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가지런히 겹쳐 고무줄로 묶어놓은 지폐 한 뭉치가 들어있었고, 그 아래에는 계좌번호가 적힌 종이 한 장과 낡은 노트 한 권이 있었다.
“어, 형, 이거 민주가 우리한테 돈 보내주는 그 계좌 아니야? 이게 왜 송다은한테 있는 거지?”
송시훈이 깜짝 놀라며 말을 내뱉었다. 송진호의 차가운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있지 않았다. 하지만 상자를 든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 파도가 밀려오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그는 노트를 펼쳤다. 노트를 펼치자, 그 안에는 예쁜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5월 19일, 날씨 맑음. 큰오빠네 회사가 위기라는 소식을 들었다. 4천만 원의 손해를 봤다는데, 분명 오빠는 엄청 속상하겠지. 어떻게 하면 최대한 빨리 4천만 원을 벌어서 오빠한테 보낼 수 있을까?
5월 30일, 날씨 흐림. 오빠들한테 보내줄 생활비가 거의 떨어져 간다. 난 6월 말이 되어야 알바비를 받을 수 있는데, 사장님이 알바비의 일부분을 가불해 줬으면 정말 좋겠다.
7월 3일. 재우 오빠한테서 보고 싶다고 문자가 왔다. 너무 행복하다. 하지만 차마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민주한테 전화했는데 걘 해외에 있어서 아예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나도 오빠가 보고 싶다.
……
일기의 주인은 종이를 아끼기 위해서인지 아주 작은 글씨로 글들을 적어놓았지만, 그녀의 희로애락이 전부 그 속에 담겨있었다.
더 뒤로 넘기면 그녀의 가계부가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가장 초반에 기록된 부분을 보면 놀랍게도 당시 그녀는 혼자 5가지 일을 했었고, 유일한 휴식시간이라고는 이동하는 지하철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었던 듯 보였다.
그렇게 그녀는 한 달에 4백만 원도 더 넘게 벌었지만, 본인이 쓴 돈은 단돈 만원뿐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형제들의 계좌로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시기는 송씨 가문이 파산했던 시기로, “송민주”가 형제들에게 가장 자주 돈을 보내주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거의 요구하는 대로 다 보내주는 정도로 말이다.
당시 회사를 막 설립했던 송진호는 여기저기에서 압박을 받아 무척이나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었고, 그때 그 사실을 알게 된 “송민주”가 곧바로 그에게 4천만 원을 보내주어 힘든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었다.
그리고 당시 송진호는 해외에 있는 송민주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소식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했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 딱히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었고, 그저 송민주가 형제들의 소식에 유달리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이후, 둘째인 송승현이 디자인을 배울 때, 셋째 송규민이 의학원에 들어갔을 때, 넷째 송재우의 연구비용과 다섯째 송세준의 연예계 데뷔, 그리고 여섯째인 송시훈의 학비까지… 전부 다 송민주가 돈을 대주었었다.
그녀는 항상 그들에게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듯했다.
‘정말로 우리를 도와줬던 건 민주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나 싫어했던 송다은이란 말이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송다은 걔가 아무리 돈을 잘 벌었더라도 한 번에 몇천만 원씩 내놓을 수 있었을 리가 없잖아? 이건 어쩌면 속임수 일지도 몰라!’
노트를 뒤로 더 넘기자, 그곳에는 몇 장의 종이가 접힌 채 페이지 사이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종이를 펼치자, 매 한 장의 종이 위에 적혀 있는 제목들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신장 판매 동의서≫, ≪신약 테스트 피험자 동의서≫, ≪혈액 판매 동의서≫…
눈에 거슬릴 정도로 새빨간 글씨로 적혀있는 제목들이었다. 그리고 그 종이들에는 모두 송다은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왜 송민주가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그들의 전화를 받지 않았었는지, 왜 형제들에게 돈이 필요할 때마다 송민주는 항상 곧바로 이를 알아차린 듯한 느낌이었는지, 왜 매번 돈을 보내온 계좌가 항상 국내 계좌였는지… 이제야 그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 같았다.
우르릉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태풍이 부는 듯 창밖의 하늘에 어둠이 드리웠다.
……
촬영장에 있던 송다은은 ≪나의 여섯 명의 오빠들≫이라는 제목의 연애 소설을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그 소리에 옆에 있던 매니저는 깜짝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이 소설 작가 내 안티 아니야? 이름이 똑같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마지막에 날 처참한 모습으로 죽여버리기까지 하다니! 그리고 이 여섯 오빠들은 바보야? 대단한 사람들이라며? 이렇게 멍청한데 대단한 사람들은 개뿔. 그리고 역하렘물이라며? 대체 누가 중심인 건데? 그 멍청한 송민주? 그리고 말이야. 이 송다은이라는 애도 바보인 건 마찬가지지. 돈을 왜 보내주는 건데? 그 여섯 오빠들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말할수록 화가 치미는 듯 송다은은 잔뜩 화가 난 채 연신 씩씩거렸다. 그러더니 결국 들고 있던 책을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
“가져가서 버려. 아니, 태워!”
