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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소설 속 나쁜 여동생에 빙의했다

  •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가지런히 겹쳐 고무줄로 묶어놓은 지폐 한 뭉치가 들어있었고, 그 아래에는 계좌번호가 적힌 종이 한 장과 낡은 노트 한 권이 있었다.
  • “어, 형, 이거 민주가 우리한테 돈 보내주는 그 계좌 아니야? 이게 왜 송다은한테 있는 거지?”
  • 송시훈이 깜짝 놀라며 말을 내뱉었다. 송진호의 차가운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있지 않았다. 하지만 상자를 든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순간 머릿속에 파도가 밀려오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그는 노트를 펼쳤다. 노트를 펼치자, 그 안에는 예쁜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 5월 19일, 날씨 맑음. 큰오빠네 회사가 위기라는 소식을 들었다. 4천만 원의 손해를 봤다는데, 분명 오빠는 엄청 속상하겠지. 어떻게 하면 최대한 빨리 4천만 원을 벌어서 오빠한테 보낼 수 있을까?
  • 5월 30일, 날씨 흐림. 오빠들한테 보내줄 생활비가 거의 떨어져 간다. 난 6월 말이 되어야 알바비를 받을 수 있는데, 사장님이 알바비의 일부분을 가불해 줬으면 정말 좋겠다.
  • 7월 3일. 재우 오빠한테서 보고 싶다고 문자가 왔다. 너무 행복하다. 하지만 차마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민주한테 전화했는데 걘 해외에 있어서 아예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나도 오빠가 보고 싶다.
  • ……
  • 일기의 주인은 종이를 아끼기 위해서인지 아주 작은 글씨로 글들을 적어놓았지만, 그녀의 희로애락이 전부 그 속에 담겨있었다.
  • 더 뒤로 넘기면 그녀의 가계부가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가장 초반에 기록된 부분을 보면 놀랍게도 당시 그녀는 혼자 5가지 일을 했었고, 유일한 휴식시간이라고는 이동하는 지하철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었던 듯 보였다.
  • 그렇게 그녀는 한 달에 4백만 원도 더 넘게 벌었지만, 본인이 쓴 돈은 단돈 만원뿐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형제들의 계좌로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 그 시기는 송씨 가문이 파산했던 시기로, “송민주”가 형제들에게 가장 자주 돈을 보내주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거의 요구하는 대로 다 보내주는 정도로 말이다.
  • 당시 회사를 막 설립했던 송진호는 여기저기에서 압박을 받아 무척이나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었고, 그때 그 사실을 알게 된 “송민주”가 곧바로 그에게 4천만 원을 보내주어 힘든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었다.
  • 그리고 당시 송진호는 해외에 있는 송민주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소식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했었다.
  •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 딱히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었고, 그저 송민주가 형제들의 소식에 유달리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 그 이후, 둘째인 송승현이 디자인을 배울 때, 셋째 송규민이 의학원에 들어갔을 때, 넷째 송재우의 연구비용과 다섯째 송세준의 연예계 데뷔, 그리고 여섯째인 송시훈의 학비까지… 전부 다 송민주가 돈을 대주었었다.
  • 그녀는 항상 그들에게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듯했다.
  • ‘정말로 우리를 도와줬던 건 민주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나 싫어했던 송다은이란 말이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송다은 걔가 아무리 돈을 잘 벌었더라도 한 번에 몇천만 원씩 내놓을 수 있었을 리가 없잖아? 이건 어쩌면 속임수 일지도 몰라!’
  • 노트를 뒤로 더 넘기자, 그곳에는 몇 장의 종이가 접힌 채 페이지 사이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종이를 펼치자, 매 한 장의 종이 위에 적혀 있는 제목들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 ≪신장 판매 동의서≫, ≪신약 테스트 피험자 동의서≫, ≪혈액 판매 동의서≫…
  • 눈에 거슬릴 정도로 새빨간 글씨로 적혀있는 제목들이었다. 그리고 그 종이들에는 모두 송다은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 왜 송민주가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그들의 전화를 받지 않았었는지, 왜 형제들에게 돈이 필요할 때마다 송민주는 항상 곧바로 이를 알아차린 듯한 느낌이었는지, 왜 매번 돈을 보내온 계좌가 항상 국내 계좌였는지… 이제야 그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 같았다.
  • 우르릉 쾅-
  • 커다란 소리와 함께 태풍이 부는 듯 창밖의 하늘에 어둠이 드리웠다.
  • ……
  • 촬영장에 있던 송다은은 ≪나의 여섯 명의 오빠들≫이라는 제목의 연애 소설을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그 소리에 옆에 있던 매니저는 깜짝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 “이 소설 작가 내 안티 아니야? 이름이 똑같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마지막에 날 처참한 모습으로 죽여버리기까지 하다니! 그리고 이 여섯 오빠들은 바보야? 대단한 사람들이라며? 이렇게 멍청한데 대단한 사람들은 개뿔. 그리고 역하렘물이라며? 대체 누가 중심인 건데? 그 멍청한 송민주? 그리고 말이야. 이 송다은이라는 애도 바보인 건 마찬가지지. 돈을 왜 보내주는 건데? 그 여섯 오빠들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 말할수록 화가 치미는 듯 송다은은 잔뜩 화가 난 채 연신 씩씩거렸다. 그러더니 결국 들고 있던 책을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
  • “가져가서 버려. 아니, 태워!”
