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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민우진

  • 그녀는 상자를 송민주에게 건넸다.
  • “여기 있어.”
  • 이를 넘겨받던 송민주의 입꼬리가 눈에 띄게 사악한 곡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비록 살짝이었지만 바로 옆에 있던 송다은이 그 변화를 눈치채기에는 충분했다.
  • ‘허, 감정 조절이 안 되나 보네. 그건 연기를 할 때의 크나큰 금기라고!’
  • “앗?! 상자 안에 왜 아무것도 없지? 언니, 엄마 비녀는? 설마 엄마의 비녀를 잃어버린 건 아니지?!”
  • 귀에 거슬릴 정도로 과장된 목소리였다. 그 날카로운 목소리가 홀 전체를 울렸다. 그러자 북적이던 홀이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 조금 전까지도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고관들과 재벌들 할 것 없이 모두의 시선이 순간 구경거리를 찾아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 송민주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 “언니, 언니가 엄마 비녀를 가져간 거야? 그 안에 든 건 외할머니가 엄마한테 남기신 유품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가져갈 수가 있어? 그게 엄마한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 몰라서 그래? 장난 그만하고 얼른 엄마한테 돌려드려!”
  • 그 말은 마치 송다은이 그 물건을 가져갔다고 못을 박는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 아니나 다를까, 홀 안의 모두가 그 말을 듣고는 송다은을 바라보는 눈빛이 순간 싸늘해졌다.
  •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애라 그런지 역시 손버릇이 나쁘네요.”
  • “그러니까요. 친딸이면 뭐해요?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지냈으니 분명 감정도 별로 없을 거예요. 오히려 저 양녀가 더 애틋한 것 같네요.”
  • “에휴, 송씨 가문에 재밌는 구경 나겠네요.”
  • “……”
  • 송다은은 그 근거 없는 질타 속에서도 딱히 당황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고개를 들어 올려 서희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제가 가져간 거 아니에요, 엄마. 민주가 저더러 엄마한테 상자를 가져다 드리라고 해서, 전 시킨 대로 한 것뿐이에요. 제가 상자를 가져올 때 방안에는 고용인들도 다 있었어요. 절대 문제가 있을 리가 없어요.”
  •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낭랑하게 힘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홀 안의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 “하지만 가지고 오기까지 그렇게 오래 걸렸잖아. 만에 하나라도 언니가 오는 길에 나쁜 마음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모를 거 아니야.”
  • 송민주가 트집을 잡았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쁜 마음이라는 거슬리는 단어에 이를 듣고 있던 서희란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 비록 송다은이 이제 막 송씨 가문으로 돌아와 다소 서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친혈육이었기에 누군가가 그렇듯 심한 말로 질책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엄마로서 분명 마음이 좋지는 않았을 터였다.
  • 이에 그녀는 곧바로 나무라듯 송민주를 한번 쏘아보았다. 하지만 현재 자신만의 승리의 기쁨에 잠겨있던 송민주는 그런 그녀의 눈빛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그러던 그때, 낮고 세월이 느껴지는, 하지만 위엄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정적을 깨트렸다.
  • “민주 양의 그 말뜻은 이 늙은이가 뭔가를 훔치기라도 했다는 건가?”
  • 비켜선 사람들 사이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노인이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로 군복 차림의 소대장이 휠체어를 밀며 앞으로 다가왔다.
  • ‘저분은 대장군 민태호 어르신 아냐? 민씨 가문은 송씨 가문과는 급이 다른 최고 명문가잖아. 그런데 어르신이 도둑질을 했다고 말하는 건 터무니없는 소리잖아?’
  • 민태호가 송다은을 두둔하고 나설 줄은 생각지 못했던 송민주의 안색이 순간 난처한 빛을 띠었다. 이에 그녀는 그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한 말투로 말을 내뱉었다.
  • “어르신, 저희는 어르신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 “날 말하는 게 아니라고?”
  • 민태호는 차갑게 코웃음 치며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그 탕탕거리는 소리는 그의 분노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 “저 상자는 내가 들고 온 거야. 이 아이는 건드리지도 않았지. 그런데 무언가가 없어졌다는 건 이 늙은이가 가져갔다는 말 아닌가?”
  • 송민주 역시 당연히 민씨 가문은 건드려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그녀의 안색은 순간 하얗게 질렸다.
