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해는 유연석과 자유연애로 결혼한 건 아니더라도 3년 동안 함께 지냈기 때문에 나름 그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다.
유연석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회장님들과는 달리, 행동거지가 기품이 있고 말투가 자상하고 일 처리가 꼼꼼하고 온화하고 듬직한 성격을 가진 성숙한 남자였다.
‘이런 남자가 추태를 보였으니 보통 여자는 아닐 거야.’
안다해는 헤어졌던 연인이 과거를 떠올리며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본가로 가니 예상대로 임산부 한 명이 있었다.
그런데 임산부는 그녀의 시어머니인 백옥금과 함께 앉고 유연석은 혼자 옆에 놓인 싱글 소파에 앉아 있다가 안다해를 보자 평소대로 잽싸게 일어나서 그녀 손에서 코트와 가방을 받아 들었다.
“걸어줄게.”
백옥금도 상냥하게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다해 왔구나. 얼른 와서 앉아.”
“어머님.”
안다해는 백옥금에게 인사한 후 옆에 있는 임산부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분은…”
백옥금이 웃으며 말했다.
“다혜라고 하는데 옆집 안 아저씨 딸이야. 남편과 함께 외국에서 살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어. 다혜야, 이쪽은 방금 말했던 연석이 와이프야.”
이 말을 들은 임산부는 배를 잡고 웃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안다혜라고 해요.”
안다해는 놀라며 물었다.
“성함이… 뭐라고요?”
“정말 공교롭게도 우리 두 사람 이름이 한 글자만 다르네요. 저는 은혜 ‘혜’자를 써서 안다혜라고 해요.”
백옥금도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야. 연석이가 결혼한다고 할 때 나도 너무 놀랐거든. 아마도 우리 아들이 안씨 가문과 인연이 있나 봐. 하나는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이고 하나는 와이프.”
“맞아요. 그런데 모르셨죠? 제 수술도 안 선생님이 해주셨거든요.”
안다혜의 말에 백옥금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랬어?”
“그렇다니까요.”
안다혜가 먼저 안다해에게 손을 내밀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저와 제 아이는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상대방이 그토록 당당한데 안다해라고 움츠러들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고 대범하게 상대방과 악수했다.
“별말씀을요. 저는 제가 할 일만 했을 뿐이에요. 당시 상황이 위험해 보였지만,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었어요. 세르클라지 봉합을 했으니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래도 앞으로는 더 조심하셔야 해요.”
“알겠어요. 선생님, 고마워요.”
하인들이 음식상을 거의 다 차려놓자 백옥금은 식사하자고 사람들을 불렀다.
겉치레나 남의 눈에 띄는 걸 싫어하는 유연석은 서른한 살 생일도 다른 생일 때와 마찬가지로 크게 치르지 않고 집에서 한 상 차린 후 식구들과 식사하기로 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주로 백옥금과 안다혜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았고, 원래 말수가 적은 안다해는 옆에서 듣기만 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알게 된 건데, 유씨 가문 옆집에 원래는 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고 두 가문은 몇십 년 동안 이웃으로 지냈다고 한다. 안다혜와 유연석은 같은 해 태어났는데 안다혜가 반 살 어리고 두 사람은 초등학교부터 시작해서 고등학교까지 모두 같은 반에 다니다가 유연석은 국내 일류 대학 경영 학과에, 그녀는 해외에 있는 법대에 가면서 헤어졌다고 했다.
백옥금의 말을 인용한다면 그들은 사탕 한 알도 나눠 먹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직접 책을 써서 낼 정도로 지식이 있는 백옥금은 교양 있는 말로 안다해한테 안다혜와 유연석은 남녀 관계가 아니라 순수한 형제애라는 걸 귀띔해 주고 있었다.
백옥금은 이공계를 전공한 여자애가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안다해의 손을 다독이며 말했다.
“둘 사이가 너무 좋아서 나도 한때는 그들이 연애하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알고 보니… 하하, 내 착각이었지 뭐야!”
그녀는 안다해 쪽으로 돌아앉아 웃으면서 설명을 보탰다.
“사실 다혜가 좋아한 건 연석의 친구였대. 그래서 매일 연석이한테 쪽지를 전해달라고 한 거래!”
유연석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자조에 가까운 말투로 말했다.
“맞아. 난 그냥 도구였어.”
“그래서 결국 사귀게 되었나요?”
안다해가 웃으면서 묻는 말에 줄곧 말이 없던 안다혜가 입을 열었다.
“사귀기는 했는데 금방 헤어졌어요. 어린 시절에는 단순히 호르몬 작용으로 이성에게 끌릴 때니까 결혼까지 가는 연애는 거의 없잖아요.”
“그렇긴 하죠.”
백옥금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다혜야, 연석이한테는 왜 끌리지 않았어? 난 그 남자애가 연석이보다 별로던데?”
안다혜는 양손을 펴 보이며 혀를 찼다.
“너무 가까우니까 손을 쓸 수 없더라고요.”
백옥금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안다혜의 재치 있는 말로 분위기는 훨씬 가벼워졌고 거실은 백옥금의 해맑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안다해는 백옥금에게 고마웠다. 백옥금은 속에 의심을 품고도 직접 물어보지 못하는 안다해를 대신해 모든 것을 확실하게 해 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안다해는 이 결혼이 정말 만족스러웠다.
자상한 남편과 대하기 편한 시어머님, 그들은 여느 명문가처럼 결혼만 하면 애부터 낳으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녀의 일을 지지해 주었다.
사랑이 없는 것 말고는 정말 완벽한 결혼이었다.
하지만…
안다혜, 안다해, 두 이름이 너무나도 비슷해서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백옥금은 안씨 아저씨는 3년 전에 부인 건강 문제로 산속 공기를 마시면 회복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산에 있는 요양원으로 가서 집을 3년 넘게 비워 두었기 때문에 당분간 사람이 들기 힘들 거라고 했다.
임산부인 안다혜는 안전을 위해서든 또 이웃 간의 정을 생각해서든 그날 밤은 아주 당연하게 유씨 가문에 머무르게 되었다.
샤워를 마치고 방에 돌아오니 유연석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금테 안경을 끼고 손에 든 책을 뒤적거리고 있다가 그녀를 보자 책을 내려놓고 그녀의 손에서 수건을 받아 들고 머리를 닦아 주었다.
“피곤하지?”
오늘 본가에 와서 유연석의 생일을 쇠 주기 위해 연속 24시간 당직을 서고 집에 와서는 하루 종일 쉬지도 못했으니 꼬박 36시간 눈을 붙이지 못한 셈이다.
“견딜만해요.”
안다해가 말했다.
유연석은 동작도 부드러웠지만, 말투는 동작보다 더 부드러웠다.
“그날 병원에서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다혜에 대해 말을 못 했어. 내 생일을 축하해준다고 일부러 외국에서 온 건데 공항에서 오는 길에 사고가 날 줄 누가 알았겠어.”
“아. 그랬군요.”
‘그럼 그날 아침에 급히 문을 나선 게 회사 일 때문이 아니라 공항에 픽업하러 간 거네.’
유연석이 말을 이었다.
“나와 다혜는 가장 친한 친구야.”
그는 ‘친구’라는 두 글자를 강조하려는 듯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안다해는 느릿느릿 그의 말을 받아 주었다.
“임신 6개월이나 된 몸을 끌고 그 멀리 외국에서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걸 보면 정말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