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넘겨받던 송민주의 입꼬리가 눈에 띄게 사악한 곡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비록 살짝이었지만 바로 옆에 있던 송다은이 그 변화를 눈치채기에는 충분했다.
‘허, 감정 조절이 안 되나 보네. 그건 연기를 할 때의 크나큰 금기라고!’
“앗?! 상자 안에 왜 아무것도 없지? 언니, 엄마 비녀는? 설마 엄마의 비녀를 잃어버린 건 아니지?!”
귀에 거슬릴 정도로 과장된 목소리였다. 그 날카로운 목소리가 홀 전체를 울렸다. 그러자 북적이던 홀이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조금 전까지도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고관들과 재벌들 할 것 없이 모두의 시선이 순간 구경거리를 찾아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송민주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언니, 언니가 엄마 비녀를 가져간 거야? 그 안에 든 건 외할머니가 엄마한테 남기신 유품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가져갈 수가 있어? 그게 엄마한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 몰라서 그래? 장난 그만하고 얼른 엄마한테 돌려드려!”
그 말은 마치 송다은이 그 물건을 가져갔다고 못을 박는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아니나 다를까, 홀 안의 모두가 그 말을 듣고는 송다은을 바라보는 눈빛이 순간 싸늘해졌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애라 그런지 역시 손버릇이 나쁘네요.”
“그러니까요. 친딸이면 뭐해요?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지냈으니 분명 감정도 별로 없을 거예요. 오히려 저 양녀가 더 애틋한 것 같네요.”
“에휴, 송씨 가문에 재밌는 구경 나겠네요.”
“……”
송다은은 그 근거 없는 질타 속에서도 딱히 당황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고개를 들어 올려 서희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가져간 거 아니에요, 엄마. 민주가 저더러 엄마한테 상자를 가져다 드리라고 해서, 전 시킨 대로 한 것뿐이에요. 제가 상자를 가져올 때 방안에는 고용인들도 다 있었어요. 절대 문제가 있을 리가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낭랑하게 힘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홀 안의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지고 오기까지 그렇게 오래 걸렸잖아. 만에 하나라도 언니가 오는 길에 나쁜 마음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모를 거 아니야.”
송민주가 트집을 잡았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쁜 마음이라는 거슬리는 단어에 이를 듣고 있던 서희란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송다은이 이제 막 송씨 가문으로 돌아와 다소 서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친혈육이었기에 누군가가 그렇듯 심한 말로 질책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엄마로서 분명 마음이 좋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에 그녀는 곧바로 나무라듯 송민주를 한번 쏘아보았다. 하지만 현재 자신만의 승리의 기쁨에 잠겨있던 송민주는 그런 그녀의 눈빛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던 그때, 낮고 세월이 느껴지는, 하지만 위엄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정적을 깨트렸다.
“민주 양의 그 말뜻은 이 늙은이가 뭔가를 훔치기라도 했다는 건가?”
비켜선 사람들 사이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노인이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로 군복 차림의 소대장이 휠체어를 밀며 앞으로 다가왔다.
‘저분은 대장군 민태호 어르신 아냐? 민씨 가문은 송씨 가문과는 급이 다른 최고 명문가잖아. 그런데 어르신이 도둑질을 했다고 말하는 건 터무니없는 소리잖아?’
민태호가 송다은을 두둔하고 나설 줄은 생각지 못했던 송민주의 안색이 순간 난처한 빛을 띠었다. 이에 그녀는 그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한 말투로 말을 내뱉었다.
“어르신, 저희는 어르신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날 말하는 게 아니라고?”
민태호는 차갑게 코웃음 치며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그 탕탕거리는 소리는 그의 분노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저 상자는 내가 들고 온 거야. 이 아이는 건드리지도 않았지. 그런데 무언가가 없어졌다는 건 이 늙은이가 가져갔다는 말 아닌가?”