  • 그래 봬도 그녀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인기 여배우였고, 크고 작은 루머들 역시 적잖이 보아왔었다.
  • 그때마다 그녀는 항상 웃어넘겼었고, 스스로도 그만하면 멘탈이 강한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오늘 그 책 한 권 때문에 잔뜩 화가 나 있는 것이었다.
  • 이에 책을 넘겨받은 그녀의 매니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 “네? 정말 뒷부분 내용은 안 읽어보실 거예요? 이 뒤에 여섯 오빠들이 다시…”
  •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송다은이 그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 “읽긴 뭘 읽어. 난 한 글자라도 더 읽을 생각만 하면 짜증이 솟구친다고. 됐어. 얼른 정리하고 촬영하러 가자.”
  • “네…”
  • 매니저는 하는 수 없이 그 책을 잠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송다은을 따라나섰다.
  • 두 사람이 대기실을 나서기가 무섭게 방금까지만 해도 밝은 햇살이 내리쬐던 하늘에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곧이어 하늘이 검게 변하며 강한 바람이 불어 치기 시작했다.
  • 이에 송다은은 예고도 없이 변하는 6월의 날씨를 감탄하며 앞 몇 걸음 더 내디뎠다.
  • 그러던 그때, 갑자기 어딘가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 “다은 언니, 얼른 비켜요! 광고판이 떨어지려고 해요!”
  • 하지만 커다란 바람 소리에 실려 온 웅얼거리는 소리를 송다은은 정확하게 듣지 못했고, 다음 순간 머리 위에서 강한 고통이 느껴지더니 눈앞이 새까매졌다.
  • ……
  • “언니, 정신 좀 차려봐. 무슨 일이야, 언니?”
  • 시끄럽게 조잘대는 소리에 송다은은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눈을 뜨자,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여러 장비로 가득한 세트장이 아닌 반짝이는 조명들로 가득한…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 ‘뭐지? 나 지금 촬영장에 있는 거 아닌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여긴 어디지?’
  • 송다은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언니, 왜 그래? 뭘 기다리고 서 있는 거야? 엄마가 언니더러 엄마 방에 가서 그 빨간색 나무 상자 좀 가져오래. 급하다니까 빨리 다녀와.”
  • 네이비색 롱 원피스 차림에 예쁘게 화장을 한 여자애가 옆에서 귀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진한 향수 냄새에 송다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 “누구세요?”
  • 그러자 여자애가 눈을 깜빡이며 순진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 “언니, 나 민주잖아. 왜 그래?”
  • ‘민주? 언니? 빨간색 나무 상자? 그거 그 소설 ≪나의 여섯 명의 오빠들≫ 속 장면이잖아. 근데 그 장면이 왜 여기서 나와?’
  • 놀란 듯한 모습의 송민주는 신경 쓸 새도 없이, 송다은은 그대로 옆에 있는 못 옆으로 달려가 일렁이는 수면 위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 덥수룩한 앞머리는 얼굴의 절반가량을 가리고 있었고, 누렇게 떠 있는 홀쭉한 얼굴은 한눈에 보기에도 영양실조 같았으며, 깡마른 몸은 바람이 불면 그대로 쓰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 입고 있는 드레스조차도 자신이 입으니 마치 거적때기를 걸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닌 모습…
  • ‘그러니까 나 소설 속에 빙의한 거야?’
  • 이 장면은 소설의 시작 부분 내용이었다. 그녀는 이 장면을 읽은 적이 있었다.
  • 양녀인 송민주가 어머니인 서희란이 시켰다는 핑계를 대어 방금 막 송씨 가문으로 돌아온 송다은에게 빨간색 나무 상자를 가져오라고 시켰었다.
  • 그 안에 든 것은 외할머니가 서희란에게 물려준 비녀였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가 가져온 상자 속에 그 비녀는 들어있지 않았고, 이로 인해 서희란은 크게 화를 내게 된다.
  • 거기에 송민주가 불난 집에 부채질까지 더하면서 시골 출신인 송다은이 손버릇이 나쁘다는 소문을 거의 사실화시켰고, 이로 인해 서희란은 친딸인 송다은에게 완전히 실망하게 된다.
  •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송민주는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하지만 자신의 계획을 떠올린 그녀는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고는 방긋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 “언니, 곧 파티가 시작될 거야. 그리고 엄마는 여전히 조급하게 기다리고 있고. 언니 때문에 지체되면 엄마는 분명 화낼 거야. 언니는 이제 막 송씨 가문에 들어왔잖아. 이런 때에 엄마를 화나게 하면 나중에 분명 사이가 서먹해질 거야.”
  • ‘서먹? 허허!’
  • 송다은의 예쁜 입꼬리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살짝 말려 올라갔다. 착한 여동생께서 그녀의 잘못을 고쳐주기 위해 이렇듯 신경 써서 판을 짜놓았는데 어쨌든 이 연극을 끝마치게는 해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 하지만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송다은은 이리저리 휘둘리는 나약한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그녀는 아니었다. 이 연극의 승자가 누가 될 것인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