그래 봬도 그녀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인기 여배우였고, 크고 작은 루머들 역시 적잖이 보아왔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항상 웃어넘겼었고, 스스로도 그만하면 멘탈이 강한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오늘 그 책 한 권 때문에 잔뜩 화가 나 있는 것이었다.
이에 책을 넘겨받은 그녀의 매니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정말 뒷부분 내용은 안 읽어보실 거예요? 이 뒤에 여섯 오빠들이 다시…”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송다은이 그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읽긴 뭘 읽어. 난 한 글자라도 더 읽을 생각만 하면 짜증이 솟구친다고. 됐어. 얼른 정리하고 촬영하러 가자.”
“네…”
매니저는 하는 수 없이 그 책을 잠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송다은을 따라나섰다.
두 사람이 대기실을 나서기가 무섭게 방금까지만 해도 밝은 햇살이 내리쬐던 하늘에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곧이어 하늘이 검게 변하며 강한 바람이 불어 치기 시작했다.
이에 송다은은 예고도 없이 변하는 6월의 날씨를 감탄하며 앞 몇 걸음 더 내디뎠다.
그러던 그때, 갑자기 어딘가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다은 언니, 얼른 비켜요! 광고판이 떨어지려고 해요!”
하지만 커다란 바람 소리에 실려 온 웅얼거리는 소리를 송다은은 정확하게 듣지 못했고, 다음 순간 머리 위에서 강한 고통이 느껴지더니 눈앞이 새까매졌다.
……
“언니, 정신 좀 차려봐. 무슨 일이야, 언니?”
시끄럽게 조잘대는 소리에 송다은은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눈을 뜨자,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여러 장비로 가득한 세트장이 아닌 반짝이는 조명들로 가득한…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뭐지? 나 지금 촬영장에 있는 거 아닌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여긴 어디지?’
송다은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언니, 왜 그래? 뭘 기다리고 서 있는 거야? 엄마가 언니더러 엄마 방에 가서 그 빨간색 나무 상자 좀 가져오래. 급하다니까 빨리 다녀와.”
네이비색 롱 원피스 차림에 예쁘게 화장을 한 여자애가 옆에서 귀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진한 향수 냄새에 송다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누구세요?”
그러자 여자애가 눈을 깜빡이며 순진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언니, 나 민주잖아. 왜 그래?”
‘민주? 언니? 빨간색 나무 상자? 그거 그 소설 ≪나의 여섯 명의 오빠들≫ 속 장면이잖아. 근데 그 장면이 왜 여기서 나와?’
놀란 듯한 모습의 송민주는 신경 쓸 새도 없이, 송다은은 그대로 옆에 있는 못 옆으로 달려가 일렁이는 수면 위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덥수룩한 앞머리는 얼굴의 절반가량을 가리고 있었고, 누렇게 떠 있는 홀쭉한 얼굴은 한눈에 보기에도 영양실조 같았으며, 깡마른 몸은 바람이 불면 그대로 쓰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입고 있는 드레스조차도 자신이 입으니 마치 거적때기를 걸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닌 모습…
‘그러니까 나 소설 속에 빙의한 거야?’
이 장면은 소설의 시작 부분 내용이었다. 그녀는 이 장면을 읽은 적이 있었다.
양녀인 송민주가 어머니인 서희란이 시켰다는 핑계를 대어 방금 막 송씨 가문으로 돌아온 송다은에게 빨간색 나무 상자를 가져오라고 시켰었다.
그 안에 든 것은 외할머니가 서희란에게 물려준 비녀였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가 가져온 상자 속에 그 비녀는 들어있지 않았고, 이로 인해 서희란은 크게 화를 내게 된다.
거기에 송민주가 불난 집에 부채질까지 더하면서 시골 출신인 송다은이 손버릇이 나쁘다는 소문을 거의 사실화시켰고, 이로 인해 서희란은 친딸인 송다은에게 완전히 실망하게 된다.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송민주는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하지만 자신의 계획을 떠올린 그녀는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고는 방긋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언니, 곧 파티가 시작될 거야. 그리고 엄마는 여전히 조급하게 기다리고 있고. 언니 때문에 지체되면 엄마는 분명 화낼 거야. 언니는 이제 막 송씨 가문에 들어왔잖아. 이런 때에 엄마를 화나게 하면 나중에 분명 사이가 서먹해질 거야.”
‘서먹? 허허!’
송다은의 예쁜 입꼬리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살짝 말려 올라갔다. 착한 여동생께서 그녀의 잘못을 고쳐주기 위해 이렇듯 신경 써서 판을 짜놓았는데 어쨌든 이 연극을 끝마치게는 해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송다은은 이리저리 휘둘리는 나약한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그녀는 아니었다. 이 연극의 승자가 누가 될 것인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