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그냥 연기랑 똑같은 거잖아
-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송다은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그래, 민주 네 말이 맞아. 지금 바로 가지러 갈게. 엄마를 화나게 하면 안 되지.”
- ‘그냥 연기랑 똑같은 거잖아. 내가 그래도 명색이 여우주연상 수상자인데, 이 애송이 하나를 못 이기겠어?!’
- 그녀의 대답에 송민주는 곧바로 신이 난 듯 활짝 웃음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 “그래. 그럼 난 홀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 말을 마친 그녀는 치맛자락을 하늘거리며 떠나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송다은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곧 재밌는 일이 벌어지겠는걸!’
- 송다은은 송민주가 가리킨 방향이 아닌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그녀가 기억하기로 이날 파티에서 민씨 가문의 어르신이 이 저택의 뒤뜰에서 심근경색으로 죽어버렸고, 그 일이 이후 송씨 가문의 파산에 빌미가 되었다고 책에 적혀있었다.
- 민씨 가문은 대대로 명문가 집안으로, 민태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전장에서 싸웠던 장교였다.
- 그 후 호국 대장군으로 책봉된 인물로, 한국을 쥐고 흔들만한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종래로 혼자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 혼자서 뒤뜰에 나와 있었던 것이었다.
- 그리고 시간을 보니 아마 지금쯤이면 그 일이 벌어질 시간이었다.
-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뒤뜰에 도착하자 멀리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가슴을 움켜쥔 채 고통스러운 듯한 모습으로 휠체어에 기대앉아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 이에 송다은은 급히 그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를 향해 물었다.
- “어르신, 약 어딨어요?”
- 그러자 민태호는 힘겹게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호주머니를 가리켰다. 그러는 그의 안색은 이미 창백해져가고 있었다.
- 송다은은 황급히 그의 호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말대로 그 속에서 작은 병 하나를 찾아낸 그녀는 병 안에서 약을 두 알 쏟아내 민태호의 입안에 밀어 넣었다.
- 하지만 현재 이미 의식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던 민태호는 전혀 약을 삼키지 못하고 있었다.
- 이에 눈살을 찌푸리던 송다은은 시선을 들어 뒤뜰에 있는 꽃에 물을 주는 용도로 설치되어 있는 수도꼭지를 쳐다보더니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커다란 잎사귀를 하나 떼어내 그 수도꼭지에서 물을 조금 받은 뒤 조심스레 민태호의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 물의 도움을 받아 알약을 삼킬 수 있었던 민태호는 이내 안색 또한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 송다은 역시 그제야 민태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위풍당당하고 근엄한 것이, 확실히 대장군이라는 칭호에 어울릴만한 모습이었다.
- 정신을 차린 그는 가장 먼저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 그녀의 손에 들린 나뭇잎과 옆에 있는 수도꼭지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다.
- “너 이 녀석, 나한테 저 물을 먹여?”
- 송다은은 기가 막혔다.
- “……”
- 책에 쓰여있는 그대로 민태호는 정말이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는 물이나 신경 쓰고 있는 것이었다.
- “목숨만 살릴 수 있다면, 전 조금 전 수돗물이 아니라 물웅덩이에 고여있던 빗물이라도 드렸을 거예요!”
- 당당하게 고개를 추켜들고 있는 그녀의 두 눈에서는 냉정하면서도 영민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빛에 심연의 어둠조차도 반짝일 것만 같았다.
- 그런 그녀의 말에 민태호는 흠칫 몸을 떨었다. 마치 젊은 시절 그 전쟁터로 다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던 초원에서 그의 분대장 역시 그런 눈빛으로 부대원들을 바라봤었다.
- “살아있을 수만 있다면 우린 짚신 뿌리도 씹어먹을 수 있어!”
- 한참 뒤, 민태호는 약간의 떨림을 머금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얘야, 너 이름이 뭐냐?”
- 그런 그와는 달리 송다은의 말투는 거침이 없었다.
- “저는 송다은이라고 해요.”
- 그녀의 이름을 들은 민태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눈을 빛내며 말을 내뱉었다.
