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때문인지 아니면 거리끼는 게 없어서인지, 유연석은 휴대폰에 비밀번호를 설정해 놓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영원히 휴대폰을 뒤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확실히 그녀는 그의 휴대폰을 뒤지는 습관이 없었다. 유연석이 요 몇 년 동안 완벽한 남편이었기 때문에 뒤질 필요가 없었던 것도 있었고, 안다해 본인이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했기 때문에 아무리 부부라도 성인이면 자신의 비밀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휴대폰이 자꾸 울리는 통에 도무지 잘 수가 없었다.
방법 없이 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를 보냈다.
[안다해예요. 연석 씨는 샤워하고 있고 휴대폰이 저한테 있거든요. 돌아오면 답장해 드리라고 전할게요.]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휴대폰은 바로 잠잠해졌다.
유연석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안다해는 벌써 잠이 들어 있었다.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유연석은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서 머리맡에서 휴대폰을 주워 들고 한참 뒤적거리다가 다시 조용히 베란다로 갔다.
베란다를 등지고 누워 있던 안다해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잠귀가 밝아서 누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바로 알아채고는 했다. 사실 유연석이 머리맡에서 휴대폰을 뒤적거릴 때 그녀는 벌써 잠에서 깼다.
베란다 쪽에서 담배 냄새가 은은히 풍겨왔다.
‘연석 씨가 담배를 다 피우네. 보아하니 옛날에는 많이 피운 것 같아.’
3년 동안 그가 담배를 피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집에는 재떨이조차 없었다. 그런데 안다혜가 돌아오고 불과 며칠 사이에 세 번이나 보게 되었다.
곧 베란다 쪽에서 말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는데, 상대방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유연석이 하는 말만 들렸다.
“방금 샤워하고 있어서 지금 봤어.”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다해 씨가 왜 너한테 위세를 보이겠어.”
“다해 씨 그런 사람 아니야. 말수는 적어도 마음은 착해.”
“알았어. 네 말 믿을게. 울지 마. 응? 임산부가 울면 태아에게 안 좋아.”
“그래. 잠깐만 기다려. 내가 옷 갈아입고 내려갈게.”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유연석은 침대에 기대앉아 있는 안다해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나 때문에 깼어?”
안다해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추워서요.”
“아, 내가 방금 베란다 문을 닫는 걸 깜박했네. 미안해.”
“베란다에는 뭐 하러 가셨어요? 아직 술을 덜 깬 거예요?”
유연석은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회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당신이 깰까 봐 베란다로 갔어. 그런데 언제… 깼어?”
“방금 깨자마자 당신이 들어오셨어요. 회사에 무슨 일 있어요?”
“아니야.”
유연석이 말을 이었다.
“당신 먼저 자.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연석 씨.”
“어?”
안다해는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연석이 어색한 듯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왜 그래?”
안다해는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
“다혜 씨가 방금 당신 찾던데요. 그래서 제가 전해준다고 했어요.”
유연석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답장 안 해줘도 돼요?”
유연석은 머뭇거리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일찍 자. 당신 요즘 너무 무리했잖아. 시간 나면 내가 또 어깨를 눌러줄게.”
안다해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래요.”
유연석은 그녀가 누워 눈을 감자 부드럽게 이불자락까지 여미어준 후 옷을 갈아입고 계단을 내려갔다.
몇 분 후 아래층에서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안다해는 위층 통유리창 앞에 서서 흰색 카이엔의 꼬리등이 본가를 떠나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들이 외박하러 나가는 걸 보고만 있었어?”
담유정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쨍쨍하게 들려왔다.
“그 자리에서 까발리지 않고 뭐했어?!”
안다해는 침대 머리맡에 기댄 채 쓴웃음을 지었다.
“내연녀도 아니고 ‘절친’을 위로한다는데 뭘 까발려?’
담유정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친구라는 말을 믿어? 야밤에 전화해서 같이 별 보러 가는 이성 친구가 어디 있어? 그리고 그 이름부터 수상해…”
안다해도 바보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이름도 그렇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그녀는 벌써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강민은 그날 그녀에게 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있을 수 있냐고 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안다해는 있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와 함께 근무하는 남자 의사 중에 괜찮은 사람이 꽤 많아도 그들은 서로 친하게 지낼 뿐이지 항상 떳떳했다. 누군가가 집에 일이 있으면 당직을 바꾸기도 하고 과 회식이 있으면 밥도 같이 먹고 명절 때 서로 안부 문자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서로 선을 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유연석과 안다혜는 아직 바람을 피운다고 할 수는 없으나 순수한 우정은 절대로 아니었고, 어찌 보면 꿈속의 연인과도 같은 사이였다.
여자가 영원한 친구로만 지내자고 하니 남자는 사랑을 가슴 깊이 묻어둔 채 친구의 자리로 돌아갔고, 여자가 결혼해서 외국에 정착하자 남자는 자신의 인생 궤도로 돌아가 선을 보고 결혼해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사실 유연석의 신분과 조건으로 충분히 집안이 비슷한 부잣집 딸을 만나 결혼할 만도 한데, 그는 하필이면 평범한 가문 출신인 안다해를 선택했다.
예전에 안다해는 자신이 외모나 직업, 성격이 좋아서, 또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어서 유연석의 결혼 상대로 선택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이름이 ‘안다해’였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안다해는 저도 모르게 온몸이 싸늘해졌다.
‘두 사람이 함께 보냈던 뜨거운 밤들, 내 귓가에 대고 애틋하게 외쳤던 게 ‘다해’가 아닌 ‘다혜’였단 말인가?’
안다해는 창가로 걸어가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하늘에는 휘영청 밝은 달이 걸려 있었고 수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디서 별을 보고 있을까?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별과 달을 보면서 인생 얘기를 나누고 있겠지?
사랑을 가슴에 묻어둔 남주인공과 사랑을 뒤로 하고 도망친 여주인공이 만나서 슬픈 드라마를 찍고 있는데 그 스토리에 말려든 난 무슨 죄인가?’
“다해야, 이혼하는 게 어때.”
담유정이 말했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그들은 20년 넘게 얽혀 있었잖아. 넌 유연석을 안 지 불과 몇 년이고. 당분간은 아프더라도 놔 주는 게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