거들먹거리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지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아까 맞은 게 덜 아팠나 봐? 내가 그 느낌을 한번 더 복기시켜 주길 바라는 거야?”
그녀는 차가운 말투로 말을 내뱉으며 냉정하게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녀의 그런 말투에 한지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다못해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녀의 그 여시 같은 면상에 손톱자국을 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계획이 생각난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억지로 분노를 참아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루이비통 가방에서 은행카드를 한 장 꺼내 가은의 앞에 내밀며 시사하듯 말했다.
“안에 6천만 원 들었어. 다시는 우리 오빠 앞에서 얼쩡거리지 않고 지금 이 시간부로 인천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이 돈은 네 것이 될 거야.”
그 말에 가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지수의 손에 들린 카드를 바라보았다.
‘고작 6천만 원이라니, 이 신가은의 머리카락 한 올도 못 살 그 돈을 들고 와서는 나더러 인천을 떠나라고?’
그런 그녀의 표정에 한지수는 그녀가 마음이 동했다고 생각하고는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넌 어렸을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라서 이렇게 많은 돈은 본 적이 없지? 하지만 이 정도 돈은 나한테는 고작 일주일치 용돈에 불과해. 내 생각엔, 나보다는 너한테 이 돈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 그래. 내 기억이 맞다면 전에 엄마한테 돈 빌려달라고 한 적 있었지? 아쉽게도 엄마는 빌려주지 않았지만 말이야. 하지만 이제 잘 됐잖아. 이 돈이면 넌 뭐든 살 수 있어. 어때? 혹하지 않니?”
한지수는 흥분감으로 반짝이는 얼굴로 끊임없이 속으로 소리 없이 외쳤다.
‘빨리 돈 받아! 빨리 받으라고!’
그녀의 얼굴에는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전 한 씨 가문에 있을 때 오혜선이 가은의 용돈을 전부 다 가로챘던 탓에, 가은은 한 씨 가문에 있던 몇 년 동안 그럴듯한 명품 옷 한 벌 사 입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토록 가난한 가은이 분명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녀는 가은이 자신이 건넨 돈을 받기만 한다면, 연회가 끝나기 전에 돈을 도둑맞았다고 말하고 범인을 잡은 척 다시 경찰을 불러 그녀를 잡아가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일단 가은이 잡혀가면, 그녀는 유치장안의 사람을 매수해 가은을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팰 생각이었다.
겸사겸사 절도 전과까지 남겨준다면 가은은 평생 출세라고는 생각도 못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그녀는 더 이상 신난 표정을 감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받아. 아까의 일은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 사과할게. 이번엔 진심이야. 너 돈 필요하잖아. 그러니까 그냥 받아.”
고개를 갸우뚱한 채 그녀를 살피며 그녀의 모든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가은은 조롱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꺼내 신도윤의 비서인 임창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차 안에 둔 가방 안에 블랙 카드가 있어요. 은행에 가서 2억을 인출해서 가져다줘요. 저 정원에 있어요. 빨리 와줘요.”
“알겠습니다. 2분 안에 갈게요.”
확실한 답장을 받은 가은은 느긋하게 분수대 돌 담 위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신은 신경도 쓰고 있지 않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한지수가 조금 화가 난 듯 재촉했다.
“야. 도대체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거야?”
그러자 가은은 나태롭게 어깨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조금 더 기다려.”
“기다리라고?”
한지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너 대체 뭘 기다리고 있는 거야? 지금 네가 신도윤 대표한테 붙은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 사람은 기껏 해봐야 너랑 잠깐 놀려는 것뿐일 거야. 너 설마 신도윤같이 잘생기고, 돈 많고, 집안까지 좋은 남자가 너랑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녀가 여전히 조잘거리며 가은을 회유하고 있던 그때, 검은색 상자를 들고 온 임창민이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들고 있던 상자를 가은에게 건넸다.
“요구하신 물건입니다.”
한지수는 갑자기 나타난 낯선 남자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는 와중에,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가은이 임창민이 건넨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녀가 다시금 한지수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의 두 눈은 서늘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무자비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