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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협박당했다

  • 송다은은 그 ≪나의 여섯 명의 오빠들≫이라는 책을 끝까지 읽은 것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조금 읽어 본 정도였기에, 앞에 있는 민태호를 제외하고는 그녀가 읽은 부분에서는 민씨 성을 가진 다른 인물은 본 적이 없었다.
  • 이에 그녀는 초반부에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라면 아마 행인 1 정도의 인물일 것이라 생각했다. 남자주인공과만 얽히지 않으면 상관없다고 말이다.
  •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서희란과 송창규 역시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에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웃는 얼굴로 민태호에게 사과하며 아이들끼리의 다툼일 뿐이라 설명했고, 송민주더러 송다은에게 사과하도록 했다.
  • 하지만 끝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깔보는 사람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던 송민주는 결국 송다은을 끌고 정원으로 향했다.
  • 송민주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정원에 멈춰 서더니 심호흡을 세 번 하고 난 뒤에야 이를 악물고 말을 내뱉었다.
  • “미안해, 언니. 내가 철이 없었어. 그러니까 나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응?”
  • 송다은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 ‘송민주 이 계집애 쪽팔린 건 아나 보네. 이렇게 구석진 곳으로 와서 사과하다니 말이야. 정말이지 어려운 일 했네! 다만… 이렇게 좋은 위치에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애써 날 이곳까지 데리고 온 송민주한테 너무 미안하지 않겠어?! 훗!’
  • 이에 송다은은 침착하게 손을 들어 올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는 송민주의 오른쪽 얼굴을 향해 세차게 내려쳤다.
  • “송민주, 이건 네가 날 모함한 데에 대한 몫이야!”
  • 곧이어 송민주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는 다시 손을 들어 올려 송민주의 왼쪽 뺨을 거세게 내려쳤다.
  • “송민주, 이건 네가 은혜도 모르고 가족들을 배신한 데에 대한 몫이야!”
  • 송씨 가문이 그렇게 순식간에 파산했던 이유가 바로 송민주가 경쟁 회사의 한 젊은 남자와 공모했기 때문임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 심지어 송민주는 마지막 순간에 집안의 목돈을 몰래 챙겨 해외로 도망가기까지 했었다.
  • 사실 성질대로라면 그녀는 송민주를 때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다만 서희란은 그녀의 어머니와 너무 닮아있었고, 그녀는 책 속에서 항상 우울해하다 결국 그 우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으로 묘사되었던 탓에 서희란만 생각하면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 넋이 나간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던 송민주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송다은을 찢어버릴 기세로 미친 듯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 “이 천한 년이 감히 날 때려?! 죽여버릴 거야! 아아악! 이 천한 년!”
  • 송다은은 비록 마른 몸이긴 했지만, 전에 연기를 하면서 적지 않은 격투 기술들을 배운 적이 있었기에 도둑을 잡을 때 우선 어디를 붙잡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 이에 그녀는 대충 손을 뻗어 송민주의 어느 한 혈 자리를 잡아 그녀가 달려드는 것을 제지한 뒤, 그녀의 머리를 강하게 잡아당긴 채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 “송씨 가문에 계속 있고 싶으면 얌전하게 굴어. 괜한 속셈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렇지 않으면 난 비명에 죽은 여동생 하나쯤 있는 건 개의치 않을 거니까.”
  • 그녀의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뼈를 에는 듯한 날카로움이 담긴 그녀의 눈빛은 마치 지옥에서 나온 마귀 같았다.
  • 그런 그녀의 표정에 겁을 먹은 송민주는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 “너… 너…”
  • ‘허허!’
  • 송다은은 단숨에 그녀를 뿌리치고는 태연하게 호주머니에서 물티슈를 한 장 꺼내 자신의 손을 꼼꼼하게 닦아냈다.
  • ‘더러워! 정말이지 더러워 죽겠어!’
  • 한편, 정원의 동남쪽 모퉁이에서는 한 남자가 관심 없는 듯한 모습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 그는 입술을 말아 올리며 그녀가 선택한 사나운 수단이 자신과 어딘가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 그런 그의 손에 들려있는 휴대폰에서는 아직도 재촉하는 듯한 말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도련님, 아직이십니까? 장교님께서 또 역정을 내셨습니다!”
  • 민우진은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거두어들였다.
  • “네, 곧 도착합니다.”
