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다은은 깊게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 그리고 막 입을 열려던 그때, 우렁찬 외침 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질투로 인해 치맛자락을 찢을 기세로 움켜잡고 있던 송민주는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고 기쁜 듯 외쳤다.
“큰오빠!”
‘큰오빠? 송진호?’
이 집안의 여섯 오빠들은 원래 몸의 주인인 송다은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학교에 갈 사람은 학교에, 출근을 할 사람은 출근 중으로, 누구 하나 오늘 이 파티에 참석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책에서는 이 큰오빠에 대한 묘사의 대부분이 그가 얼마나 송민주를 아끼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송진호가 갑자기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마도 송민주의 기를 살려주기 위함일 터였다.
이에 송다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무래도 그와는 멀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조용히 발끝을 들어 뒤로 살짝 물러났다. 기세등등한 모습의 이 남자는 아마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이곳으로 온 듯했다.
긴 비행과 긴 여정을 마친 그는 저택 안으로 들어서 그 조그마한 인영을 확인한 순간에서야 완전히 안도할 수 있었다.
‘다행이야, 늦지 않게 왔어! 다행이야, 다들 아직 이곳에 있어!’
송진호를 본 송민주는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눈시울을 붉히며 그에게 달려가서는 그의 옷자락을 잡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오빠, 드디어 돌아왔구나. 흑흑, 언니가 나 때렸어. 아빠랑 엄마는 상관도 안 하고, 흑흑…”
문을 들어선 순간부터 두 눈은 송다은을 줄곧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송진호는 송다은이 자신을 때렸다는 송민주의 갑작스러운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쟤가 널 때렸다고?”
이에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라 생각한 송민주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볼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걷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오빠, 이것 좀 봐봐. 언니가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흑흑… 언니가 자꾸 날 괴롭혀…”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얼굴 위에 남은 상처를 발견한 송진호의 표정이 순간 바뀌더니 곧이어 자신의 옷소매를 잡고 있던 송민주를 밀어냈다.
송민주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그의 강한 힘에 밀려 비틀거렸다.
이에 화를 내려던 그녀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따지려는 듯 송다은에게 다가가는 송진호를 보고는 다시 화를 억눌렀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민우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 역시 표정을 굳히며 조심스레 앞으로 몇 걸음 나섰다. 송진호가 손이라도 올리려 한다면 그를 막을 수 있도록 말이다.
더욱이 서희란과 송창규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송다은을 향해 다가가는 송진호를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송진호는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송다은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를 품 안에 단단히 감싸안은 그의 굳센 두 눈에 서서히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다은아, 다행이야, 네가 아직 살아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
‘송민주의 복수를 해주려는 거 아니었어?’
그녀가 한창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와중, 송진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속상하다는 듯 그녀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나직이 투덜거렸다.
“너 바보야? 집안에 고용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뭐 하러 네가 직접 손을 올려? 아프진 않아?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송민주는 물론 송다은 본인 역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의 흐름도 왜인지 어딘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책에서는 큰오빠가 송민주를 과할 정도로 아낀다고 나와 있지 않았나? 근데 왜 지금은 날 이렇게 살뜰하게 대하는 거지?’
그 모습을 본 송민주의 핏발이 선 두 눈이 질투로 이글거렸다. 표정 역시 일그러지다 못해 악마 같아 보이기도 했다.
‘대체 왜? 저 촌스러운 계집애가 엄마 아빠의 관심을 받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민씨 가문 어르신의 비호에 이제 막 돌아온 큰오빠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잖아. 안돼! 큰오빠는 내 마지막 지푸라기란 말이야! 이렇게 잃을 수는 없어.’
“오빠! 내가 민주야! 어제 오빠가 나한테 전화해서 오늘 나 기 살려주러 온다고 했잖아?!”
송민주가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그러자 송진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그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뼈를 에는듯한 한기만이 가득했다.
