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후회
한그루
Last update: 2025-05-01
제1화 낮과 밤이 다른 남자
- “다해 씨…”
- 귓가에서 나지막하게 들리는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너무나도 부드럽고 매력적이었다.
- 벌써 결혼 3년째인데도 안다해는 여전히 유연석이 낮과 밤에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평소 유연석은 자상하고 부드럽고 신사답지만, 밤만 되면 무궁무진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 겨우 끝날 무렵 안다해가 온몸이 나른하여 팔도 들지 못하고 있는데, 남자가 또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
- 안다해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애교 섞인 목소리로 사정했다.
- “인제 그만하죠. 우리 내일 또 출근해야 하잖아요.”
- 요즘 직무 능력 평가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데다 새벽까지 보고서를 쓰고 나서 또 그에게 한바탕 시달리고 난 안다해는 이 시각 완전 녹초가 되어 버렸다.
- “무슨 생각해.”
- 유연석이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에 안다해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 “그게 아니면…”
- 남자는 뼈마디가 분명한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힘 있는 손가락으로 아픈 부위를 정확히 찾아 꾹꾹 눌러 주었다. 그 시원한 느낌이 온몸에 퍼지자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 “시원해?”
- 귓가에서 들리는 유연석의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안다해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 산부인과 의사로서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보통 사람들보다 잘 알 법도 한데, 사실 그녀는 이론적으로만 박사였지 실전에서는 누구보다도 약했다.
- 다행히 유연석이 신사다운 매너를 갖춘 덕분에 그들은 여느 신혼부부처럼 알콩달콩하지는 않아도 서로 공경하며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다.
- 안다해는 이런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소개팅으로 만나서 연애도 해보지 못하고 바로 결혼했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 “지금은 어때? 좀 나아졌어?”
- 어깨를 움직여보니 마사지하고 난 다음 훨씬 가벼워진 것 같았다.
- “고마워요. 정말 나은 것 같아요.”
- 그녀는 몸을 돌렸다.
- “이런 건 또 언제 배웠어요?”
- “예전에 경험 많은 한의사한테서 배운 적이 있는데, 이렇게 여러 해 지났는데도 아직 손에 익네.”
-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이불 속에 집어넣으며 당부했다.
- “어서 자.”
- 행복한 결혼 생활이란 어떤 거냐고 천 명에게 묻는다면 아마도 천 가지 대답이 나올 것이다.
- 공부와 일에 몰두하느라 소녀 시절에 뜨거운 연애 한 번 못 해본 게 조금 아쉽긴 해도 가문이나 외모, 인품, 학식 등 모든 면에서 거의 완벽한 유연석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의 결혼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 담배, 술 안 하고 모임에도 잘 나가지 않고 퇴근하면 바로 집에 와서 함께 있어 주는 유연석을 보며, 항상 남자들에게 비호감이던 친한 친구 담유정마저 모처럼 ‘훈남 끝판왕’이라는 다섯 글자로 그를 평가해 주었다.
- 이런 남편에 대해 안다해는 매우 만족했고, 특히 아이까지 생긴 지금은 더 그랬다.
-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가볍게 어루만지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 “연석 씨, 다음 주 말 당신 생일 때 줄 선물이 있어요.”
- 갑자기 유연석의 휴대폰 진동음이 두어 번 울렸다.
-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그의 안색이 확 바뀌는 걸 보고 안다해가 물었다.
- “왜 그러세요?”
- 유연석이 몸을 일으켰다.
-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올게.”
- “회사 일인가요?”
- “…응.”
- 그는 약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다시 서둘러 말했다.
- “다녀올게.”
- “알았어요. 길에서…”
- 이어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하던 말을 마저 했다.
- “운전 조심하세요.”
-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지만, 그가 이렇게 초조해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 ‘회사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유성 그룹에서 주식을 인수 합병한다고 며칠 전 경제 채널에서 본 것 같은데.’
- 의학을 전공한 그녀는 상업에 관해 잘은 모르지만, 경제 채널에 실린 걸 보고 보통 일은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 안다해는 그와 회사가 모두 무사하기를 바라면서 두 손을 모으고 묵도했다.
- 다시 자려고 누웠는데 휴대폰 벨 소리가 그녀를 괴롭혔다.
- “선생님, 얼른 병원으로 오세요. 임산부 한 분이 상황이 안 좋아요!”
- 여러 해 의학 공부를 하면서 이런 일은 매우 흔했기 때문에 안다해는 휴대폰을 끊고 바로 옷을 갈아입고 문을 나섰다.
- 병원에 도착하니 조수 임민지가 병원 입구에 서서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 안다해를 본 임민지는 바로 달려와 가운과 장갑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 “선생님, 드디어 오셨네요!”
- 일할 때 안다해는 항상 프로다웠다. 그녀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면서 가운을 입고 장갑을 꼈다.
- “환자는 무슨 상황이야?”
- “큰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임신 6개월에 출혈이 심하고 의식 불명 상태에 쇼크 증세까지 보이고 있어요.”
- 6개월짜리 태아면 세르클라지 봉합이든 유도분만이든 수술이 필요했다.
- “가족에게는 연락했어?”
- “네.”
- “당장 수술해야 하니까 가족을 데려다 사인시켜.”
- “알겠습니다.”
- 안다해는 곧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 아니나 다를까 환자의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그녀는 당직 의사의 기록을 훑어본 후 세르클라지 봉합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내리고는 평소와 똑같이 일을 진행해 갔다.
- 옷을 갈아입고 수술실로 들어간 안다해는 응급처치와 수술까지 여섯 시간을 바삐 보냈다.
- 수술실에서 나오면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안다해를 다행히도 임민지가 부축해 주었다.
- “선생님, 괜찮으세요?”
- 안다해는 고개를 저었다.
- “좀 앉아있게 부축해 줘.”
- 임민지는 그녀를 의자에 앉힌 후 달려가 따뜻한 물을 가져다가 건네주면서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 “선생님도 임신하셨는데 이렇게 힘든 일을 시켜서 미안해요. 그런데 환자 상태가 워낙 까다롭다 보니 병원 전체에 환자를 구할 수 있는 분은 선생님밖에 없었어요.”
- ‘임신’이라는 두 글자에 안다해는 흠칫 놀랐다.
- “어떻게 알았어?”
- 임민지는 웃으면서 눈을 찡긋거렸다.
- “그렇게 좋은 일을 왜 속이려고 하셨어요? 어제 선생님 탁자 위에서 검사 결과를 봤어요.”
- 안다해는 겸연쩍게 웃었다.
- “좋은 일이긴 하지.”
- “남편분께는 말씀드렸어요?”
- “아직. 이틀 후면 남편 생일이거든. 그때 말하려고…”
- 이때 누군가가 수술실 문을 다급히 두드렸다.
- “틀림없이 환자 남편일 거예요. 아내와 아이의 상황이 궁금한가 보죠. 제가 다녀올 테니 선생님은 쉬고 계세요.”
- 임민지의 말에 안다해가 대답했다.
- “내가 갈게. 난 집도의니까 병원 규정대로 환자 가족에게 상황 설명을 해줘야 해.”
- 그녀가 벽을 짚으며 일어서자 임민지는 얼른 가서 수술실 문을 열어 주었다.
- 밖에 있던 남자가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 “선생님! 환자 상태 어떻습니까?!”
- “걱정하지 마세요. 임산부와 태아 모두 무사합니다만, 임산부는 아직 좀 더 관찰해야 해요…”
- 말이 끝나기 바쁘게 두 사람 다 멍해졌다.
- “다해 씨?”
- 안다해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앞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 “연석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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