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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작은 고슴도치

  • 그런 할아버지의 신호를 받은 민우진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
  • “송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확실히 조금 경솔한 부분이 있는 것 같군요.”
  • 그의 유도리한 모습에 송진호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 대표님.”
  • 그의 말을 들은 송다은은 완전히 안도한 듯 잔뜩 긴장하고 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그녀는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어딘가로 시집보내지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 상대가 눈앞의 이 딱 봐도 쉽지 않아 보이는 남자라는 건 더더욱 싫었다.
  • 아까 정원에서 그를 그렇게 협박했으니 정말 그와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가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 당연하게도 민우진 역시 송진호의 등 뒤에서 안도하고 있는 송다은의 모습을 발견한 상태였다.
  • 그런 그의 얼굴에 순간 의미심장함을 담은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 ‘급할 것 없어. 작은 고슴도치가 가시를 거두게 해야만 가장 부드러운 뱃살을 만지게 해주는 법이니까.’
  • ……
  • 다음날, 송다은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모두들 이미 식탁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녀를 발견한 송민주는 반가움 가득한 얼굴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만 눈은 아직 조금 부어있는 상태였다.
  • “언니, 좋은 아침이야.”
  • 지나치게 친근한 척하는 말투에 송다은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송진호가 그녀를 향해 손짓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다은아, 여기 내 옆에 앉아.”
  • 송다은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송진호는 깔끔하게 깐 계란을 그녀의 접시 위에 놓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다은아, 계란 먹어.”
  • 하지만 송다은은 약간의 거부감을 드러내며 삶은 계란을 바라보았다.
  • 찌푸려진 그녀의 미간에는 싫은 기색이 가득했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삶은 계란이었다. 특히나 노른자를 가장 싫어했다.
  •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녀는 배우였고, 이에 몸매를 유지해야 했던 그녀는 매일 같이 무조건 먹어야 했던 것이 바로 삶은 계란이었다. 이에 그녀는 삶은 계란에 트라우마가 생길 지경이었다.
  • “언니, 어젯밤에는 잘 잤어? 엄마가 그러셨는데, 언니 방은 내 방을 따라 배치한 거래. 적응이 되는지 모르겠네.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내가 바꿔줄게.”
  • 송민주는 꽤 적극적이었다. 송다은은 송민주의 그 유달리 거슬리는 목소리만 들으면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 아침의 좋았던 기분이 접시 위의 삶은 계란과 눈앞의 송민주, 이 두 존재로 인해 말끔히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 송민주의 말은 어떻게 들어도 송다은은 그저 자신의 대타일 뿐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 ‘허, 유치하기는!’
  • 하지만 현재 어젯밤의 일은 다 잊은 듯 생기 넘치는 송민주의 모습으로 보아 아침에 송창규와 서희란이 그녀를 이미 달래 놓은 모양이었다.
  • ‘흠, 아주 바보는 아닌 것 같네.’
  • 송다은이 아무리 철없이 굴더라도 결국에 그녀는 부모님의 친자식이었기에 일단 이 집에 돌아온 이상 그들은 그녀를 다시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 하지만 송민주는 달랐다. 애초에 그녀는 송씨 가문에 입양된 아이였고, 지금까지 그녀를 키워준 것만 해도 서희란과 송창규는 이미 해야 할 도리를 다한 것이었다.
  • 그렇기에 송창규와 서희란의 눈 밖에 나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 송씨 가문에 있으면서 송민주가 해왔던 생활은 그야말로 먹는 것, 입는 것 걱정 없이 호의호식하는 부잣집 아가씨의 삶이었다.
  • 송씨 가문을 떠난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었고, 매일 버스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등교하고, 작은 월셋집에서 생활하는 삶을 그녀가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 하지만 단순하고 착한 심성의 서희란은 그런 송민주의 말속에 담긴 뜻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 “다은아, 부족한 거 있으면 엄마한테 얘기해.”
  • 송다은은 송민주는 싫었지만, 엄마인 서희란은 굉장히 좋았다. 이에 자신을 신경 써주는 그녀의 말에 굳어져 있던 송다은의 표정이 곧바로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 “어젯밤 아주 잘 잤어요. 걱정하실 것 없어요, 엄마.”
  • 그 말에 서희란은 안도했다.
  • “그렇다니 다행이야.”
  • “아참, 언니. 아까 아빠랑 엄마가 언니한테 어느 고등학교에 갈 건지 묻고 싶어 하셨어. 내 친구가 경운고등학교에 다니는데, 언니가 거기로 가고 싶다고 하면 내가 그 친구들한테 얘기해서 언니를 잘 챙겨달라고 할 수도 있어.”
