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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이혼하는 게 어때?

  • 믿음 때문인지 아니면 거리끼는 게 없어서인지, 유연석은 휴대폰에 비밀번호를 설정해 놓지 않았다.
  • ‘아니면 내가 영원히 휴대폰을 뒤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 확실히 그녀는 그의 휴대폰을 뒤지는 습관이 없었다. 유연석이 요 몇 년 동안 완벽한 남편이었기 때문에 뒤질 필요가 없었던 것도 있었고, 안다해 본인이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했기 때문에 아무리 부부라도 성인이면 자신의 비밀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었다.
  • 그런데 휴대폰이 자꾸 울리는 통에 도무지 잘 수가 없었다.
  • 방법 없이 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를 보냈다.
  • [안다해예요. 연석 씨는 샤워하고 있고 휴대폰이 저한테 있거든요. 돌아오면 답장해 드리라고 전할게요.]
  •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휴대폰은 바로 잠잠해졌다.
  • 유연석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안다해는 벌써 잠이 들어 있었다.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 유연석은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서 머리맡에서 휴대폰을 주워 들고 한참 뒤적거리다가 다시 조용히 베란다로 갔다.
  • 베란다를 등지고 누워 있던 안다해는 천천히 눈을 떴다.
  • 그녀는 잠귀가 밝아서 누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바로 알아채고는 했다. 사실 유연석이 머리맡에서 휴대폰을 뒤적거릴 때 그녀는 벌써 잠에서 깼다.
  • 베란다 쪽에서 담배 냄새가 은은히 풍겨왔다.
  • ‘연석 씨가 담배를 다 피우네. 보아하니 옛날에는 많이 피운 것 같아.’
  • 3년 동안 그가 담배를 피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집에는 재떨이조차 없었다. 그런데 안다혜가 돌아오고 불과 며칠 사이에 세 번이나 보게 되었다.
  • 곧 베란다 쪽에서 말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는데, 상대방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유연석이 하는 말만 들렸다.
  • “방금 샤워하고 있어서 지금 봤어.”
  •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다해 씨가 왜 너한테 위세를 보이겠어.”
  • “다해 씨 그런 사람 아니야. 말수는 적어도 마음은 착해.”
  • “알았어. 네 말 믿을게. 울지 마. 응? 임산부가 울면 태아에게 안 좋아.”
  • “그래. 잠깐만 기다려. 내가 옷 갈아입고 내려갈게.”
  •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유연석은 침대에 기대앉아 있는 안다해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 “나 때문에 깼어?”
  • 안다해는 고개를 저었다.
  • “그냥 추워서요.”
  • “아, 내가 방금 베란다 문을 닫는 걸 깜박했네. 미안해.”
  • “베란다에는 뭐 하러 가셨어요? 아직 술을 덜 깬 거예요?”
  • 유연석은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 “회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당신이 깰까 봐 베란다로 갔어. 그런데 언제… 깼어?”
  • “방금 깨자마자 당신이 들어오셨어요. 회사에 무슨 일 있어요?”
  • “아니야.”
  • 유연석이 말을 이었다.
  • “당신 먼저 자. 나 잠깐 나갔다 올게.”
  • “연석 씨.”
  • “어?”
  • 안다해는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러자 유연석이 어색한 듯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 “왜 그래?”
  • 안다해는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
  • “다혜 씨가 방금 당신 찾던데요. 그래서 제가 전해준다고 했어요.”
  • 유연석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알았어.”
  • “답장 안 해줘도 돼요?”
  • 유연석은 머뭇거리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 “일찍 자. 당신 요즘 너무 무리했잖아. 시간 나면 내가 또 어깨를 눌러줄게.”
  • 안다해는 웃으며 대답했다.
  • “네. 그래요.”
  • 유연석은 그녀가 누워 눈을 감자 부드럽게 이불자락까지 여미어준 후 옷을 갈아입고 계단을 내려갔다.
  • 몇 분 후 아래층에서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 안다해는 위층 통유리창 앞에 서서 흰색 카이엔의 꼬리등이 본가를 떠나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 “그들이 외박하러 나가는 걸 보고만 있었어?”
  • 담유정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쨍쨍하게 들려왔다.
  • “그 자리에서 까발리지 않고 뭐했어?!”
  • 안다해는 침대 머리맡에 기댄 채 쓴웃음을 지었다.
  • “내연녀도 아니고 ‘절친’을 위로한다는데 뭘 까발려?’
  • 담유정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 “친구라는 말을 믿어? 야밤에 전화해서 같이 별 보러 가는 이성 친구가 어디 있어? 그리고 그 이름부터 수상해…”
  • 안다해도 바보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이름도 그렇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그녀는 벌써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 강민은 그날 그녀에게 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있을 수 있냐고 물었다.
  • 예전 같았으면 안다해는 있을 수 있다고 믿었다.
  • 그녀와 함께 근무하는 남자 의사 중에 괜찮은 사람이 꽤 많아도 그들은 서로 친하게 지낼 뿐이지 항상 떳떳했다. 누군가가 집에 일이 있으면 당직을 바꾸기도 하고 과 회식이 있으면 밥도 같이 먹고 명절 때 서로 안부 문자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서로 선을 넘는 일은 하지 않았다.
  • 유연석과 안다혜는 아직 바람을 피운다고 할 수는 없으나 순수한 우정은 절대로 아니었고, 어찌 보면 꿈속의 연인과도 같은 사이였다.
  • 여자가 영원한 친구로만 지내자고 하니 남자는 사랑을 가슴 깊이 묻어둔 채 친구의 자리로 돌아갔고, 여자가 결혼해서 외국에 정착하자 남자는 자신의 인생 궤도로 돌아가 선을 보고 결혼해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 사실 유연석의 신분과 조건으로 충분히 집안이 비슷한 부잣집 딸을 만나 결혼할 만도 한데, 그는 하필이면 평범한 가문 출신인 안다해를 선택했다.
  • 예전에 안다해는 자신이 외모나 직업, 성격이 좋아서, 또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어서 유연석의 결혼 상대로 선택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이름이 ‘안다해’였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 안다해는 저도 모르게 온몸이 싸늘해졌다.
  • ‘두 사람이 함께 보냈던 뜨거운 밤들, 내 귓가에 대고 애틋하게 외쳤던 게 ‘다해’가 아닌 ‘다혜’였단 말인가?’
  • 안다해는 창가로 걸어가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하늘에는 휘영청 밝은 달이 걸려 있었고 수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 ‘두 사람은 어디서 별을 보고 있을까?
  •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별과 달을 보면서 인생 얘기를 나누고 있겠지?
  • 사랑을 가슴에 묻어둔 남주인공과 사랑을 뒤로 하고 도망친 여주인공이 만나서 슬픈 드라마를 찍고 있는데 그 스토리에 말려든 난 무슨 죄인가?’
  • “다해야, 이혼하는 게 어때.”
  • 담유정이 말했다.
  • “사랑이든 미움이든 그들은 20년 넘게 얽혀 있었잖아. 넌 유연석을 안 지 불과 몇 년이고. 당분간은 아프더라도 놔 주는 게 좋겠어.”
  • 그녀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게 아니었다. 하지만…
  • “유정아, 나 임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