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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는 셈 치고, 악녀 연기 해줄게

속는 셈 치고, 악녀 연기 해줄게

밍느

Last update: 2025-04-14

제1화 여동생분께서 사망하셨습니다

  • “안녕하세요, 여기 서울대병원인데요. 여동생이신 송다은 님께서 저희 병원에서 사망하신 지 벌써 3일째라서요. 이른 시일 안에 병원에 방문하셔서 화장동의서에 사인을 해주셔야 해요. 안 그러면 저희 쪽에서…”
  • 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늘씬하고 커다란 손 하나가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던 여섯 명의 오빠들은 그 소식에도 마치 죽은 것이 그들의 친여동생이 아니라는 듯이 전혀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 “허허, 아마 우리한테서 돈을 뜯어내려고 또 무슨 새로운 꿍꿍이를 생각해 낸 거겠지.”
  • 이와 같은 말을 내뱉은 사람은 스타일리시하게 염색한 회색 머리에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죽은 송다은의 다섯째 오빠이자 한국의 최연소 남우주연상 수상자였다.
  • “그러니까. 송씨 가문이 파산하고 우리 모두 거리로 내몰렸을 때도 민주 혼자 해외에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집안의 생계를 책임졌었잖아. 송다은 걔는 그때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서 보이지도 않더니, 이제 우리한테 돈 좀 있으니까 또 돈 달라고 수작 부리는 거야!”
  • 넷째인 송재우가 맞장구쳤다. 그는 현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최연소 원사이자 연구원의 교수였고, 그가 말하는 민주는 바로 송씨 가문의 양녀인 송민주였다.
  • 오래전 어린 딸을 잃어버리고 매일 같이 우울해하던 그들의 어머니인 서희란이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그들의 아버지인 송창규가 보육원에서 입양해 온 딸이었다.
  • 그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이블 위에 올려둔 검은색 휴대폰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 휴대폰의 주인은 깔끔한 정장 차림의 잘생긴 남자였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보노라면 알 수 있겠지만, 그는 경제 잡지에 자주 등장하는 남자로, 상업계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 그는 2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만에 몰락해 버린 기업을 멱살 잡고 세계 5대 기업의 반열에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 첫째인 송진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에서 또다시 조금 전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대병원입니다. 조금 전 송다은 님의 다섯째 오빠분한테 전화드렸었는데 끊어져 버려서요. 송다은 님 휴대폰에 큰오빠라고 저장되어 있는 걸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병원에 오셔서 송다은 님의 화장동의서에 사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시신이 저희 병원에 너무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어서요. 오셔서 처리해 주지 않으시면 저희 쪽에서도 곤란합니다. 양해 부탁드릴게요.”
  • 병원 관계자의 목소리는 의견을 구하는 듯 꽤 조심스러웠다. 이 업계에서 십 년을 가까이 일해온 그녀로서도 이런 가족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 “네, 알겠습니다.”
  •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낮게 깔린 목소리에 병원 관계자는 순간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수화기에서는 곧이어 규칙적인 신호음이 흘러나왔다.
  • 송진호가 전화를 끊자, 셋째인 송규민이 곧바로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 “아니, 형, 진짜 가보려고?”
  • 그러자 송진호는 우아한 동작으로 물티슈를 집어 들어 손을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응. 내가 가볼게.”
  • 그 말에 빈말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알고 있던 송규민은 하는 수 없이 눈을 흘기며 본인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 “나도 같이 가.”
  • 그들의 큰형은 사업을 할 때는 무자비하고 단호한 오너였지만 친남동생들과 친여동생의 일에서는 쉽게 마음이 약해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 ‘나도 따라가야지 안 되겠어. 송다은 그 영악한 계집애한테 돈을 뜯어낼 기회 같은 걸 줄 순 없지!’