  • 한편, 뺨을 두 대나 맞은 송민주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어딘가로 달려갔다. 아마도 이 일을 일러바치러 집안으로 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이에 송다은은 차가운 냉소를 터트렸을 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우아하게 손을 닦은 물티슈를 버리고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그녀는 깊고도 차가운 두 눈과 마주쳤다.
  • 영혼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은 눈이었다. 송다은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이 송민주의 뺨을 내려치던 모습을 이 남자가 다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 이에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쥔 뒤 엄지손가락을 빼 들고 목 앞에 그어 보였다. 굉장히 명확한 협박의 의미였다.
  • 그리고는 눈앞의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몸을 돌려 홀 안으로 들어갔다. 민우진의 새까만 두 눈이 짙은 흥미로 번뜩였다.
  •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분에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 ‘나 방금 협박받은 건가?’
  • ……
  • 문 안으로 들어선 송다은은 곧바로 서희란과 송창규를 끌어안은 채 얼굴을 감싸 쥐고 울고 있는 송민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아빠, 엄마, 언니 좀 봐요, 언니가 날 때렸어요. 엉엉… 너무 아파요…”
  • “허허, 그깟 작은 상처 하나 가지고 질질 짜기는. 이래서야 다 큰 규수라고 할 수 있나! 나 때는 다리에 총을 세 발이나 맞고도 찍소리 한번 안 했다고!”
  • 민태호가 기고만장하게 말을 내뱉었다.
  • “이거야 원…”
  • 이에 송창규와 서희란은 위로를 하고 싶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 말을 마친 민태호는 고개를 들어 한 곳을 쳐다보더니 순간 오만하게 코웃음 치며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 “못난 놈, 얼른 튀어오지 못해!”
  • 그러자 고급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민태호의 앞으로 다가왔다.
  • “할아버지, 몸이 편찮으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병원에 가보실래요?”
  • 송다은은 어리둥절했다.
  • “?”
  • ‘잠깐, 이 남자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아까 정원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잖아!’
  • 송다은은 머리가 띵 하고 울리는 것만 같았다.
  • ‘망했어! 내가 어르신 앞에서 다져놓은 연약한 숙녀의 이미지가 가짜라는 걸 저 자식한테 들킨 거잖아!’
  • 그때 갑자기 민태호가 송다은을 향해 손짓했다.
  • “얘야, 이리 오너라.”
  • 송다은은 깊게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에게 다가갔다.
  • “어르신.”
  • 그 모습에 민우진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현재 그녀의 모습은 아까 정원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얌전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가시를 거두어들인 작은 고슴도치처럼 말이다.
  • “우진아, 전에 너랑 송씨 가문 여식이 어렸을 때 혼담이 오갔었다고 했었지? 이 아이가 바로 네 약혼녀다. 서로 인사하거라.”
  • 민우진은 기가 막혔다.
  • “……”
  • 송다은 역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 “……”
  • 다른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 “……”
  • 민우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민태호를 바라보았다.
  • “할아버지, 전 왜 이 일에 대해 모르고 있었죠?”
  • 그는 막론하고 서희란 부부조차도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 “어르신, 뭔가 잘못 아신 거 아닐까요?”
  • 그러자 민태호는 코웃음 쳤다.
  • “이 늙은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십몇 년 전 송 회장이 나와 장기를 두다 져서 이 집 손녀를 우리 민씨 가문에게 주기로 했지. 흥, 왜 그러지? 발뺌이라도 하려는 건가?”
  • ‘장기 내기에서 졌다고? 그것도 혼담으로 칠 수 있는 건가?’
  • “그게…”
  • 시선을 주고받은 송창규와 서희란은 서로의 눈 속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을 읽어낼 수 있었다.
  • 송다은의 할아버지와 민태호는 전우였다. 두 사람은 자주 함께 장기를 두곤 했었고, 내기에서 지는 것도 확실히 드문 일은 아니었다.
  • 하지만 손녀를 내기에 걸었다는 말은 그들로서는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송다은의 할아버지는 현재 해외에서 병 치료 중이었던 터라 사실확인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 민우진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송다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할아버지, 제가 보기에 이 아가씨는 이 혼담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은데요? 내키지 않는 얼굴이잖아요.”
  • 그의 입꼬리는 미소를 머금은 채 위로 말려 올라가 있었다. 보면 볼수록 얄밉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 송다은은 이가 갈렸다.
  • ‘저 자식 일부러 저러는 거야!’
  • 서희란이 송다은을 바라보며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
  • “다은아, 넌 이 혼담에 동의하니?”
  •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