  • 송민주가 싱긋 웃음 지으며 말했다.
  • 서울 경운고등학교는 그래도 갖출 건 다 갖추고 있는 고등학교로 너무 좋지도, 그렇다고 너무 나쁘지도 않은 학교였다.
  • 하지만 송민주의 말에 송진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의 친여동생을 그 정도로 급 낮은 학교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 “경운고등학교는 가지 마. 거긴 시설이 너무 안 좋아. 다은아, 오빠가 세진고등학교 교장이랑 아는 사이야. 오빠가 그 학교에 실험실 건물을 한 채 기부했었거든. 그러니까 그 학교에 다니는 건 어때?”
  • 송진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세진고등학교는 서울에서는 명실상부한 귀족학교였다.
  • 재학생들도 전부다 재벌이나 고위 관료의 자제들이었고, 그들이 학교에 다니는 목적은 단지 졸업장 하나 따기 위함일 뿐, 그들에게 성적은 딱히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면 곧바로 해외에서 대학을 다니게 될 테니 말이다.
  • 송다은은 송진호가 자신을 위해 한 말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다시 새롭게 삶을 살 기회를 얻은 지금 그녀는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 “오빠, 난 세진고등학교는 다니고 싶지 않아. 난 서원고등학교에 다니고 싶어.”
  • 송다은의 단호한 한마디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서원고등학교는 영재들만 모여있기로 명성이 자자한 학교였다. 졸업생 중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들의 비율이 98%나 되는 학교였기에 모두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들어가고 싶어 하는 학교이기도 했다.
  • 하지만 서원고등학교의 교장 또한 고지식하고 고집스럽기로 유명한 사람으로, 빽으로 입학하는 건 절대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 하물며 시장의 외동아들조차도 규정대로 입학시험에 참가했었고, 성적이 모자라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입학하지 못했었다.
  • “거긴…”
  • 송진호는 난감해했다. 송민주는 가볍게 냉소를 터트리더니 생각해서 말해주는 척 입을 열었다.
  • “언니, 서원고등학교는 다니고 싶다고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아니야. 당시 나랑 시훈 오빠도 그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1년 동안 새벽까지 공부를 했었다고.”
  • 으스대는 듯한 말투가 그 말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대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더라도 그녀도 그저 마침 아슬아슬하게 합격 점수를 넘겨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 “게다가 지금은 수능이 2달밖에 안 남은 시기라 서원고등학교의 공부 스트레스를 언니는 견디지 못할 거야.”
  • 그런 그녀의 말에 송다은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두 눈에는 비웃음이 조금도 감추려는 기색 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 “그래? 그럼 너랑 시훈 오빠가 머리가 나쁜가 보네.”
  • “너!!!”
  • 송민주는 화가 잔뜩 난 듯 목까지 빨개져서는 소리쳤다.
  • 비록 등수가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서원고등학교에 다닌다는 말을 들으면 모두가 앞날이 창창하다며 그녀를 칭찬했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머리가 나쁘다고 평가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 송다은은 그런 그녀의 분노는 무시해 버린 채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오빠, 난 이미 결정했어. 서원고등학교에 다닐 거야. 걱정 마, 내 실력으로 서원고에 붙을 거니까.”
  • 이미 마음을 굳힌 듯한 그녀의 모습에 송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오빠는 널 믿어. 다만, 너무 부담 갖지는 마. 오빠 돈 많아. 너 하나 먹여 살리는 것쯤은 충분하고도 남으니까, 네가 남은 인생 아무것도 안 하고 먹고 놀기만 해도 오빠는 널 먹여 살릴 수 있어.”
  • 그는 현재 하다못해 송다은을 남은 평생 동안 먹여 살림으로써 지난 삶의 여한을 채우고 싶었다.
  • 그는 다시 돌아온 뒤로 회사의 파산을 초래했던 프로젝트들에 대해 다시 평가를 진행하거나 아예 프로젝트 진행을 막았었고, 거기에 지난 삶에서 새롭게 창업을 했던 경험도 있었기에 이번에는 송씨 가문이 절대 파산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 하지만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던 송다은은 자신을 먹여 살리겠다는 그의 말에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 책에서 송씨 가문의 파산에 대해 묘사했던 내용을 생각하면 나중에 누가 누구를 먹여 살리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사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확신에 차 있는 이유는 단순히 송민주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하게는 그녀는 확실히 자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지난 삶 연예계에서 그녀는 엘리트의 이미지였지만 당시 그녀는 대학에 가지 못했었다. 그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 그녀는 죽기 살기로 공부했었고 끝내는 성공적으로 하버드대 박사학위를 따내며 자신의 이미지를 확고히 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