송민주 역시 당연히 민씨 가문은 건드려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그녀의 안색은 순간 하얗게 질렸다.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한쪽 구석에 있던 송다은은 고개를 숙인 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송민주에게 호통을 친 민태호는 고개를 돌려 서러운 모습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송다은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순간 마음이 아파 무언가 말하려던 그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그녀의 팔에 남아 있는 눈에 거슬리는 붉은 자국을 먼저 발견하고는 곧바로 언성을 높였다.
“누가 네 팔을 꼬집은 거냐? 송씨 가문 사람들이 널 이렇게 대한 거야?”
그 말에 눈을 끔뻑이던 송민주는 자신의 팔에 남아 있는 붉은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그것이 조금 전 송민주가 꼬집은 자국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민태호는 높은 자리에 있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인 데다, 군인 출신답게 송씨 가문의 체면은 전혀 고려할 생각이 없는 듯 직설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송다은은 그런 그가 꽤 귀엽다고 생각하며 그를 진정시켰다.
“괜찮아요. 그냥 실수로 부딪친 거예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비록 송민주가 짜증 나기는 했지만, 서희란도 자리에 있었기에 그녀는 엄마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민태호는 그런 그녀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들고 있던 지팡이로 탕탕 소리가 나도록 세게 바닥을 내려찍으며 말했다.
“상우야, 그 못난 자식한테 전화해서 당장 오라고 해!”
이에 그의 뒤에 있던 군복 차림의 윤상우가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예? 하지만 도련님께선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회의 회의, 회의는 무슨 회의! 약혼녀가 괴롭힘을 당했는데 무슨 회의를 한다고! 얼른 오라고 해! 당장 튀어오라고!”
민태호가 불같이 화를 내자, 윤상우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
‘도련님께 언제부터 약혼녀가 있었던 거지?’
송다은 역시 어이가 없었다.
“……”
‘이 할아버지가 왜 함부로 짝을 지어버리시는 거야?’
하지만 장교의 명령에 감히 불복할 수 없었던 윤상우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몸을 돌려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화가 연결되고, 나직하면서도 매력적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상우 아저씨, 무슨 일이세요?”
“저…”
윤상우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의 민태호를 힐긋 쳐다보더니 말을 꺼냈다.
“도련님, 소씨 가문으로 오셔야겠습니다. 장교님께서… 그게… 도련님더러 오시랍니다. 몸이 조금 편찮으십니다.”
민우진은 미간을 주물렀다.
“점심까지만 해도 괜찮으셨잖아요?”
“지금 갑자기 안 좋아지셨습니다.”
이에 민우진이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
휴대폰을 내려놓은 윤상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끝내는 차마 도련님께서 약혼녀의 기를 살려주러 오셔야겠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내뱉었다가는 민우진이 휴대폰을 뚫고 나와 자신을 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장교님, 도련님께서 곧 오신답니다.”
그 말에 민태호는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흥, 못난 자식이 눈치는 있구나.”
그러더니 이내 날카롭던 기운을 거두어들이고는 웃는 얼굴로 송다은을 바라보았다.
“얘야, 무서워 말거라. 송씨 가문이 너한테 잘해주지 않는다면 우리 민씨 가문으로 오면 돼. 우리 집의 그 못난 자식이 마침 약혼녀가 없거든. 그 못난 놈이 비록 성격도 나쁘고 얼음장처럼 쌀쌀맞은 데다 문제도 많긴 하지만 맷집은 좋아. 그러니 앞으로 그 녀석한테 화난 거 있으면 참을 필요 없이 때리고 싶으면 때려도 돼. 때려죽이지만 않으면 된다.”
그 말에 윤상우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민우진같이 훌륭한 인물이 민태호의 입에서는 마치 양아치 같은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
민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면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바로 민우진이었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민씨 가문의 실권자이자 우성 그룹의 대표이사로, 말 한마디만으로도 한국 경제를 마비시켜 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물며 M 국의 대통령조차도 그의 앞에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감히 경솔한 행동을 하지 못했다.
민태호의 말에 송민주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다못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