“어디서 목청을 높여? 평소 그 큰돈을 들여가며 배운 예절은 개나 줘버린 거야?”
송민주에게 한 소리 하고 난 송진호는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그 자신조차도 믿어지지 않지만, 송씨 가문의 파산과 거리로 내몰렸던 시간들, 그리고 송다은의 지원 덕에 다시 재기했었던 그 모든 일들을 겪고 난 뒤, 그는 다시 지금 이 시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그의 후회를 만회하도록 하늘도 돕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번 삶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송다은을 잘 보살필 생각이었다.
그런 그에게 한 소리 들은 송민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두 눈에 서러움의 눈물을 가득 담은 채 말을 내뱉었다.
“오빠, 언니가 날 때린 거야. 언니가 먼저 때린 거란 말이야!”
그녀는 자신이 지금처럼 이런 서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면 송진호가 곧바로 그런 자신을 가슴 아파할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망스럽게도 송진호의 차갑기만 한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다은이가 철부지도 아니고, 절대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때리지는 않아. 분명 네가 다은이를 화나게 했겠지.”
송진호의 기세는 엄청났다. 그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그곳에 있던 누구도 감히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빠…!!! 엉엉엉, 다들 미워!”
아무리 제멋대로라도, 송민주도 결국에는 어린 여자애일 뿐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꾸짖음을 당한 그녀는 부끄러움에 발을 구르더니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버렸다.
송다은은 말없이 송진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가 너무 강하게 잡고 있었던 데다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하고 있어 몇 번을 시도했지만 끝내 성공은 하지 못했다.
“오빠, 저기… 민주한테 안 올라가 봐?”
현재의 송진호는 이미 다정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뀌어있었다. 조금 전의 그 사납던 얼굴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다정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송다은을 바라보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착하지, 무서워하지 마. 오빠가 끝까지 곁에서 지켜줄게.”
송다은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어딘가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그녀가 미처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송진호는 몸을 돌려 한쪽에 있는 민태호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하더니 예의 바르게 말을 꺼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전히 정정하시네요.”
그러자 민태호는 마치 토라져 버린 어린아이처럼 차갑게 코웃음 쳤다.
“흥.”
송진호는 이를 못 들은 척하며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으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까 듣자 하니 어르신께서 농담 삼아 어릴 적 오갔던 혼담 얘기를 꺼내셨다죠. 하지만 다은이는 아직 어리니 그 이야기는 이른 것 같습니다.”
‘웃기지도 않는군. 우리 다은이는 이제 고작 열일곱에 아직 성인도 아닌데, 저 민씨 가문 손자는 벌써 스물셋이라고. 이미 다 늙어 빠진 남자인데 우리 다은이한테 가당키나 해?!’
그런 그의 말에 민태호는 순간 다시 차갑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송씨 가문에서 장기 내기에 져놓고 지금 발뺌하려는 건가?”
송진호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르신, 지금은 이미 부모님이 맺어주는 대로 군말 없이 결혼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다 자기에게 맞는 짝이 있기 마련이죠. 저희 동생은 아직 어려 정혼과 결혼을 얘기하기엔 확실히 조금 이른 감이 있습니다. 게다가 다은이는 아직 학생이라 수능에 지장을 줄 수는 없죠. 그렇지 않습니까?”
민태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 송씨 가문의 손자가 만만한 상대는 아님을 느꼈다. 단 몇 마디 말로 그가 한 모든 말을 반박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더 무언가를 말했다가는 오히려 그가 무례해 보일 터였다.
이에 그는 순간 화가 치밀어올라 목까지 시뻘게졌다. 그는 지팡이를 들어 옆에 있는 자신의 손자를 쿡쿡 찌르며 뭐라도 해보라는 듯 헛기침을 하더니 그를 사납게 노려보기도 했다.
‘이 못난 놈아, 얼른 무슨 말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이대로 내 손자며느리를 놓쳤다가는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릴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