  •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머지 네 남자도 수저를 내려놓았다.
  • “우리도 가보자. 그 계집애가 무슨 수를 써서 병원까지 자기 연극에 동참시켰는지 알고 싶네!”
  • 병원. 그들이 송다은의 가족들임을 확인한 간호사는 행여 시간을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그들이 그대로 돌아서 가버릴까 봐 급히 그들을 안치실로 안내했다.
  • 안치실 안은 음침하기 그지없었다. 매일 같이 소독을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썩은 내가 은은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 이에 여섯 남자는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간호사가 한 방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세장의 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그중 한 침대 위에만 흰 천으로 덮인 시체가 한 구 누워있었다.
  • “이게 송다은 님의 시신입니다. 가지고 돌아가서 직접 처리하시겠어요, 아니면 병원 측에서 화장을 진행할까요? 병원에서 화장을 해드리려면 가족분께서 화장동의서에 사인을 해주셔야 하고, 10만 원의 화장 비용을 지불하셔야 해요.”
  • 나이가 가장 어린 여섯째 송시훈은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
  • “얘… 정말 죽은 거야?”
  • 셋째 송규민이 차갑게 코웃음 치더니 팔을 걷어붙이며 앞으로 나섰다.
  • “진짜인지 아닌지 보면 알겠지.”
  • 그는 의학원에서 인정받는 의학 천재였다. 암도 완치가 가능한데 단순히 사람의 생사 정도 판단하는 일쯤은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촤락-
  • 흰 천이 걷히고, 옅은 회색빛이 감도는 누렇게 뜬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굉장히 야윈 모습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빼빼 마른, 뼈밖에 남아있지 않은 모습이라고 해야 맞는 말일 것 같았다.
  • 송다은이었다. 그 모습에 송규민뿐만 아니라 나머지 다섯 명도 충격에 휩싸인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 송다은은 진짜 죽은 것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 멍하니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간호사가 재촉하듯 다시 물었다.
  • “여러분, 대체 어떻게 처리하실 거냐고요?”
  • 그 말에 여섯 남자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송진호가 입을 열었다.
  •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병원에서 화장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 이를 들은 간호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알겠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데려가 주세요. 이분 이미 저희 병원에 3일이나 계셨어요.”
  • 여기까지 말하던 간호사는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 “아, 맞다, 송다은 님 유품은 아직 541호 병실에 있으니까, 그것들도 함께 가져가 주세요.”
  • 그들이 찾아갔을 때, 541호 병실에는 함께 병실을 사용했던 할머니 한 분뿐이었다. 그녀는 그들 여섯 명을 보자 바로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 “아이고, 청년들이 다은이 오빠들이지? TV에 나오는 모습과 똑같이 아주 잘생겼네.”
  • 그러자 넷째 송재우가 놀라며 물었다.
  • “저희를 아세요?”
  • 이에 할머니는 말을 이어갔다.
  • “알다마다. 다은이가 살아있을 때 오빠들 얘기를 많이 했었어. 자기 오빠들이 엄청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모두 자기 친오빠들이라면서 말이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몰라.”
  • ‘송다은이 우리를 칭찬했다고?’
  • “에휴, 그런데 다은이 그 애가 팔자가 기구했지. 그 어린 나이에 몸에 병이 안 든 곳이 없었으니.”
  • 여기까지 얘기하던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침대 옆 서랍에서 철로 된 상자를 하나 꺼냈다.
  • “아참, 이건 다은이가 나한테 맡긴 거야. 자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나한테 시간이 있으면 돈을 부쳐달라고 부탁하더라고. 그런데 이 늙은이가 그런 걸 알겠어? 손자 녀석이 오면 나 대신 부쳐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온 김에 자네들이 가져가면 되겠네.”
  • 송진호는 그녀에게서 상자를 건네받았다. 무겁지도 않았다. 찻잎을 담는 철 상자였는데, 이미 여기저기 녹이 슬어있었고, 겉면의 칠도 적잖이 벗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