- “아이고, 네가 바로 송씨 가문의 여식이구나!”
- 송다은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
- ‘나 이제 막 송씨 가문에 돌아온 거 아니었나? 근데 이 어르신은 왜 날 아시는 것 같지?’
- “참한 아이구나.”
- 민태호는 송다은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 “그런데 넌 지금 홀에 있지 않고 왜 여기 나와 있는 거냐?”
- 이에 송다은은 눈을 깜빡이며 설명했다.
- “동생이 저더러 엄마의 빨간색 나무 상자를 가져오라고 시켜서요. 그런데… 제가 길을 모르거든요.”
- 딱 알맞은 정도의 난처해하는 연기였다. 이에 원래부터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던 민태호는 그녀의 난처한 듯한 모습에 순간 정의감이 피어올라 호통쳤다.
- “이 송씨 가문은 일을 어떻게 하는 게야? 너한테 일을 시키다니, 네가 이제 막 돌아온 걸 모르는 거야? 기다리거라. 내가 너랑 함께 가주마. 송씨 가문에 몇 번 와본 적이 있어서 그나마 길을 잘 알고 있다.”
- 그러자 목적을 이룬 송다은은 기쁜 듯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음 지었다.
- “고맙습니다, 어르신.”
- ……
- 돌아가는 길, 빨간색 나무 상자는 민태호의 손에 들려 있었고, 송다은은 그를 위해 휠체어를 밀어주었다.
-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오래 알고 지낸 친구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 하지만 홀로 들어서는 문 어구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안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렴풋이 누군가가 송다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 이에 앞머리에 가려진 송다은의 두 눈에 순간 시린 빛이 번뜩이더니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 ‘구더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나 본데?’
-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녀의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기만 했다. 그녀는 허리를 살짝 숙여 민태호를 향해 한마디 했다.
- “어르신,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아무래도 엄마랑 동생이 절 찾는 것 같아요. 잠시 가봐야겠어요.”
- 그리고는 민태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상자를 집어 들더니 치맛자락을 들어 올린 채 뛰어가 버렸다.
- 책에 쓰여있는 것과 똑같이, 그 시각 송민주는 초조한 모습으로 서희란의 곁에 서 있었다.
-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언니 곧 올 거예요.”
- 송민주의 옆에 서 있는 여자는 옅은 색 원피스에 머리를 틀어 올린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 송다은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은 채 붉어진 두 눈으로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 그런 그녀의 온몸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세계에서 간암으로 돌아가셨던, 임종도 지켜드리지 못한 그녀의 친어머니와 눈앞의 여자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엄마…”
- 송다은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채 감히 앞으로 발을 내딛지 못했다. 그녀는 행여라도 자신이 잘못 본 것일까 봐 불안했다.
- 눈앞에서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딸의 모습에 서희란은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낳은 아이이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하며, 그녀는 송다은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다정하게 말을 내뱉었다.
- “왔구나, 다은아. 이리 엄마한테 오렴.”
- 이에 송다은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리고 싶은 기분을 꾹 참으며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엄마야… 정말 엄마야…’
- 송민주는 눈을 찡그렸다. 빨갛게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아니, 내가 함부로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송다은 저 계집애한테 미리 따로 경고했잖아?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인 건데?’
- 게다가 바로 그녀가 죽어도 엄마라는 말을 입에 올리려 하지 않았기에 서희란이 그녀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 하지만 현재 그녀가 엄마라고 부르자, 서희란은 눈에 띄게 한결 다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 ‘안돼!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막판의 실수로 일을 그르칠 순 없어!’
- 여기까지 생각한 송민주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 “언니, 마침 잘 왔어. 아까 엄마랑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언니를 잘 챙기지 못한 내 탓이기도 해. 이제 막 송씨 가문에 돌아왔는데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안 되지.”
- ‘말하는 것 하고는. 이건 누가 봐도 내가 남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잖아?!’
- “아참, 언니, 엄마 비녀는 가져왔어?”
- 송민주가 물었다. 이에 송다은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며 마음속의 모든 감정들을 억눌렀다. 이 연극은 어쨌든 끝까지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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