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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아내

도망치는 아내

해울

Last update: 2024-04-18

제1화 이혼 축하

  • “오늘 우리 결혼 3주년인 거 알죠? 당신 깜짝 놀랄만한 거 준비했으니까 오늘은 일찍 들어와요. 분명 당신도 기뻐할 거예요.”
  • 문자 발송하기를 누른 문서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스레인지 불을 낮춘 뒤, 능숙하게 야채를 다듬었다. 모든 과정이 즐겁고 행복했다.
  • 한참을 기다려도 상대에게서 답장이 없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고용인이 말했다.
  • “사모님, 저도 도울게요.”
  • “괜찮아요. 아줌마는 아줌마 할 일 하세요. 오늘 저녁은 내가 직접 준비하고 싶어서 그래요.”
  • 고용인이 부러운 얼굴로 말했다.
  • “사모님과 대표님은 정말 금슬이 좋으세요.”
  • 문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담담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 그들이 정말로 남들에게 보이는 것처럼 금슬이 좋은 부부일까?
  • 사실 서로 사랑한다기보다는 쇼윈도 부부에 가까웠다.
  • 저녁 일곱 시, 주지훈이 퇴근하자 눈치 빠른 고용인들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 문서연이 한창 식사 준비를 하는데 등 뒤에서 남자의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턱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 멈칫하던 그녀는 이내 손을 들어 그를 살짝 밀쳤다.
  • 주지훈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 “이벤트 해준다고 일찍 돌아오라고 한 게 이걸 원한 게 아니었어?”
  • 문서연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 “아니에요. 오늘은 우리 3주년 결혼기념일이잖아요. 정말 당신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어서 그래요.”
  • 주지훈은 그녀를 놓아주고 살짝 구겨진 옷깃을 정리하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 “선물은 됐어. 당신의 이벤트는 항상 충격이었으니까.”
  • 문서연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말없이 주방으로 돌아갔다.
  • 잠시 후, 마지막 요리까지 식탁에 올랐다.
  • 문서연은 주지훈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 그녀가 와인잔을 들며 말했다.
  • “우리 결혼 3주년을 위하여 한잔해요.”
  • 불빛이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날카로운 턱선과 높이 솟은 콧대, 살짝 깨문 입술. 한번 보면 눈길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그는 오늘의 만찬이 그리 달갑지 않아 보였다.
  • 문서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와인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에게서 부드러운 응답을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그녀는 홀로 술잔을 들고 원샷했다.
  • 술잔을 비운 그녀가 다시 술을 따랐다.
  • 그리고 또 한잔.
  • 그러는 문서연의 얼굴에 살짝 취기가 올랐다. 그녀는 식탁에 몸을 기댄 채,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주지훈 씨, 오늘 같은 날에도 미소 한 번 안 보여주네요.”
  •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당신 장단에 맞춰 이 의미 없는 결혼기념일을 즐겁게 보내달라는 거야?”
  • “어떻게 의미가 없겠어요. 사람이 살면서 결혼기념일이 몇 번이나 돌아온다고요. 오늘을 놓치면 다음엔 다시 안 올 수도 있잖아요.”
  • 주지훈은 무슨 헛소리냐는 듯,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 “당신이 그렇게 해줄 거야?”
  • 문서연은 잔에 남은 술을 전부 입에 털어 넣은 뒤, 촉촉해진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 “아마… 그럴 수는 없겠죠.”
  • 주지훈은 이 무료한 대화를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는 굳은 얼굴로 넥타이를 풀고 외투를 벗었다. 이어서 셔츠 단추를 풀려는데 등 뒤에서 부드럽고 작은 손이 그를 끌어안았다. 곧이어 알싸한 알코올 향기도 함께 전해졌다.
  • 문서연이 말했다.
  • “뭐가 그렇게 급해요? 저 아직 선물도 못 줬단 말이에요….”
  • 뒤돌아선 주지훈은 양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찔러넣고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 술기운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문서연이 맑고 깨끗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순간 넋이 나간 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 주지훈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눈앞의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마구 흔들 만큼 매력 넘치고 예뻤다.
  • 그러지 않았으면 애초에 그가 그녀에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 여자의 여린 손이 그의 셔츠 속을 파고들자 그는 주저 없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포갰다.
  • 문서연은 아팠는지 얕은 신음을 내뱉었다.
  • 침대에 누운 그녀는 욕망에 혼탁해진 눈빛을 하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 그녀의 위에 올라탄 남자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비아냥거리듯 물었다.
  • “아까는 싫다며?”
  • “당신은 그거 모르죠? 가끔은 여자의 싫다는 말이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거요.”
  • 주지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 오늘의 문서연은 평소와는 달리 무척 적극적이었다. 그녀가 그의 입술을 살짝 깨물자 피비린내가 두 사람의 입안에 퍼졌다.
  • 키스가 아니라 마치 기 싸움 같았다. 이긴 자가 주도권을 가져가게 되는 싸움.
  • 그가 허겁지겁 옷을 벗으려는데 문서연이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 “주지훈 씨, 우리 이혼해요.”
  • 그녀의 몸에 걸터앉은 남자가 멈칫하며 되물었다.
  • “당신 뭐라고 했어?”
  • 문서연은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했던 말을 반복했다.
  • “우리, 이혼하자고요.”
  • 주지훈의 눈빛에서 욕망이 사라졌다. 그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 “이번에는 얼마가 필요한 거야?”
  • 그가 아는 그녀는 매번 돈이 필요하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 “한 푼도 필요 없어요.”
  • 문서연은 베개 밑에서 이혼 협의서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 “훑어보시고 문제없으면 사인하시면 돼요.”
  • 주지훈의 얼굴이 순간 음침하게 굳었다.
  • “문서연 적당히 해. 당신의 이런 재미없는 장난에 같이 놀아주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 “오늘 밤 깜짝 놀랄만한 이벤트 준비했다고 했잖아요. 당신도 좋아할 일 아닌가요?”
  • 주지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어째서인지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가 이 순간 얄밉기 그지없었다.
  • 문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 “주지훈 씨, 솔로 복귀 축하해요.”
  • 주지훈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 “당신 진심이야?”
  • 문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어때요? 이번에는 충격이 아닌 좋은 이벤트 맞죠?”
  • “알았어. 나중에 후회하지 마.”
  • 주지훈은 이 말 한마디 내뱉은 뒤,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방을 나갔다.
  • 쾅!
  • 문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주지훈이 거들떠보지도 않은 이혼협의서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 ‘문서연, 이혼한 거 축하해.’
  • 그날 밤, 문서연은 이 집을 나갈 준비를 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고작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 주지훈이 사준 액세서리나 옷은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원해서 사준 것도 아니었고 겉보기에 화려한 이 물건들은 주지훈과 헤어지면 그녀에게도 무용지물이었다.
  • 문서연은 이혼협의서를 탁자에 내려놓다가 다시 집어 들렀다.
  • 그녀는 거실을 지나쳐 식탁으로 갔다. 주지훈을 위해 준비한 음식들을 그는 한 술도 뜨지 않았다.
  • 이번 결혼기념일도 생각했던 것처럼 의미 없이 지나갔다.
  • 하지만 앞으로 이 날짜는 이혼 기념일로 기억될 것이니 상관은 없었다.
  • ‘먼 미래에 주지훈은 오늘을 떠올리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 아마 그녀가 그와 결혼하고 지금까지 했던 일 중 가장 만족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 택시에 탄 문서연은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 재벌가 사모님으로 3년을 살았고 드디어 그녀가 원래 있던 가난하고 궁핍한 세계로 돌아가게 되었다.