  •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한쪽 구석에 있던 송다은은 고개를 숙인 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송민주에게 호통을 친 민태호는 고개를 돌려 서러운 모습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송다은을 쳐다보았다.
  • 그 모습에 순간 마음이 아파 무언가 말하려던 그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그녀의 팔에 남아 있는 눈에 거슬리는 붉은 자국을 먼저 발견하고는 곧바로 언성을 높였다.
  • “누가 네 팔을 꼬집은 거냐? 송씨 가문 사람들이 널 이렇게 대한 거야?”
  • 그 말에 눈을 끔뻑이던 송민주는 자신의 팔에 남아 있는 붉은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 그제야 그녀는 그것이 조금 전 송민주가 꼬집은 자국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 민태호는 높은 자리에 있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인 데다, 군인 출신답게 송씨 가문의 체면은 전혀 고려할 생각이 없는 듯 직설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 하지만 송다은은 그런 그가 꽤 귀엽다고 생각하며 그를 진정시켰다.
  • “괜찮아요. 그냥 실수로 부딪친 거예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 비록 송민주가 짜증 나기는 했지만, 서희란도 자리에 있었기에 그녀는 엄마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 하지만 민태호는 그런 그녀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들고 있던 지팡이로 탕탕 소리가 나도록 세게 바닥을 내려찍으며 말했다.
  • “상우야, 그 못난 자식한테 전화해서 당장 오라고 해!”
  • 이에 그의 뒤에 있던 군복 차림의 윤상우가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 “예? 하지만 도련님께선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 “회의 회의, 회의는 무슨 회의! 약혼녀가 괴롭힘을 당했는데 무슨 회의를 한다고! 얼른 오라고 해! 당장 튀어오라고!”
  • 민태호가 불같이 화를 내자, 윤상우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 “……”
  • ‘도련님께 언제부터 약혼녀가 있었던 거지?’
  • 송다은 역시 어이가 없었다.
  • “……”
  • ‘이 할아버지가 왜 함부로 짝을 지어버리시는 거야?’
  • 하지만 장교의 명령에 감히 불복할 수 없었던 윤상우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몸을 돌려 전화를 걸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통화가 연결되고, 나직하면서도 매력적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 “상우 아저씨, 무슨 일이세요?”
  • “저…”
  • 윤상우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의 민태호를 힐긋 쳐다보더니 말을 꺼냈다.
  • “도련님, 소씨 가문으로 오셔야겠습니다. 장교님께서… 그게… 도련님더러 오시랍니다. 몸이 조금 편찮으십니다.”
  • 민우진은 미간을 주물렀다.
  • “점심까지만 해도 괜찮으셨잖아요?”
  • “지금 갑자기 안 좋아지셨습니다.”
  • 이에 민우진이 말했다.
  •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
  • 휴대폰을 내려놓은 윤상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끝내는 차마 도련님께서 약혼녀의 기를 살려주러 오셔야겠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내뱉었다가는 민우진이 휴대폰을 뚫고 나와 자신을 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장교님, 도련님께서 곧 오신답니다.”
  • 그 말에 민태호는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 “흥, 못난 자식이 눈치는 있구나.”
  • 그러더니 이내 날카롭던 기운을 거두어들이고는 웃는 얼굴로 송다은을 바라보았다.
  • “얘야, 무서워 말거라. 송씨 가문이 너한테 잘해주지 않는다면 우리 민씨 가문으로 오면 돼. 우리 집의 그 못난 자식이 마침 약혼녀가 없거든. 그 못난 놈이 비록 성격도 나쁘고 얼음장처럼 쌀쌀맞은 데다 문제도 많긴 하지만 맷집은 좋아. 그러니 앞으로 그 녀석한테 화난 거 있으면 참을 필요 없이 때리고 싶으면 때려도 돼. 때려죽이지만 않으면 된다.”
  • 그 말에 윤상우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민우진같이 훌륭한 인물이 민태호의 입에서는 마치 양아치 같은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 “……”
  • 민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면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바로 민우진이었다.
  • 그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민씨 가문의 실권자이자 우성 그룹의 대표이사로, 말 한마디만으로도 한국 경제를 마비시켜 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 하물며 M 국의 대통령조차도 그의 앞에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감히 경솔한 행동을 하지 못했다.
  • 민태호의 말에 송민주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다못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 ‘대체 왜? 민씨 가문은 눈이 삔 거야? 저 촌스러운 계집애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 그곳에서 가장 침착한 사람은 송다은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