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 우리 안 선생님처럼 바쁘신 분이 모처럼 시간 내서 밥 한 끼 먹어준 것도 대단한 축복이지 뭐.”
“연석 씨, 저 다음 주에 한 주 휴가 냈거든요. 우리 어디 가서 며칠 놀다 와요.”
유연석은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요즘 보고서 때문에 바쁘잖아. 괜찮겠어?”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유연석은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혼하고 신혼여행도 못 갔는데 이번에 겸사겸사 다녀오자.”
“네.”
안다해가 되물었다.
“당신 일에는 지장 없어요?”
“다음 주에 가니까 이번 주에 미리 해놓으면 돼.”
“잘됐네요.”
유연석이 물었다.
“당신 내일은 근무 시간이 어떻게 돼?”
“저 다른 사람과 시간을 바꿔서 내일은 휴식이에요.”
유연석이 말했다.
“내일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는데 당신도 같이 가자.”
결혼한 지 3년이 되도록 안다해는 유연석의 동창이며 친구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일 때문에 바쁘기도 했고 또 굳이 그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일선물을 준다고 한 약속을 어겼으니 이번에는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요.”
…
1박2일을 꼬박 새우고 난 안다해는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일어나 보니 옆자리는 벌써 비어 있었다.
의사라는 직업이 원래 환자가 필요할 때 언제든 자리를 지켜야 했기에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침대에서 자면서도 몇 마디 대화해본 적이 없었다.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백옥금이 말했다.
“다해 깼구나. 연석이는 벌써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재빨리 밖에 나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눈에 익은 흰색 포르쉐 카이엔이 보였다.
다가가서 조수석에 타려고 문을 연 안다해는 깜짝 놀랐다.
안에 있던 사람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안다혜 씨.”
안다혜는 오늘 특히 신경 쓴 것 같았다. 임신해서 불룩 나온 배를 무릅쓰고 긴 다홍색 원피스를 입고 새까만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옅은 화장까지 했다.
다만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시울이 불그스름하고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저기, 저도 오늘 동창 모임에 가거든요. 그래서 연석이 차에 앉아 가려고요.”
안다해는 그제야 유연석과 안다혜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반에 다녔기 때문에 유연석의 동창 모임이 곧 안다혜의 동창 모임이라는 게 생각났다.
태워주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차의 조수석이 여주인 자리라는 건 상식적으로 알 텐데 한참을 기다려도 안다혜는 조수석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다해는 낮은 소리로 귀띔했다.
“안다혜 씨, 뒷좌석이 넓어서 앉기 편하실 거예요.”
안다혜는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포르쉐 카이엔은 SUV였기 때문에 섀시가 높은 편이었다. 안다혜는 조수석에 앉아 거의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저는 멀미를 해서 뒷좌석에 앉지 못하거든요.”
왠지는 몰라도 어제와는 전혀 다르게 약간 적대감까지 보이는 안다혜를 보며 안다해는 살짝 언짢았지만,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럼 안다혜 씨 뜻은?”
“미안한데 선생님이 당분간은 뒷좌석에 앉으셔야겠어요. 저 임산부잖아요.”
“당분간이요?”
“네.”
안다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저 귀국 안 한 지 한참 됐거든요. 이번에 와서는 좀 오래 머물고 싶어요. 게다가 외국에서 아이를 낳고 싶지도 않고요. 아이는 그래도 우리나라 호적에 올리는 게 낫죠.”
‘현재 임신 6개월인데 달이 차서 출산하고 산후조리까지 하려면 유씨 가문에 적어도 반년 머물겠다는 거야?’
“그럼 산후조리도 유씨 가문에서 하고 갈 생각이세요?”
“부모님 두 분 다 산속 요양원에 계시니 잠시 유씨 가문에서 지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본가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서 산전 검사하러 다니기 불편할 것 같아요. 두 분이 사는 집이 시내에 있다고 들었어요. 병원과도 가깝다면서요. 그래서 저는 출산 전과 산후조리 때 모두 두 분 집에서 지내려고요.”
안다혜는 그래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이미 정해진 일을 통보하는 식으로 말했다.
안다해는 고개를 기울이고 운전석에 있는 유연석을 바라보았다.
“연석 씨,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유연석은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집이 병원에서 가까운 건 사실이잖아.”
“그럼 벌써 다 상의를 끝낸 거네요?”
“다혜는 임산부잖아. 또 내 절친이기도 하고…”
‘절친? 3년 동안 한 번이라도 통화했거나 다혜라는 이름을 말했더라면 믿었을 수도 있어. 절친이라고 하면서 도대체 왜 그동안 연락 한번 하지 않았을까?
또 단순히 친구 사이면 당당하게 말할 것이지, 왜 그때 사무실에서는 숨겼을까?’
이때 유연석이 옆에서 재촉했다.
“시간 없으니까 얼른 출발하자.”
안다해한테 하는 말이었다.
게다가 유연석도 안다혜를 뒷좌석으로 보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모임 장소는 조용한 칵테일바였는데, 그곳은 낮에는 손님이 별로 없고 공간이 넓어서 동창들이 모이기에는 딱 좋았다.
차에 임산부가 타고 있어서 그런지 유연석은 특히 신경 써서 운전했다.
안다혜는 조수석에 앉아 손거울을 들고 화장을 고쳤다.
“연석아, 나 어때?”
유연석은 안다혜를 슬쩍 쳐다보았다.
“괜찮은데.”
안다혜는 뭔가 언짢은 듯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임신해서 풀메이크업도 못 하고 이게 뭐야. 거의 민낯이잖아.”
“넌 민낯도 예뻐.”
“동창들을 깜짝 놀라게 하려면 민낯으로는 부족하단 말이야.”
그녀는 손거울을 내리더니 자연스럽게 유연석에게 물었다.
“내 휴대폰 어디 갔지?”
그러자 유연석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아주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예전에도 아무 데나 던져두고는 허둥지둥 찾더니 하나도 안 변했네. 자.”
안다혜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하하 웃으며 말했다.
“정말 학교 다닐 때 생각이 나네. 그때도 내 휴대폰은 네가 항상 챙겼는데.”
유연석이 추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맞아. 학교 다닐 때 남자들이 너에게 연락오면 내가 너 대신 답장했잖아.”
“하하. 남자애들이 너무 귀찮게 굴었지. 참, 방금 진동음이 들리던데 누가 보낸 카카오톡인지 확인 좀 해줘.”
안다혜는 유연석이 운전 중인데도 불구하고 휴대폰을 그의 품에 팽개치고는 계속해서 화장을 고쳤다.
유연석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불평 하나 없이 안다혜가 시키는 대로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터치하면서 물었다.
“비밀번호는?”
“원래 번호야. 너 알잖아.”
안다해가 뒷좌석에서 보니 유연석은 미간을 찌푸린 채 휴대폰 화면을 터치하느라 낑낑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